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신승근 김창석 칼럼 목록 > 내용   2005년07월05일 제567호
“군 과거사위여, 제발 우리를 조사해라”

[신승근의 도전인터뷰]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설계자 허화평 전 의원이 말하는 12·12와 5·18
광주 비극은 전두환 아닌 윤흥정과 정웅 책임… 김대중 비자금도 밝혀야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유신의 심장’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쓰러진 1979년 10월26일 이후 한국 현대사는 12·12 군사 쿠데타와 80년 민주화의 봄을 거쳐 5월18일 빛고을 광주를 핏빛으로 물들이는 격랑 속으로 치달았다. 그 결말은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신군부 주역인 육사 11기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이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96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 드라이브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유학성·황영시·허화평·허삼수·이학봉·차규헌·최세창·장세동·신윤수·박종규·정호용·이희성·주영복 등 신군부 주역 15명은 내란과 군사반란 혐의로 단죄됐다.

최근 이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문화방송 드라마 <제5공화국> 방영, 국방부 주도의 군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목사)의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 발포명령자 진실 규명 움직임 등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신군부 핵심 17명은 <제5공화국>의 대본 수정을 요구했고, 5·18 광주 진압 묘사에 대해 항의하며 방송의 정치적 의도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허화평 전 의원이 있다. 그는 10·26, 12·12, 5·18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과 ‘전두환 집권의 삼두마차’를 형성했고, 5공화국의 실질적 설계자로 평가된 인물이다. 6월30일 청와대와 과거 30경비단 주둔지인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미래한국재단’에서 그를 만났다.


△ (사진/ 박승화 기자)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허화평 전 의원은 군 과거사위원회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학살 발포명령자 조사 필요성을 언급한 데 대해 “우리는 더 잃을 게 없다. 차라리 우리를 조사해 진실을 밝히고, 광주의 발포 명령자도 제발 찾아달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12·12와 5·18을 내란과 군사반란으로 단죄한 YS(김영삼) 정권의 엉터리 정치재판의 진상이 밝혀질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또 광주의 비극을 촉발한 핵심 원인으로 지목된 특전사(공수부대) 투입에 대해 “부마 사태처럼 공수부대의 위력 시위만으로 시위대가 저항을 포기할 것으로 판단한 계엄사령부의 명백한 판단 착오였다”며 “우리도 사태가 그렇게 확대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허 의원은 특히 광주 비극의 실제 책임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아니라, 부적절한 상황 대처로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간 전남북 계엄분소장 윤흥정 중장과 그 휘하 정웅 31사단장인데, 이들이 당시 야당과 결탁해 역사를 왜곡하는 거짓 증언으로 모든 책임을 신군부에 덮어씌웠다고 주장했다.

권정달은 배신자… 공수부대 보낸 건 착오

1987년 6월항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로, 대학 시절 우린 황석영씨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통해 공수부대가 광주 시민을 무참히 살육한 것을 알았고, 확신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확신한다.

=그건 전부 다 거짓말이다. 살육한 적은 없다. 물론 사람을 죽인 적은 있지만 살육은 지나치다. 살육은 가만히 있는데 무참하게 사람을 죽였을 때 할 수 있는 소리다.

당시 ‘보안사 핵심 4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권정달 정보처장은 96년 검찰 조사에서 ‘전두환 사령관 지시로 집권을 위한 여러 계획을 세웠고, 그에 따라 초기에 과도하게 진압할 목적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한 게 광주 비극의 원인이었다’고 진술한 바 있는데.

=권정달씨는 우리와 같이 구속됐어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기소도 안 됐다. 우리한테는 배신자다. 당시 안기부장이 권영해였는데, 같은 권씨로 육사 동기였다. 권정달은 또 YS 정권하에서 정치적 복귀를 노리고 있었고, YS쪽과 상당히 가까웠다. 정권이 살려줄 테니 협조하라며 배신자를 만들었다. 권정달이 그런 증언을 하지 않았다면 5·17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를 기소하기도 거의 불가능했다. 권정달씨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도와준 것이다.

광주의 경우 정부가 발표한 공식 사망자만 154명이다.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해 과도하게 진압했다는 게 현대사 연구자들의 대체적 평가다.

=5공화국을 비판하는 사람의 일방적 주장이다. 화염병, 파이프 들고 나오고, 서로 엉키고…. 누가 과잉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된다. 단 한 가지 특전사를 보낸 것은 잘못이다. 부마 사태 때 물리적 충돌이 있기 전에 특전사의 무력 시위만으로 상대가 포기하니까, 광주에서도 그리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심각한 충돌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보병연대나 사단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특전사는 데모 진압 부대가 아닌 정예 소수부대로, 다중을 다스릴 능력이 없다. 판단착오였다.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상상을 못했으니까.


