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 키다리라던 나도 짐승의 체력을 지닌 미군은 버거웠네… 북한 사람이 우리 같아지려면 35년 걸리겠다는 어림짐작에 서글픔이…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말마디나 한다는 사람, 글줄이나 쓴다는 사람이면 다 하는 야구 이야기. 나까지 보태고 싶다는 생각, 별로 없었다. 그래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개최되고 있는 동안, 신문이나 잡지사에서 관전평 요청해올까봐 꽁꽁 숨어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대회 끝난 지 꽤 오래됐는데도 우리가 4강까지 올라간 그 야구 시합들이 영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아무래도 그 야구 시합을, 그 이상의 어떤 현상으로 짚어보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모양이다.
우리가 부추밭에서 슬라이딩할 때
1950년대, 초등학교 4·5·6학년을 다니던 시절에 내가 가장 즐긴 스포츠는 바로 야구다. 아니, 그 시절에 벌써? 의아하게 여기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야구를 하자면 들판 같은 넓은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야구(野球)다. 야구 시합을 할 만한 땅, 우리나라에는 예나 지금이나 흔하지 않다. 날아다니는 야구공은 흉기에 가까울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어서, 다른 아이들이 뛰어노는 학교 운동장을 쓸 수도 없었다. 논밭도 쓸 수 없었다. 당시의 논밭에는 겨울철에도 보리가 자라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가 자란 도시 대구의 변두리에는 ‘정구지(부추)밭’이 많았다. 겨울철이면 부추밭에서 야구를 했다. 늦가을에 밭 임자들은 부추밭에다 인분을 듬뿍듬뿍 뿌렸다. 지금 같으면 악취 때문에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지만 그때는 냄새가 코로 들어올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인분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는 부추밭 야구장에서 ‘슬라이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야구 용어는 영어와 일본어가 섞인 잡탕이었는데, 그 용어들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야구를 하자면 한 팀에 최소한 9개의 ‘클럽’(글러브)과 한 개의 ‘빠따’(방망이)가 있어야 한다. 우리 팀에 진짜 야구장갑은 서너 개밖에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골판지를 재단하고 이것을 굵은 실로 기워 글러브로 썼다. 방망이도 우리 손으로 깎아서 썼다. ‘핏짜’(투수), ‘캣짜’(포수), ‘쇼’(유격수), ‘하수도’(일루), ‘세콘’(2루), ‘더더’(3루), 이것이 우리가 썼던 야구 용어들이다. ‘산싱’(삼진), ‘고다이’(공수 교대), ‘쇼부’(승부) 같은 일본말도 썼다.
어린 시절 일과 운동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 입대할 당시 내 몸은 한국인 평균치보다 좀 컸다. 키 177cm, 체중 75kg 내외였다. 겨우 그 키로 ‘키다리’ 소리를 들었으니, 요즘의 젊은 독자들이 이 글 읽으면서 웃겠다. 길이 285mm, 발이 너무 커서 국산 신발은 맞는 게 없었다. 그래서 늘 미제 군화를 끌고 다녔다. 그래서 별명이 ‘똥구두’였다. 지금 내 아들의 키는 185cm를 넘지만 아무도 ‘키다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들의 발 길이는 300mm를 훨씬 넘지만 신발 사 신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1970년대가 시작되던 해, 나는 베트남에 파견됐다. 보충병 시절, 지휘부는 야구 좀 해본 ‘놈’ 나오라고 했다. 나가서 테스트 받고 선수가 되었다. 미군과의 야구 시합이 있다고 했다. 가까운 비행장에서 미군 팀과 붙었다. 15 대 2쯤으로 참패했던 것 같다. 꽤 크고 힘이 좋았던 나도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짐승의 체력을 지닌 놈들’,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뒤에 다른 미군 부대와 축구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야구와 비슷한 점수 차로 또 참패했던 것 같다. 나도 선수로 뛰기는 했지만, 시합 내내 공은 두어 번밖에 못 차봤던 것 같다. 미군 부대의 ‘매스홀’에 들어가 처음 보았던 놀라운 광경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마실 것과 어마어마하게 기름진 음식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거대한 뷔페 식당이었다. 어린 시절의 우리가 꽁보리밥 한 덩어리, 아니면 국수 한 그릇 먹고 부추밭에서 야구 연습을 하고 있을 때, 미국 아이들은 고기 먹고 잔디밭에서 야구 연습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그날 처음으로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금국에 밥 말아먹고 있을 동안 미군들은 매일 그렇게 먹고 마시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짐승 같은 체력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 것이지 싶었다.
1974년 전후, 나는 잡지 기자였다. 고려대학교 운동장에서 한국 축구의 대들보 차범근 선수를 인터뷰했다. 나는 엄청나게 굵은 그의 허벅지를 보면서, 그의 폭발적인 주력을 보면서 베트남에서 만났던 미군들을 떠올렸다. 뒷날 그가 독일에서 뛰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하, 우리 한국인도 드디어 짐승의 체력을 지닌 유럽인과 ‘맞장’ 뜨기 시작했구나 싶어서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미국인이나 유럽인에 견줘 우리가 왜소하게 느껴졌던 것은 식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실감으로 바뀌었다. 지금 독일에서 아버지 차범근 감독의 대를 이어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차두리 선수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뛴다.
홈으로 뛰어드는 자세의 차이
나에게, 우리 선수들이 대만과 중국을 완파하고 일본을 연파한 것은 그다지 감동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나는 우리 선수들의 몸피가 그들보다 훨씬 크고 체력도 그들을 앞선다는 인상을 받았다.
35년 전, 미군들과 야구 시합을 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이번 시합에서 미국 선수들, 미국 무대에서 뛰는 멕시코 선수들의 체형에 자주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홈으로 뛰어드는 그들의 자세를 유심히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 선수들 대부분은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고 뛰어드는 데 비해, 미국 선수들이나 미국에서 뛰는 멕시코 선수들은 배를 앞세우고 뛰어드는 것 같았다. 과체중의 기미가 역력했다.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가 그런 미국과 멕시코를 완파한 것이다.
1990년대 들면서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운동장에서, 골프장에서, 축구장에서 서양의 ‘떡대’들을 올라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코끝이 찡해질 만큼 자랑스럽다. 그런데 이 자랑스럽다는 느낌 뒤로, 코끝이 찡해질 만큼 서글프다는 느낌 또한 묻어든다. 덩치나 체력에서 서양인들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 우리 선수들의 당당한 모습 뒤로, 북한 사람들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다. 나는 북한에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TV 화면에 비치는 북한 사람들은 우리와 견줘 왜소하고 깡마른 것처럼 보인다. 외양도 조금 다른 것 같다. 흡사 미군과 야구 시합하던, 35년 전의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지금 통일된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사람들의 외양이 같아지기까지 또 35년쯤 걸릴 것이라는 어림짐작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야구 보면서 딴생각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