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오지혜 칼럼 목록 > 칼럼내용   2004년04월28일 제507호
[양희은] “나의 노래는 무서운 숙제”

[오지혜가 만난 딴따라]

팬들에 대한 부채감으로 무대 서는 가수 양희은… “오지혜 같은 후배가 그만두랄 때까지 하겠다”

글 오지혜(영화배우) · 사진 김진수 기자


그녀는 우리 부부 결혼식의 주례 선생님이었다. 결혼 주례는 제일 존경하는 사람한테 부탁하는 거라 하고 신랑은 자신에겐 ‘그런 사람’이 없다 해서 내 십대 때부터의 꿈을 이룬 셈이다. 사적인 친분을 통해 알게 된 자연인 양희은은 내 어린 시절의 데미안이었고 그녀의 노래는 황지우의 시와 함께 내 이십대를 지배했다.

민주노동당의 제의를 거절한 이유

부모 잘 만난 덕에 고생이란 털끝만치도 해보지 않고 자란 나는 세상이 다 우리 집 같은 줄로만 알고 자란, 한심할 정도로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였고, 그런 나를 볼 때마다 그녀는 육두문자를 앞세우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로’ 사는 것인지를 깨우쳐주곤 했다. 그녀는 나에게 이모나 고모 같은 존재이기도 하면서 매서운 선배이기도 했으며 인생의 스승이면서 맞담배도 피우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를 인터뷰하러 가는 길은 행복한 만큼 쑥스러웠다.

얼마 전 그녀는 민주노동당의 TV 광고에 쓰인 <행복의 나라로>를 불러달라는 제의를 거절한 적이 있다. 나름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 텁텁한 한대수씨의 음성보다는 낭랑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정당 홍보용으로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기에 왜 거절했는지를 물었다. 라디오 진행자 입장이 아니라 그저 가수이기만 했다면 주저 않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정당을 돕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목을 내놓고’ 할 정도로 ‘조직’을 믿진 않는다는 것이다.

노래는 어디까지나 ‘서정’이지 ‘참여’일 수 없다고 쐐기를 박는 그녀이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와 그녀의 노래는 김민기와 함께 ‘참여’의 상징이 돼버린 지 오래다. 데뷔 이후 얼마간은 그 ‘오해의 간극’에서 콤플렉스를 키우기도 했다. 자신은 그저 소녀가장의 밥줄로서 당시 최고 비싼 레스토랑 무대에서 부른 노래들을 사람들은 투쟁의 도구로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운동을 하는 동료들의 주장을 가만 듣고 있자니 그들이 보호하려는 대상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콤플렉스에선 벗어난다. 게다가 부모가 주는 등록금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입으로만 해방을 외치다가 술값과 학비는 고사하고 식구들의 생활비까지 책임져야 했던 자신에게 기대기 일쑤였던 얼치기 전사들을 보면서 민중을 위해 노래하지 않고 동생들의 학비를 위해 노래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 가수 양희은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였던 오지혜에게 육두문자를 앞세우며 어떻게 사는 게 '진짜로' 사는 것인지를 깨우쳐주던 인생의 스승이었다.

어쩌면 환상에 가까운 자신의 그런 이미지 때문에 선거 때만 되면 정치인 후원회 러브콜을 징그러울 정도로 많이 받았다. 단 한건도 하지 않은 이유를 그녀는 “난 딴따라야”라고 잘라 말했다. 개인적인 후원은 좀 그렇지만 딴따라이기 때문에 더욱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나설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노래를 ‘참여’가 아닌 ‘서정’으로 굳게 믿는 그녀에게는 좀 바보 같은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딴따라의 본분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자신은 자신만의 선행에 대한 잣대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조직’을 후원해서 시스템이 바뀔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제일 확실한 건 자신이 직접 일대일로 도움을 주는 ‘개인 플레이’이고 세상에서 제일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건 굶는 아이들이므로 여러 가지 행사를 통해 그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를 돕고 있다.

