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진 기자csj@hani.co.kr
대표적 악법이라고 한다면 어떤 게 있을까. 국가보안법이나 호주제를 꼽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 당장 인터넷에서 설문조사를 한다면 ‘선거법 93조’를 대표적 악법으로 지목할 사람이 압도적일 것 같다.
선거법 93조. 원래는 오프라인에서 각종 인쇄물을 통해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마련됐다. 후보들의 상호 비방을 막자는 것이 애초 취지였다. 하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적용 범위를 인터넷으로 확장하면서 선거법 93조는 위력을 더해갔다.
특히 선관위는 지난 2002년 대선과 달리 이번 대선을 앞두고 선거법 93조 위반 행위에 대한 단속을 크게 강화했다. 인터넷 정치 포털과 일반 포털 사이트는 물론 개인 블로그까지 선관위의 감시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리꾼들의 불만도 자연스럽게 커졌다.
자신이 쓴 글로 인해 수사기관으로부터 출석하라는 요구까지 받게 되면 누리꾼 입장에서는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그 여파로 이미 인터넷에서 주요 인터넷 논객들의 글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정치 포털 서프라이즈에서는 ‘둥근시민’이나 ‘파오차이’ 등 필명을 날렸던 인터넷 논객들이 자취를 감췄다. 10월 말 현재 618명의 누리꾼이 인터넷에 올린 글로 인해 수사 대상이 됐다.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특정 후보에 대한 악성 댓글이나 비방 게시물을 처벌 대상으로 삼는 건 당연하지만, 문제는 나름대로 합리적 배경과 근거를 가지고 후보들에 대해 논평하는 행위조차 막고 있다는 것”이라며 “이는 헌법에도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평등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조치”라고 말했다.
선거법 93조 논란을 지켜보는 정치권의 기류는 엇갈린다. 우선 한나라당은 대체로 선관위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누리꾼들의 불만도 일부 이해하지만 워낙 전파 속도가 빠른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선관위로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것”이라며 “다만 단순한 의견 개진 정도를 가지고 선관위가 삭제를 명령하거나 고발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쪽에서는 발빠르게 누리꾼들의 편에 섰다. 정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서는 11월16일 누리꾼들을 위해 ‘블로그 수호천사단’을 발족했다. 블로그 수호천사단은 선관위로부터 고소·고발 등의 피해를 겪은 누리꾼들을 겨냥한 법률지원단 성격을 띠고 있다. 선거법 93조로 자신을 알리는 데 애를 먹고 있는 군소후보들 역시 당연히 폐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치권 외곽에서도 선거법 93조에 대한 대응책을 활발히 논의하고 있다. 우선 2007 대선시민연대에서는 11월20일 선관위와 경찰의 누리꾼 단속에 항의하기 위해 ‘피해 누리꾼 번개모임’을 갖기로 했다. 이들은 앞으로 공동 변호인단을 구성해 선관위를 대상으로 소송을 벌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선관위조차도 선거법 93조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정책토론 등은 비용도 거의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거에 대한 관심도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선관위에서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선거라는 게 한쪽이 유리하면 반드시 한쪽이 불리한 ‘제로섬’ 게임인 만큼, 개정되기 전까지는 현행법을 철저히 적용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어느 누구도 드러내놓고 옹호하지 않는 선거법 93조에 대한 논란은 어쨌든 당분간 계속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