△ 허화평 전 의원(오른쪽)은 전두환 집권 이후 청와대 정무1수석비서관으로 5공화국을 떠받쳤다. 그러나 전두환 친인척 비리 척결을 주장하면서 5공 실세들과 정치적으로 결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한국일보)

초동 단계에서 강경 진압해 시위 확산을 막거나, 신군부가 혼란을 가중시켜 군이 나서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켜 집권하려는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특전사를 파견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한데.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태를 5공 세력에게 불리하게 하기 위해 귀납적으로 꿰어맞춘 결론일 뿐이다. 우린 당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상상도 못했다. 재판 때도 이른바 광주진압의 지휘권 이원화 논리로, 즉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이 있었지만 다 허깨비고 실제는 전두환이 뒤에서 다 하지 않았냐며 내란 혐의를 덮어씌운 것이지, 우린 재판정에서 그것을 시인한 적도 인정한 적도 없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아무리 기세등등하고, 최규하 대통령이 아무리 허수아비라도 정신이 나간 상태가 아니라면 일개 합수본부장의 압력을 받아 그 중대한 일(광주 진압 병력 동원)을 끌려가며 할 수는 없다. 병력 동원은 철저히 계엄사령관에 의해 이뤄졌고, 합수부는 광주 사태와 관련해 상황을 듣고 걱정하는 입장이지 아무런 직접적 개입을 할 수 없었다.

광주 지휘권 발동, 윤흥정이 먼저 요청

정상적 명령계통이 작동하면 그런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12·12를 통해 이미 신군부는 쿠데타에 성공했고, 군권을 장악했다. 이희성 사령관이나 국방장관, 최규하 대통령까지 허수아비로 만들고 전 사령관이 다 한 것 아닌가.

=그러면 우리보고 묻지 말고 최규하 대통령이나 이희성씨에게 가 물어봐라. 당신들 그때 정말 허수아비 노릇 했냐고. 설명이 안 될 것이다. 12·12를 군권 찬탈 쿠데타로 보는데, 그것도 반 5공 편에 있는 사람들이 내린 결론일 뿐이다. 5공 출범 뒤 상황을 리뷰하면 결정적 전환점은 분명 12·12다. 계엄사령관을 잡아넣었으니 앞뒤 관계없이 합수본부장이 가장 강력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계산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12·12를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우발적 사태로 인정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국권 찬탈, 권력 찬탈을 위해 한 것은 아니다.

성공한 쿠데타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쿠데타는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고, 이 폭력은 계획된 병력 동원을 의미한다. 5공 출범이라는 전 과정을 볼 때 그날 이후 전두환이 가장 강력한 사람이 됐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너희들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12·12를 했다. 이건 아니다. 또 특전사령관인 정호용 장군이 광주 현지에 내려가 지휘하고 보안사령관의 말만 들었다고 강경진압 명령을 내렸다고 했는데, 이건 윤흥정 장군이나 정웅 장군이 새빨간 거짓말을 한 것이다. 윤흥정은 죽었으니, 언제 이광로씨를 찾아 면담해봐라. 이광로 장군이 국보위 내무위원장으로 광주 상황이 끝난 뒤 검사들과 현지에서 진상조사를 했는데 윤흥정과 정웅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고 결론냈다. 이광로 장군이 최규하 대통령에게까지 올라간 진상 보고서 복사본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윤흥정 장군은 육사 8기로 아주 친했고, 정 사령관이 친구를 봐주려고 처벌을 반대했다. 윤 장군을 그 보고서 건의대로 처벌했다면 지금 광주를 신군부가 했다는 얘기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보고서에서 언급한 윤 장군과 정 장군의 책임이라는 게 뭐냐.

=윤흥정은 계엄지역 전투지휘 사령관으로 광주의 치안을 유지할 책임이 있고, 정웅은 그 밑에서 지휘받는 31사단장이었다. 처음부터 잘 대처했다면 그렇게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전남도경 국장이 도망가고, 경찰, 보안부대, 중앙정보부 요원도 다 도망가니 농땡이 치다, 나중에 급해져 병력을 동원해달라고 한 게 그들이다. 또 자위권 발동을 누가 제일 먼저 요청했나. 윤흥정이다. 이것을 2군 사령관 진총채 장군이 받아 계엄사령관에 건의하고 장관,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다. 31사단에 배속된 특전사 대대장들 다 모아놓고 “야, 니들 목숨 걸고 시위대 진압해!”라고 명령한 게 바로 정웅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도망가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정웅은 그 공으로 DJ 아래서 국회의원까지 했다. 그때 YS나 DJ 중심의 재야와 야당 세력은 전두환 세력에게 불리한 것이면 진실이든 아니든 들이댔다. 그런 상황에서 재판이 이뤄진 것이다.