그녀 나이 서른살 때, 열아홉부터 가장 노릇을 해오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휴가를 주고 유럽여행을 했다. 그때, 품팔이로 불렀던 노래가 너무 지겨워서 그 긴 여행 내내 허밍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쉰이 넘은 지금은 노래를 즐기면서 부르고 있는가 물었다. 아직도 자신은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일을 도무지 즐기지 못한단다. 프로가 어떻게 ‘즐길’ 수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고 관객을 위로하겠다는 거창한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언제나 그랬듯이 ‘무서운 숙제’를 하듯 할 뿐이란다. 아니 그럼 그 고통스러운 짓을 왜 계속하느냐 했더니, 노래는 일도 놀이도 아닌 그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과분하게 쏟아부는 팬들의 관심과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부채감이 있을 뿐이라고.

전국민이 다 아는 노래 실력과 연륜에도 그녀는 한달 공연을 위해 8개월을 연습한다. 일년에 두번 있는 공연을 위해 일년 내내 연습하는 셈이다. 신곡이 매번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밴드 멤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도 닦는 무도인 얘기 같다. 무대에 오르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지만 그 두려움이 없어지는 날엔 무대에서 내려올 것이란다. 지난해 어느 날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에 나와서 라이브를 한번 한 적이 있는데 마치 신인처럼 바짝 긴장해서 손에 땀이 다 날 정도로 노랠 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왜 그녀의 노래는 슬픔 투성이인가


그러고 보니 그녀의 노래 역시 즐겁고 경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슬픈 노래뿐이었다. 노래하는 일이 어려운 숙제임을 피할 수 없다면 좀 부담을 덜어줄 곡을 택하는 건 어떻겠는가 물었다. 가수의 노래 스타일은 그 사람의 체취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단다. 인도 여행에서 만난 고행자와 시시포스의 신화가 뒤섞여 떠오른다.

아침방송과 콘서트를 병행하는 일이 힘에 부쳐서 가까운 방송 PD에게 ‘가수 양희은’과 ‘진행자 양희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좋으냐고 물었단다. 그는 그런 잔인한 질문이 어디 있느냐면서 잠시 뒤면 하고 싶어도 못할 나이가 곧 오니 조금만 더 참고 둘 다 하라 했단다.

그 말을 전해듣던 난 소스라치게 놀란다. 하고 싶어도 못할 나이라니. 그러고 보니 그녀는 웬만한 글씨도 돋보기가 없으면 볼 수 없는 ‘할머니과’ 나이가 돼버렸다. 나에겐 언제나 지금의 내 나이인 그녀로 존재하기에 난 그녀의 늙은 나이가 너무나 어색했다. 그녀의 팬이라면 함께 늙어간다고나 하지만 난 그녀의 ‘학생’이기에 그녀의 늙어버림은 나로 하여금 부모의 흰머리를 볼 때처럼 가슴을 철렁 내려앉혔다.

가수를 그만두고 나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은 세계여행이다. 그래서 ‘세계의 재래시장’ 정도의 제목으로 책도 쓰고 싶다. 하지만 그 소원은 아직 멀기만 한 것 같다. 요즘 그녀는 동생 양희경과 ‘드라마 콘서트’라는 독특한 컨셉트로 공연을 준비 중이다. 재주 많고 정 많은 두 자매가 함께 무대에서 팬들을 만날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거워진다.

언제까지 가수를 하고 싶으냐 물으니 “오지혜 같은 후배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라고 대답한다. 그녀를 더 사랑해야겠다. 그때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알려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가 언제일진 몰라도 평생 아름다웠던 그녀이므로 무대에서 내려올 때도 눈부시게 아름다우리라 믿는다.

☞ 이것으로 ‘오지혜가 만난 딴따라’ 연재를 마칩니다. 연기하는 것만큼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나는 봄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