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의원님들의 국회 대정부 질문에 대해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는 제법 진실에 근접한 답변을 한 죄로 곤경에 처했던 이해찬 국무총리가 다시 설화에 휩싸였다.

“현재 시·도지사 중에는 대통령감이 없다고 본다. 정치적으로 나는 고수, 손학규 지사는 한참 아래다.” 자신이 주재한 수도권발전대책협의회 자리를 박차고 나간 손학규 지사에 대한 보복적 성격이 강한 발언이다. 그러나 이 발언은 여야 대리전으로까지 확산됐다. 체면 깎인 손 지사는 당연히 “그 사람이 정치는 잘할지 몰라도 행정이나 경제는 빵점” “그 사람 입이 거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라고 반격했다. 시·도지사 가운데 대통령감이 없다는 말 때문에 ‘도매금으로 넘어간’ 이명박 서울시장까지 발끈했다. “대통령은 국민이 뽑는 것이지 총리가 뽑는 게 아니다. 이 총리는 입부터 좀 진중해야 한다.”

이 총리의 직설화법은 노무현 대통령과 닮은꼴이라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 평가다. 노 대통령은 과거 자신이 총재로 모시던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정면으로 받아쳤다. 그는 1992년 제14대 총선 직전 직설화법으로 낙마 위기에 처한 이해찬 총리를 살려내기도 했다. DJ에게 반기를 든 이력 때문에 DJ 측근들에게 괘씸죄가 걸렸던 이해찬 총리는 당시 민주당 공천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에 당시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노 대통령은 “김(대중) 대표님 당권이 가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길어야 1년 입니다”라며 92년 대선에서 DJ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는 직설화법으로 ‘이해찬 살리기’에 나섰다. “이해찬이 공천에서 탈락하면 탈당하겠다”고 배수진까지 치면서 결국 이 총리가 공천을 받도록 했다.

노 대통령은 ‘손학규 지사 저격’도 이 총리보다 한발 앞서나갔다. 노 대통령은 이미 1998년에 이 총리보다 훨씬 강하게, 더욱더 직설적으로 손학규 경기지사를 비판했었다. 그해 11월20일 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한 일간지 정치부장의 부친상 상가에서 두 사람은 겸상을 했다.

93년 4월 신한국당의 경기·광명 재보선 후보로 나서 금배지를 단 뒤 집권여당 대변인, 보건복지부 장관 등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던 손 지사는 그해 6월 경기지사에까지 도전했지만 좌절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해결사를 자임하는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에게 패한 것이다. 손 지사는 당시 상가에서 나를 비롯한 몇몇 기자들과 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좀 늦게 상가에 도착한 노무현 대통령이 이 자리에 합석했다. 1992년 총선, 95년 부산시장 선거, 96년 총선에서 거듭 낙선해 좌절의 나날을 보냈던 노 대통령은 그즈음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해 7월21일 치러진 종로 재·보궐 선거에서 국민회의 후보로 금배지를 단 것이다.

술이 한두잔 돈 뒤 노 대통령은 갑자기 손 지사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손학규 장관이 정치적으로 그만큼 성장한 것도 다 내가 그때(93년) 광명에 안 나갔기 때문 아닙니까.” 93년 경기도 광명 보궐선거를 말하고 있었다. 그때 노무현 대통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단연 우위를 달렸지만 DJ 측근인 동교동계의 반대로 공천을 받지 못했다. 반면 교수였던 손 지사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금배지를 달면서 정치적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손 지사의 얼굴은 굳어졌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입은 거침이 없었다. “원래 내가 광명으로 나가려 했죠. 여론조사도 내가 손 지사보다는 몇십%는 앞섰던 거 아닙니까. 그때 내가 안 나가서 손 장관이 개혁 성향의 교수라면서 표를 몰아갔지만, 내가 나갔으면 택도 없었을 겁니다. 유권자들은 당연히 나를 개혁 대표자로 봤겠죠. 안 그렇습니까.” 뭐 대충 이런 스토리였다. 이때 손 지사는 별로 반격하거나 대꾸하지 않았다.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만 기울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02년 손학규는 경기지사, 노무현은 대통령이 됐다. 이후 손 지사의 반격이 시작됐다. “더 이상 노무현 정권에 기대할 것이 없다”(2003년 10월16일), “노무현 정권은 수구 좌파다”(2004년 12월1일)…. 혹시 노 대통령에게 적잖이 신세를 진 이해찬 총리가, 노 대통령을 대신해 손 지사에게 보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