Home > 칼럼 > 로쟈의 인문학 서재 칼럼 목록 > 내용   2007년10월18일 제681호
공부란 무엇인가

‘털 없는 원숭이’냐 ‘인간다운 인간’이냐, 인간의 길로 이끄는 책들

▣ 인터넷 서평꾼 http://blog.aladdin.co.kr/mramor

지난주가 ‘인문주간’이었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올려 인문학의 부흥을 꾀하자”는 취지로 지난해부터 정부기관에서 열고 있는 행사로 올해의 주제는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었다. 거꾸로 짚어보자면, 한국 사회가 닫힌 사회이고 소통이 차단된 사회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문학이 그동안 닫힌 학문이자 불통인 학문이었다는 것인가? 진의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인문학 공부와 관련된 책들을 몇 권 들추게 된다. 대저 학문이란 무엇이고 공부란 무엇인가를 되새겨보기 위해서다.


△ (사진/ 한겨레 이정용 기자)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란 부제를 단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그린비 펴냄)부터이다. 호모 쿵푸스? ‘쿵후하는 인간’ 곧 ‘공부하는 인간’의 재기발랄한 명명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호모 쿵푸스의 또 다른 이름은 ‘호모 부커스’이니 이는 또한 ‘책 읽는 인간’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규정해주고 인간과 동물 간의 차이를 지정해주는 종차(種差)라는 것이다. 그러니 돈과 출세를 위한 공부가 아니다. 존재와 자존(自尊)을 위한 공부이다. 그래서 ‘인생역전’은 이 사태를 지시하는 문구로 부족해 보인다. 공부는 ‘그저 인간’인가, 곧 ‘제3의 원숭이’ 혹은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다운 인간’인가를 판별해주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은 없다.

중용이란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라는 문제의식으로 그러한 무지와 대중 기만에서 탈피하기 위해 책읽기에 나선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공부>(랜덤하우스 펴냄)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이탁오의 말. “나이 50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장정일은 이 글을 보고 핑, 눈물이 돌았다고 적었다. 당신 또한 영문도 모르고 앞사람을 따라 짖어댔다면 ‘한 마리 개’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저자의 고백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새삼 ‘호모 쿵푸스’로 진화하는 수밖에. 마흔이 넘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몸으로 한다. 강유원의 잡문집 <몸으로 하는 공부>(여름언덕 펴냄)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가는” 것이다. 이 ‘지행합일’의 정신은 사실 저자의 지적대로 <논어>의 첫머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에서 배우는 ‘학’은 정신의 일이고 익히는 ‘습’은 몸의 일이다. 즉,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힌다. 이것이 이론(배움)과 실천(실습)의 합일이고 일치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습’이 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인문학습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신영복의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 펴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저자는 감옥에서 같은 감방지기인 노촌 이구영 선생에게서 동양고전과 한학을 배운다. <강의>는 경제학자인 저자가 그러한 인연으로 얻은 배움을 학생들에게 풀어서 나누어준 기록이다. 그의 풀이를 따르면, ‘習’(습)이란 글자는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을 나타낸다. 자신이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실습할 때, 곧 가르칠 때의 기쁨이 ‘학습’의 기쁨이다(어린 새들이 날갯짓하는 걸 바라보는 기쁨!). 이 때문에 ‘학습’은 혼자만의 ‘공부’로는 얻을 수 없는 ‘배움의 변증법’을 달성한다. 물어서(問) 배우고(學) 이를 실천하라(習)! 인간의 길이고 인문학습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