12·12 병력동원? 장태완이 미쳐서…


△ (사진/ 박승화 기자)

1979년 12월12일 저녁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신군부 반대파를 연희동 음식점으로 유인했고, 당시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등 장군들이 결집한 것은 병력을 동원할 의도와 계획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놓고 군 내부에서 심각한 퀘스천(의문)이 있었다. 기무사는 군대 감시가 기본 임무다. 중요 일을 하는 사병, 모든 장교는 계속 감시하고, 합법적으로 전화 감청도 하고, 다 기록으로 남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기록도 있다. 그런데 정승화의 배후 인물은 김재규였다. 정승화는 육사 5기인데, 동기생 가운데 가장 처진 사람으로 별 볼일 없었다. 이걸 김재규가 백업해 총장까지 간 것이다. 정승화는 그것을 부인했다. 나쁜 사람이지. 이런 사실을 당시 군 고위직 간부인 장군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 건 하나만 가지고도 계엄사령관이 될 수 없는 인물이다. 박 대통령 살았을 때 충성을 맹세해놓고 어느 날부터 “야, 박 대통령 같은 사람은 다시 나오면 안 돼” 이러니 박 대통령을 존경하는 군인들은 “야 정승화, 이거?” 이리 된 것이다. 여기에 12·12 당일 행적까지 종합되면서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정승화를 잡아서 조사해야겠다고 한 것이다.

30경비단에 장군들이 모인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당시 군에는 정승화쪽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대표적이다.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그렇다. 이 사람들은 다 박정희 대통령의 졸개들이었다. 이런 판국에 전두환 사령관은 정승화를 잡으면 당장 뉴스에 나갈 텐데,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데려다놓고 전후 사정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해서 모은 것이다. 쿠데타를 할 생각이었다면 노태우, 황영시 등은 자기 사령부에 위치했다가 버튼 누르면 즉각 부대를 데리고 나와야 했다. 왜 자기 부대는 놔두고 혼자만 덜렁덜렁 왔겠냐.

어쨌든 결과적으로 12월12일 밤에 명령계통을 어기며 불법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지 않았나.

=그것도 결과로 봐야 한다. 사전 기획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왜? 장태완이가 미쳐서 병력을 동원했으니까. 3군사령관, 주변 군단장, 수경사, 특전사 다 정승화 사람들이고, 그쪽에 출동을 요구하고 있는데, 국가적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떻게 되겠냐. 정당한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를 상대가 제압하려 했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 없이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당시 군에는 여전히 김재규 세력들이 포진해 있었고, 김재규가 민주투사라는 사회적 여론까지 일었다. 역으로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정승화 문제를 처리하지 않아 그쪽에서 자기들 계획에 따라 쿠데타라도 했다면 우린 수사를 잘못한 죄를 덮어쓰고 역사의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래도 저래도 책임을 모면할 수 없었다. 군인은 임무가 주어지면 하는 것이다. 고지를 올라서다 돌아설 수 있나.

정치적 재판이든 어쨌든 95~96년 재판에서 군사반란, 내란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와 국민을 팔아먹는 것이다. 5공에 의해 피해를 입거나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에 의한 정치적 재판이고, 시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열 몇명의 5공 주역을 처벌해 기분이 좋아졌는지는 몰라도 헌법에 금지된 소급 입법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무너뜨린 것은 군인이 총을 가지고 쿠데타 한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또 YS는 우릴 청산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민자당의 주력인 민정당 출신,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한 5공 세력이 필사적으로 DJ를 견제하고 YS를 밀어 대통령이 됐다.

DJ는 무슨 돈으로 도서관을 지었는가

전두환·노태우 두 주역이 대통령 된 뒤 수천억원의 천문학적 비자금을 챙겼다. 그런 부정 사건에서 출발해 12·12와 5·18 단죄로 발전한 것 아닌가.

=나는 비자금 문제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한국적 정치 상황으로 본다. 방송사가 DJ는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는지 기획·보도하면 시청률이 폭발적으로 오를 것이다. 왜 그들은 돈을 축적했을까? 권력을 놓은 상태에서 자신의 보호를 위해 최소한 돈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현실이다. 그 뒤 대통령들은 다 자기 돈으로 대통령 됐나?


