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지금부터 4년6개월 전의 일이다. 아직 아침에 찬바람이 불고 야산의 그늘진 곳에는 눈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2001년 2월이었다. 이른 아침에 서울대공원으로 향했다. 어쩌면 생명공학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해 지면에 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기도 했다. 그날 언론사 기자로는 유일하게 서울대공원 사자우리에 들어섰다. 사진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송사 ENG카메라가 한대 있었지만 아날로그 카메라는 <한겨레21>의 것뿐이었다. 2000년 한해 동안의 실패를 딛고 성공하면 사진기자와 함께 ‘특종기’를 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자리에 시사주간지 기자로서 ‘초대’받은 것은 뜻밖이었다. 석달 전쯤 ‘멸종동물이 환생한다’는 제목으로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 불리는 체세포 핵이식 기술을 통해 생물종이 되살아난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얼마 뒤 서울대 수의학과 황우석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사를 봤는데 복제 현장을 직접 보여주고 싶다”면서 “앞으로 있을 백두산 호랑이 수정란 대리모 이식 때 초대하겠다”고 했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시술 전날 황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울대공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흔치 않은 시술 장면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날 서울대공원 사자우리에서는 우리나라에선 야생 상태로 자취를 감춘 백두산 호랑이 복제 시술이 이뤄졌다. 복제 젖소 ‘영롱이’와 복제 한우 ‘진이’를 탄생시킨 황 교수가 이종간 핵이식을 통해 멸종 동물 복제를 시도하는 자리였다. 이른바 ‘낭림 프로젝트’라는 것으로 북쪽에서 데려온 백두산 호랑이 ‘낭림이’의 귀에서 체세포를 떼어내 체세포 핵치환으로 수정란을 만들어 대리모인 사자의 자궁에 넣는 시술이었다. 당시 ‘복제’ 전문가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던 황 교수에게 백두산 호랑이 복제는 거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시술을 위해 수술 가운을 입은 황 교수를 보았다. 그 뒤 수술 가운 혹은 실험복 차림의 황 교수를 여러 번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사진 촬영을 위한 복장이었다. 어쨌든 수술 가운이 황 교수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우리에서 포효하던 사자도 마취제 몇방에 속수무책으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사자의 배를 가른 뒤 눈 깜빡할 사이에 수정란 이식이 끝났다. 자칫 손가락에 시술 모습이 가릴 수도 있었다. 다행히 이식 장면을 목격하고 렌즈로 포착할 수 있었다. 오랜 경험과 숙달된 기술에서 나오는 황 교수의 손놀림이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계절이 두번 바뀌어도 백두산 호랑이 탄생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황 교수에게 어찌됐는지 물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움이 많다”는 짤막한 대답이 날아왔다. 낭림 프로젝트는 황 교수의 수많은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거기에만 매달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낭림 프로젝트는 진행 상황마저 파악되지 않았다. 대신 황 교수는 인간 배아줄기 세포 복제에 성공하면서 생명공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우뚝 섰다. 황 교수의 국제적 활동을 지원하는 ‘바이오 연구 지원대사’까지 신설되고 ‘복제 개’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연초 황 교수는 “민족의 혼을 위해 백두산 호랑이기를 기필코 복제하겠다”고 밝혔다. 4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제라도 기사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갖게 됐다. 그러면서 필름이 보관돼 있는지 알아봤다. 아뿔싸! 카메라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과정에서 지면에 싣지 않은 사진 필름은 대부분 정리했다는 것이었다. 일부 필름이 보관된 자리를 살폈지만 사자우리 복제 시술 장면을 담은 필름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백두산 호랑이 특종에 대한 환상은 접은 지 오래다. 다만 복제 개 성공을 계기로 백두산 호랑이가 야생에서 생명력을 발휘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