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팅’ 기법으로 쓰인 연작시의 쾌감, 성기완의 <당신의 텍스트>
▣ 신형철 문학평론가
서태지가 돌아왔다. 귀에 감겨오는 멜로디도 여전하지만 신선한 사운드도 짜릿하다. 고만고만한 작곡가들이 상투적인 사운드를 재생산하는 동안 창조적인 뮤지션들은 소리 하나를 얻기 위해 서아무개처럼 흉가에서 녹음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시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시를 언어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어떤 시인은 멜로디(메시지)를 이리저리 매만지다 말고 사운드(화법 혹은 스타일)를 혁신하기 위해 고투한다. 시인 성기완의 세 번째 시집 <당신의 텍스트>(문학과지성사, 2008)를 읽을 때 이 시인이 뮤지션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하는 일은 유용하다. 그는 음악으로 치자면 발라드에 해당할 연애시의 영역에서 새로운 사운드를 실험한다. 이를테면 발라드에 노이즈 집어넣기.
“웬일이죠/ 오히려 당신이 생각날 때/ 당신에게 연락을 안 한다는/ 당신은 그렇게 먼/ 그러나 때로는 가까운// 당신의 나신이 기억나지 않아요/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 벗었죠/ 불이 켜져 있을 때는 눈을 감았죠/ 그렇게 우리는 척척한 몰입의 순간에도/ 비밀을 유지했다는// 이건 뭐죠/ 나는 몇 번이나 참았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에/ 이를테면 사정의 순간 직전에/ 나는 다른 말을 내뱉었죠/ 안에다 싸도 되냐는 식의// 대답은 늘 하나였어요/ 안 된다는 것/ 나는 늘 그 대답에 안도했죠/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무거워지지 않을 거라는 거”(‘당신의 텍스트 3’에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고 ‘안에다 싸도 돼?’라고 말하기. 부드러운 발라드 사운드를 유지하던 시는 저 문제의 구절에서 노이즈를 만든다. 이 정도면 온건하다. 다른 예를 들자면, 이 시인은 뜬금없이 ‘핥다’라는 말을 툭 던진다. “당신이 좋아하는 날씨를 나도 좋아해야지/ 핥다”(‘오늘의 메뉴’) “딸 거야/ 빨 거야/ 핥다”(‘베란다에서’) 인간을 포함한 대다수 동물들의 사랑에서 ‘핥는’ 행위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가지런하게 정리된 연애시의 사운드에서 ‘핥다’라는 말은 거의 노이즈에 가깝다. 당신을 사랑하오, 그래서 당신을 핥고 싶소. 이렇게 쓰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힙합도 아닌데 발라드의 한 대목에서 검열을 상징하는 ‘삑-’ 소리가 난다면 얼마나 괴상하겠는가.
그냥 솔직한 시인이구나 하고 넘어가면 그만일까. 아니다. 연애시에서 섹스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 정도야 대수겠는가. 우리가 노이즈라 부른 것의 층위는 훨씬 더 넓다. 이 시인은, 마치 앰비언트 뮤직에서처럼, 일반적인 연애시의 사운드에 여러 환경적 요소(텍스트)들을 도입해 음악과 소음의 경계를 흔든다. 시인의 말로는 ‘스파팅’(spotting)이다. 더럽히기 혹은 얼룩덜룩하게 하기. “글을 쓴 시각, 공간의 정황을 글 속에 기입하고 그 글의 느낌을 그 글의 정황과 연결시키는 거야. 일종의 ambient writing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당신의 텍스트 4’에서) 이 시집의 척추인 ‘당신의 텍스트’ 연작 열한 편이 이 스파팅 기법으로 씌었다. 그저 실험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묘하게 서정적이다.
물론 이 시집에는 멀끔하고 예쁘장한 사운드의 시들도 있다. 어떤 독자들은 이 시집에서 그런 발라드만을 골라 읽고 말겠지만 그건 이 시집을 거꾸로 들고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노이즈로 얼룩진 시들이 오히려 순수해 보이고, 멀끔하고 예쁘장한 시들이 어딘가 엉큼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 전도 효과가 이 시인의 주요 의도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실상 우리의 연애라는 게 발라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유치한 자존심, 집요한 욕망, ‘찌질한’ 응석 따위의 노이즈들이야말로 연애의 진짜 사운드인 거니까. 어찌 보면 ‘홍대 마초의 모텔 서정시’처럼 보이는 그의 시들이 꽤나 리얼할 뿐만 아니라 어쩐지 정이 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시에 노이즈를 도입하는 일 그 자체가 놀랍도록 새롭다고 하긴 어렵다. 그러나 사운드 혁신에 가장 둔감한 장르 중 하나인 연애시의 한복판에서 노이즈를 만들어내고, 또 그 노이즈를 서정적인 층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충분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물론 아슬아슬한 시들도 있다. 그런 시들이 만만해 보여서 ‘이런 것이 시라면 나도 쓴다’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 같다. 근데 써보면 안다. 나도 쓰겠다 싶은 그런 시, 막상 써보면 잘 안 써진다. 화음에 정통한 자만이 소음으로도 시를 쓸 수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