△ 1995년 96년에 걸쳐 열린 재판에서 12 ·12 사태 관련자에게 군사반란, 내란으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재판정 앞자리의 노태우, 전두환 대통령과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의 허화평 전 의원.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그건 이 문제와 좀 다른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돈 문제는 다 알고 있다. 이제 페어(공정)하게 다른 얘기도 하자. DJ는 무슨 돈으로 그 거대한 도서관을 지어서 연세대학교에 줬습니까. 그것은 왜 검찰이 조사를 안 하냐. 페어하게 조사해야 한다. 전 전 대통령은 외각에 옹호 세력이 나타날 수 없어서 그런 일이 생겼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옹호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조사) 못한다고 생각한다.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많이 죽었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공방 전에 가해자인 신군부가 먼저 매듭을 풀기 위해 공식 사죄하거나 전두환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망월동 묘역을 참배할 생각은 없나.

=화해와 용서는 미덕이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피해자가 이니셔티브를 갖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사과해도 받아주지 않는다면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질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이 과거 연희동 골목에서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이상의 드라마틱한 사과는 없다. 5공의 대표가 국민을 향해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했다. 망월동을 찾아가는 것은 마이너한 형식의 절차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다. 나는 5공이 최선의 정권이라고 말한 적 없다. 상황의 산물이고, 불안정한 것도 많은 정권이었다. 5공 때문에 피해 본 사람에 대해 늘 부담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의 진심을 이해해줬으면 한다.

국립묘지 참배 때 12·12 동지들 묘만 찾을 게 아니라 반대쪽에 섰던 정병주 장군, 김오랑 중령 등의 묘소도 함께 참배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나.

=그 점은 나도 이해가 된다. 어쨌든 한때 상관이고 전우였고, 서로 자기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다 그런 일이 생겼으니. 내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면 한번 제안해보겠다. 유념하겠다.

‘K- 공작계획’은 이상재의 개인리포트

현재 국방부 과거사위원회가 12·12와 5·18을 조사하겠다고 한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우린 진상조사를 하면 좋다는 쪽이다. 이제 더 흔들릴 게 없다. YS 정권에서 정권을 위해 검찰 등 모든 국가기관이 나서 뒤졌는데, 더 추가될 게 있겠나. 오히려 그 재판이 얼마나 엉터리고 정치적인 것인지 밝혀질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당시 우리가 요청한 증인들과 증거는 채택되지도 않았다. 법원 판결문은 검찰의 공소장과 같았다. 재판 과정에서도 일부 무리한 사실이 드러났다. 광주에서 죽은 사람은 수천명이라고 주장했지만, 다 찾아도 200명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단 한명이 죽은 것도 가슴 아픈 비극이지만 우리에게, 공수부대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웠다. 사망자가 늘어난다 해도 한계가 있다. 일부 주장처럼 수천명이 되지는 않는다. 광주의 발포 명령자, 그것도 조사해서 밝혀주기 바란다.

허 전 의원을 비롯해 이학봉, 허삼수, 권정달 등이 전두환 집권 시나리오인 ‘K-공작계획’을 만들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집행했다는 주장은 어떤가?

=그것은 당시 권정달 정보처장 밑에서 언론처장을 했던 이상재의 개인 리포트다. 권정달이 대령인 정보처장 자신도 우리가 외곽으로 돌렸다고 주장했는데, 그 밑에서 일한 준위인 이상재에게 집권 시나리오를 맡기겠나. 당시 서울 시청을 담당하던 이상재가 정보 수집을 위해 기자들과 술 먹고 하는데 돈이 필요하니, 개인적인 언론 접촉 계획서를 만들어 권정달에게 올린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엄청난 집권계획 문서인 양 확대재생산됐다. 나중에 다 확인될 것이다.


'허화평' 프로필

이름 : 허화평
출생 : 1937년 10월 15일
학력 : 육군사관학교 17기
약력 :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 비서실장
1982년 청와대비서실 정무 제1수석비서관
1988년 현대사회연구소 소장
1992년 제14대 무소속 국회의원
1996년 제15대 무소속 국회의원
2000년 현대사회연구소 소장



[표지이야기] 당신의 일상에 배낭을 던져라! …64
주5일제가 본격화되면서 직장인들에게 배낭여행의 호기가 생겼다. 일주일 휴가에 주말을 붙여 열흘 동안 떠나는 배낭여행. ‘일상’이라는 행성을 탈출해 자신만의 시공간을 설계할 기회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선배들의 조언에 귀기울여보자.

[도전인터뷰] “군 과거사위는 날 조사하라”…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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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얼차려를 받고 엉덩이를 깐 채 원산폭격을 하고 팬티를 내리고 중요 부위를 벌쭘하게 가린다. 장난 삼아, 기념으로, 혹은 군기를 위해서 ‘리얼 판타스틱’하게 행해진다. ‘낯설고도 익숙한’ 군부대 알몸 강요·학대 문제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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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비행기47] 정잡초 없는 뜰을 위하여…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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