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이 죽일 놈의 PC > 내용   2007년06월07일 제663호
‘스타 한 판’의 추억

▣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스타’나 한 판 하자!”

세기말 대학가에 이보다 강력하게 친구를 끌어모으는 말이 있었을까. 강의실에 가방만 남긴 채 PC방에 결집하던 이들은 식사 시간이면 어김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 전략·전술에 대해 논의했다. 1998년 4월 국내에 출시된 <스타>는 그렇게 대학가를 점령했다. 학교 인근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를 중심으로 아지트가 생성됐고, 그곳은 종종 MT 장소로도 활용됐다. <스타>에 빠진 남친 때문에 고민하는 여자에겐 ‘헤어지든가 같이 하든가’ 하라는 조언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커플끼리 1:1로 <스타>를 하다가 남자가 여친 진영에 ‘핵’을 쏴서 싸웠다는 얘기에 함께 분노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한 친구의 자취방은 4명이 함께 산다는 이유로 테란의 ‘벙커’로 불렸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직장에도 <스타> 바람은 휘몰아쳤다. 동료 간에 가르치고 배우는 아름다운 풍경이 자주 연출되곤 했다. 회식 뒤, 나이 든 상사들이 당구를 치고 싶어할 때 젊은 직원들은 PC방으로 향해 세대 간의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직장 내에서 개최되던 바둑대회, 장기대회 틈새로 <스타> 대회가 버젓이 끼어들었다. 평소 행동이 굼뜬 김 대리도 <스타>를 하는 순간만큼은 현란하게 단축키를 누르며 마우스질을 해대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스타>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직접 하는 것만이 아니라 ‘구경하는 것’도 재밌다는 점이다. PC방에 가면 잘하는 사람 뒤에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여러 명의 구경 인파가 형성되곤 했다. 자기가 하는 것도 아닌데 손에 땀을 쥐는 이들은 “1시 공격!” “저그 들어온다!” 등과 같은 코치인지 감탄사인지 모를 말들을 내뱉었다. 이런 현상은 곧 ‘e스포츠’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중계가 가능하고 팬층이 형성돼야 하며 이윤이 나야 하는 스포츠의 특성과 <스타>는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전략·전술에 따라 판세가 달라지고 훈련을 통해 선수의 실력이 향상될 수 있으니 팀이 꾸려지고 프로 선수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스포츠 브랜드부터 금융권까지 다양한 스폰서가 생겨났고 그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어느덧 <스타>와 함께한 시간이 올해로 10년이다. 그사이 게임은 전세계적으로 950만 장이 판매됐고 그중 국내에서 팔린 것만 450만 장이란다. <스타>가 한국에 들어온 지 2년, 확장팩 브루드워가 출시된 지 1년여 만인 2000년 4월엔 한 국가에서 최단시간에 가장 많이 팔린 소프트웨어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얼마 전 <스타> 제작사인 블리자드가 차기작인 <스타크래프트2>를 한국에서 가장 먼저 공개한 것은 당연한 일. 마이크 모하임 블리자드 대표는 “한국 게이머의 열정 덕분에 세계 게임업계 선두주자로 올라섰다”며 감사의 인사를 했단다.

10년 동안 학교와 직장을 휩쓸었던 <스타> 열풍이 이번에도 계속될까. <스타> 차기작 출시 소식에 국내 게임업체들이 벌써부터 긴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보다 더 긴장하는 건 자녀들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아 한숨이 깊어진 부모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그 ‘10년’ 사이, 게임의 세계도, 온라인 세계도, 그와 연계된 오프라인 세계도 참 많이 변했다. 온라인은 더욱 북적대고 오프라인은 조금 외로워 보인다. <스타크래프트2>를 맞이하는 기분은, 그래서인지 반갑고 애틋하면서 어쩐지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