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02월04일 제49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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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의 반역음모?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잘 보면 상당히 재미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사임당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이 호에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 부인을 본받으려 ‘사임’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특히 사임당이 태임 부인의 태교를 본받으려 했다고 강조하는 후세의 해석은 넘치고도 넘친다. “사임당도 7남매를 두었을 때 몸을 매우 조심했다. 어머니의 몸가짐이 발라야 배 안에 든 아이도 바르게 자란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사미(邪味)한 음식은 먹지 않았으며, 좋지 못한 것은 보지 않았다.”

그러나 태임 부인은 ‘역사상 가장 현숙한 부인의 전형’이라는 측면과 함께, 전혀 다른 해석도 가능한 여성이다. 태임 부인은 바로 은나라를 대신할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을 낳은 사람이다.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을 패퇴하여 은왕조를 멸망시킨 것은 바로 그 손자인 주 무왕이다. 따라서 태임 부인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의 토대를 쌓은 인물을 낳은 셈이다. <사략> 등 역사서도 두루 독파한 신사임당이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사임당이 이런 호를 지은 게 연산군 때(실제로는 연산군 다음인 중종 16년 무렵)였다면 반역음모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중종이 바로 주나라와 비슷한 방식인 반정을 통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기에 그런 호도 용인됐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호는 여전히 매우 도전적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태임‘에 관련된 표현은 조선의 왕가에서 쓰는, 매우 엄중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조선 성종이 모후인 인수대비에게 올린 ‘인수대비 가상존호 옥책문’을 보자. “우러러 생각건대 도리로서는 우빈(虞嬪·하나라 우 임금의 부인 도산씨)을 이으셨고, 덕은 문모(文母·문왕의 어머니 태임 부인)에 협화하시여 선성(先聖·성종의 부왕 덕종)의 배필이 되시니….”

사임당은 성종 때의 이 글을 이미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원래 꿈이 매우 컸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