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박노자 칼럼 목록 > 내용   2005년11월23일 제586호
민족의 경계를 불사른 연애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개화파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 급진파 신여성 김일엽과 오다 세이조의 사랑
사생아로 태어나야 했던 육종 학자 우장춘은 왜 어머니 임종을 보지 못했나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인간이 자신의 아집과 자신이 속하는 집단의 고정된 관념을 벗어나 ‘민족’의 소속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시련이 요구되는 일이다. 거기에다 만약 세계 체제의 피라미드 속에서 각자가 속하는 집단의 위치가 현저히 다르다면, 개인으로서 뛰어넘기 지극히 어려운 역학 관계의 논리에 부딪치게 된다. 최근 한국계 입양인 출신의 유럽 소장파 한국학자가 “대다수가 백인 중산층 남성인 구미 한국학자들의 75~80%가 한국인 배우자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약자인 한국 여성을 이용하려는, 즉 배우자를 통해 한국 문화 내부로 침투하려는 욕망을 의미한다”고 주장해 동료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한국 여성을 무력한 피해자로 보는 이 주장을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서구인 남성과 비서구인- 특히 동남아·동유럽 등지 출신의- 여성 사이의 결합에 남성이 악용할 수 있는 불평등의 소지가 내재돼 있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공자의 제자 자공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에 대해 “가난하면서도 아부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사람을 인간의 이상형으로 보았다(논어, 1:15). 그런데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 없는 사적 관계의 영역에서 차라리 강자의 ‘교만’이 더 관례에 가깝다는 것은 아쉽게도 현실이다.

영국-인도인의 사랑은 비도덕적 혼교?

출신 국가 빈부의 차이가 남녀의 관계를 이렇게 왜곡할 수 있지만 식민모국 출신과 식민지 출신의 사랑은 그야말로 강풍을 맞으면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일이다. 지배·피지배의 차이가 인종적으로 해석되어 법제화돼 있는 전형적 식민지에서 ‘경계선을 넘는 사랑’은 법적 제지를 당하거나 ‘비도덕적 혼교’(混交·miscegenation)로 개념화됐다. 인도에서는 18세기 중반까지 약 90%의 현지 상주의 영국인 남성이 인도 여성과 결혼했으며 그 자손들도 영국의 동인도회사에서 채용되는 것이 전혀 문제없었다. 그러나 그 뒤 식민화가 본격화된 18세기 말에는 지배자와 피지배민의 ‘인종적’ 경계선을 만들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혼교의 자녀’가 영국에 가서 교육받는 것이 금지됐으며(1786), 그들을 영국 군대에서 내쫓고 말았다(1808). 19세기 초반에는 아예 인도인과의 성관계가 영국인에게 타락으로 인식됐으며 ‘타락의 사생아’들이 ‘제국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 김일엽과 오다 세이조 사이에 태어난 일당 스님은 미술로 한국과 일본의 경계를 뛰어넘었다(맨 왼쪽).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본에서 숨어 지낸 우범선과 그 '부인 아닌 부인' 사카이 나카, 그리고 아들 우장춘의 가족사진. (사진/ 연합)

해방 당시의(1949)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는 약 30만 명의 혼혈아가 있었다. 식민지 시절에 그들은 법적으로 ‘백인’으로 취급됐지만 차별에 하도 시달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를 선구적으로 제창하기도 했다. 가난한 유럽인에게는 인도네시아인과의 결혼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식민지 지배집단의 입장에서는 ‘인종적 타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억압과 낙인 속에서도 소속 집단의 배척을 각오하고 사랑의 꽃을 피웠던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인들을 열등시하는 데서 일제는 영국이나 네덜란드와는 본격적인 차이가 없었다. 있다면 일본에 지리·역사·문화적으로 가까운데다 대륙 침략의 교두보가 돼야 할 조선에 대해 “우리와 조상이 같다”는 ‘내선동조’(內鮮同祖)와 같은 궤변을 구사해 반일 정서의 약화와 상층부의 친일화를 도모한 데에 있었다. 식민모국을 섬길 예속 엘리트야 인도·인도네시아에도 있었지만 서구 열강을 경쟁자로 규정한 일본 지배자들이 조선 친일파에 ‘황색 인종주의’로 호소해 조선 지배를 ‘백인 러시아로부터 보호하는 일’로 합리화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봐서 이색적인 일이다. 인종주의가 식민지 엘리트에 대한 차별의 기제가 아닌 식민지 엘리트의 친일화 기제가 된 이례적인 상황에서 조선인과의 ‘잡혼’(雜婚)은 식민지 권력자에 의해 장려되기까지 했다.

1910년대의 어용지인 <매일신보>는 ‘내지인과 반도인의 잡혼’을 ‘내선 동화(同化)의 사례’라고 하여 결혼 당사자의 입적 안내까지 실어주고(1915년 8월14일), 한국 민족주의를 녹여보려 했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1921년 6월 그러한 결혼을 위한 법률까지 제정했다(총독부령 99호). 그런데 ‘잡혼’의 수가 1912년의 116건부터 1925년의 404건까지 점차 늘어났지만 기만적인 ‘융화 정책’으로 조선인에 대한 법적 차별과 관습화된 멸시는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 민족주의자는 ‘잡혼’을 ‘민족 정체성 파괴의 수단’으로 간주해 강력하게 배척했다.

