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취재뒷담화 칼럼 목록 > 내용   2005년06월16일 제564호
대우와 절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기자 생활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그다지 터프하지 않은 나 또한 절도 비슷한 행각을 벌인 일이 몇번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지금도 영화필름처럼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시점만은 가물가물해 예전의 메모와 인터넷 기사를 뒤져봤더니 1999년 4월19일이었다.

그때 난 한겨레신문사로 옮기기 전 한 석간신문 기자로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를 출입하고 있었다. 외환위기 직후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설치된 금감위에서 1999년의 최대 이슈는 ‘대우그룹 처리’였다. 그때쯤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힘든 지경에 빠져 있었다. 당연히 금감위 출입기자들로선 대우 문제에 대한 금감위 방침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침에도 몇 군데 전화를 돌린 뒤 석간 기자의 일상적인 동선에 따라 금감위 인사들의 방을 돌기 시작했다. 오전 8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발걸음이 가 닿은 곳은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의 자문그룹에 속한 이의 방이었다. 그때쯤이면 당연히 출근했으리라 여기고 방으로 들어서는데 청소하는 아주머니뿐이었다. 방문은 활짝 열린 채….

방문객 소파에 앉아 무료하게 기다리다 무심코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가 눈에 띄어 별 생각 없이 뒤적거리는데, 이게 뭔가! 손으로 메모한 A4용지 1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마치 표처럼 정리해놓은 내용은 놀랍게도 대우그룹에 관한 것이었다. 맨 왼쪽에 대우조선, 대우자동차를 비롯한 대우 계열사들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고, 오른쪽으로 일본업체 등 외국기업 이름, 액수를 나타낸 수치 등이 빽빽하게 담겨 있었다. 대우그룹 자체적으로 마련한 것이거나 금감위와 협의한 구조조정 계획일 것이란 짐작이 드는 순간 더 이상 방 주인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바로 기자실로 줄행랑을 쳤다.

막상 문제는 기자실로 내려온 뒤였다. 업체 이름과 수치만 잔뜩 나열된 1장짜리 자료를 어떻게 기사화해야 할지, 또 기사화하는 게 맞는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더구나 난 대우그룹 내부 사정에는 밝지 못한 터였다. 고민 끝에 1장짜리 자료는 대우그룹을 담당하고 있던 다른 부서 기자에게 건네졌고, 그날치 석간신문에 ‘대우조선, 일본업체에 매각’이란 제목을 달고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공교로운 일은 그날 오후에 벌어졌다. 해외출장 중이던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귀국해 바로 그날 오후에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까지 반신반의하고 있던 금감위 출입기자들은 석간 보도를 바탕으로 부랴부랴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의 발표 시각이 (대부분 조간신문의 1판 마감 시각인) 오후 5시로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약속한 시각보다 10분 늦게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 회장의 발표 내용은 문제의 1장짜리 문서와 거의 동일했다.

1장짜리 문서는 결국 대우가 금감위에 제출한 구조조정 이행 약속이었던 셈인데, 결국 지키지 못할 헛약속이었음은 나중에야 알았다. 1장짜리 문서를 들고 나온 그 방의 주인을 슬슬 피해다니다가 한참 뒤에 만났는데, 그는 실실 웃으며 “그거, 어차피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장짜리 문서 내용 가운데 당시 공식 발표 내용에 포함되지 않은 일부 내용을 바탕으로 그 이튿날 ‘대우자동차, 세미·워크아웃 추진’이란 기사를 내보내는 등 한껏 활용해먹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결과적으로 김우중 회장의 헛약속에 속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