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은 오늘, 시 앓아주는 남자가 돼 읽는 연애시
▣ 신형철 문학평론가
점잖은 목소리가 지겨운 날, 칼럼 같은 거 따분한 오후. 오늘은 ‘시 읽어주는 남자’ 같은 거 되고 싶지 않다. 뭔가 돌팔이 의사 같잖아. 물론 창작자가 환자라면 평론가는 의사 쪽이겠지. 그래도 늘 그래야 한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 좋은 의사는 병에 대한 지식이 많은 의사가 아니라 앓아본 병이 많은 의사 아닌가. 아프면 아프다고 하자.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늘은 병이 많은 날, 영혼이 좌불안석인 오후.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고 싶지 않아. ‘시 앓아주는 남자’라면 또 모를까. 미안해요. 쓰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쓰는 거니까. 늘 그렇지, 사랑이 문제야.
목디스크가 심한 사람은 자다가 깨면 너무 고통스러워 제 목을 비틀어버리기도 한다는데, 사랑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은 날이 왜 없을까. 마음의 소요가 지겨우면 여행을 떠납니다. 마음도 따라오니 별수 없습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쿨하게 말하는 사람들 하나도 안 멋있어요. 믿어서 하는 게 사랑인가? 하지 않을 수 없어 믿는 게 사랑이지. (믿어야지 하고 교회 가는 사람 있나요?) 하고 있으면서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 좋지 않다. 물론 사랑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존경합니다, 영혼의 강자들. 그러나 그들은 시 따위 쓰지도 읽지도 않지.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믿으며/ 내가 하는 것을 한다//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여전히 낭만적인 밤/ 고양이들도 외롭기 때문에 울고 있지/ 호주머니를 뒤집어 붉은 스티치를 확인할 때까지/ 당신들에게 선물을 했다/ 파란 뱀에게도 달걀을 선물했다/ 먹어봐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 맛이 날 거야// 왜 안 되겠는가/ 좁은 나의 침대는 여전히 딱딱하고/ 나의 혀는 여전히 하나인데// 사랑에 미친 가님, 다들 나를 그렇게 불렀다…”(‘불한당들의 모험 6-사랑에 미친 가님’에서)
곽은영의 첫 시집 <검은 고양이, 흰 개>(랜덤하우스·2008). 첫 문장에 끌렸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뭔지 모르지만, 견딜 수 없고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일단 하는 거다. 그리고 기왕 하는 거, 믿으면서 하는 거지. 느꼈습니다, 주저하는 의사의 청진기를 헐벗은 제 가슴에 끌어다대는 사람의 슬픈 당당함 같은 것. 절망의 얼굴을 봤지만 못 본 척하는 자의 이상한 씩씩함. “사랑에 미친” 사람이라 손가락질당해도 호주머니를 몽땅 털어주지 않고는 자기가 못 견디는 거죠. 영혼의 약자입니다. 동병상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내 집을 엿보고 있는 거 알아 가끔씩/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것도 너지/ 도어렌즈를 들여다보면/ 희뿌연 네 눈동자 깜빡깜빡/ 내 쪽을 바라보고 있어/ 쳐들어오려면 빨리 오너라 빨리/ …/ 문 밖 신문 뒤적이는 소리/ 그래, 너지 틀림없다/ 문고리를 한번 돌려보더니/ 뭔가 쑤셔넣고 돌리네/ 천천히 열리는 문/ 드러나는 너의 손과 얼굴/ 높이 방망이 치켜들고 달려가/ 널 때려눕힌다 불을 켠다/ 이런, 현관 바닥에 내가 뻗어 있네/ 내가 얻어맞아 누웠네/ 뭐야 이건 현관 거울엔 잘 아는 눈빛/ 도어렌즈 속 뿌연 네 눈동자”(‘도둑일지’에서)
김경후의 첫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민음사·2002)를 뒤늦게 읽었습니다. 이 재미있는 시를 연애시로 읽으면 어떨까. 마음 안팎의 분란이 지겨워 벼르고 별렀겠지. 그런데 방망이로 두들겨팼더니 뻗어 있는 건 ‘너’가 아니라 ‘나’라는 것. 사랑은 이렇게 늘 뒤늦게 깨닫는 자작극. 터는 것도 나, 털리는 것도 나. 이를테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하는 사람이 늘 ‘미안해’라고 말한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는 거지. 그래야 다시 또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지는 거다.
두 시를 엮어보자.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믿으며 내가 하는 것을 한다. 이런, 현관 바닥에 내가 뻗어 있네. 그래도 나는 내가 하는 것을 한다.” 이런 것도 결론이냐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답하겠어요. 시 앓아주는 남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