우장춘에게 여권을 안 내준 이승만

신채호는 소설 <꿈하늘>(1916)에서 “적국 일본의 놈, 년들에게 시집가거나 장가들면, 지옥에서 불칼로 그 반신(半身)을 끊는다”고 했다. 지배자들은 ‘내선 사이의 사랑’을 불순하게 이용하려 하고, 민족주의적 저항세력들은 ‘적국의 놈과 년’의 동거를 배신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 폭력적인 상황에서 과연 현해탄을 넘는 참사랑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놀랍게도 가능했다!

세습적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 박영효, 김옥균과의 교제에서 “일본과의 동맹만이 조선으로서 진보의 길이다”라는 것을 배운 추진력과 담력이 비상한 개화파 군인 우범선(禹範善·1857~1903). 명성황후 시해 때 친일적 성격의 군부대인 훈련대의 대대장이었던 그는 일본 낭인들의 궁정 난입을 적극적으로 방조해 시해의 종범이 됐다. 그는 일본인 주범을 처벌할 수 없었던 대한제국의 정부가 우선적으로 처단해야 할 ‘표적물’이었다. 일본으로 도망친 그가 자객의 칼에 언제 죽을지 모를 ‘국사범’(國事犯)이었음에도 도쿄 한의사의 딸 사카이 나카는 그를 사랑해 같이 살게 됐다. 호적이 없는 망명객 우범선과의 혼인신고를 올릴 수 없었기에 그들의 결혼은 사실혼에 불과했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유명한 육종(育種) 학자 우장춘(禹長春·1896~1959) 박사는 소학교에 입학했을 때 ‘사생아’로 기재되는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정식 결혼이 아니었음에도 우범선이 자객의 칼에 죽은 뒤에 사카이 나카는 다시 결혼하지 않고 바느질과 행상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아이를 혼자 키웠다.


△ 우장춘 박사의 일생을 한-일 양국이 합작해 만든 연극 <씨앗>. 공연이 시작된 3월 '독도 망언' 사건이 터져 세인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사진/ 연합)

1950년 “아버지의 나라에 애국하겠다”고 한국에 영구 귀환한 우장춘은 1953년 일본에서 어머니가 임종을 맞을 때 옆에서 지켜보지 못한다. “그 유명한 학자가 한번 일본에 가게 되면 혹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싶었던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여권을 받지 못한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반공의 명분 못지않게 한국인의 반일 정서를 이용해 정통성을 확인받았던 국가주의적인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위대한 학자를 일본에 뺏기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해도 되는 일이었다.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의 사랑은 침략 개시 이후지만 식민화 이전이다. 식민화 이후에는 한편으로 형식상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결혼이 쉬워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식이 있는 조선인들에게 “지배자와의 결혼은 조국의 배신”이라는 생각도 확고해졌다. 그렇기에 뛰어난 시인이자 ‘연애의 자유’를 주장한 급진파 신여성이었던 김일엽(金一葉·1896~1971)이 도일 유학해 1921년에 일본의 명문가 출신인 오다 세이조(太田淸藏)와 뜨겁게 연애는 했지만 꾸준히 구혼한 그와 결혼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를 망가뜨리면서 헌신적으로 연애에 빠졌지만 결혼은 거절한 배경에는 물론 민족 감정뿐만 아니라 결혼이라는 억압적 제도에 대한 신여성으로서의 혐오증도 작용했을 테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민족’은 무시 못할 굳건한 경계선이었다.

일당 스님에게 민족은 허깨비이자 망상

‘김태신’과 ‘오다 마사오’라는 두 이름을 출가 이전에 가졌던 오다와 김일엽의 아들 일당 스님(1922년생)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인정받는 동양화가가 됐다. 그가 국경을 초월한 활동으로 민족의 경계선을 전복했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희망적인 평가일까? 부처님의 제자가 된 그에게 민족이 허깨비이자 망상이라는 것은 그를 직접 만나본 필자의 소감이었다.

소속 집단 사이의 강약의 차이, 지배와 피지배의 차이가 있는 한 구성원 간의 사랑은 강하게 배척되기도 교묘하게 이용되기도 하는 지난하고 위험한 월경이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난 미래에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종족의 구분 자체가 점차 없어지고 사카이 나카의 사랑이나 오다 세이조의 사랑이 교과서에서 ‘침략과 지배의 폭력성을 뛰어넘은 의거’로 아름답게 묘사되리란 희망은 필자만의 바람인가?

참고문헌

일당스님,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제1~2권, 문학과 의식, 2002.

김도형, ‘우범선’, <친일파 99인> 제1권, 돌베개, 1993.

박성진, <사회진화론과 식민지 사회사상>, 선인, 2003.

정재정, ‘우장춘’,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제3권, 돌베개,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