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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조선시대부터 거듭 놓쳐버린 개혁의 기회가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보수성을 낳았다
승리의 짜릿한 감격은 없었다
이 바쁜 생활은 개인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정신없이 숨가쁘게 살아온 역사의 반영일 것이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우리가 숨고를 겨를을 주지 않고, 우리의 주체적 역량보다 한발 앞서 전개되었다. 조선후기 이래의 자생적인 근대화의 싹은 제대로 피지도 못한 채 제국주의의 침략에 짓밟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개항을 당했고, 마침내 일제에 강점당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는 줄기차게 민족해방운동을 벌였지만, 일제는 소련의 공격과 원자폭탄의 충격 속에서 연합국에 서둘러 항복해 버렸다. 일제의 패망이 있기까지 우리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방을 순수한 전취물이라고 말하는 것도 곤란하다. 일제의 패망은 우리에게 너무 빨리 찾아왔고, 어쩌면 우리는 해방마저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분단을 당했다. 우리 손으로 자주적인 근대화에 실패하고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휘둘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지적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 피동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해방과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해 우리는 참으로 끈질기게 주체적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불행히 승리하지 못한 것이다. 단 한번 승리, 어떤 민중가요가 노래하는 그 단 한번 승리의 짜릿한 감격을 아직 맛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숨가쁘게 근대로 끌려들어오는 와중에 우리는 중요한 통과의례를 치르지 못했다. 왕의 목을 치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시민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된 것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력들은 낡은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출발을 꾀하기보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충군(忠君)을 내세우며 근왕주의(勤王主義)적 태도를 보였다. 1894년 농민혁명 당시의 전봉준이 그랬고,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또 그랬다. 의병운동으로부터 불과 10년, 우리 임시정부는 입헌군주제 논의도 별로 거치지 않고 민주공화제로 직행했다.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들이 고스란히 다음 시대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를 척결하는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현실에서 근대/전근대의 이분법적 도식은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전 시대를 정리하지 못한 불행은 비단 시민혁명의 결여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채 건설되었다. 청산 못한 정도가 아니라 친일파를 척결하려던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경찰의 공격을 받아 해산당했고, 친일잔재 청산을 부르짖던 소장파 의원들은 남로당 프락치로 몰려 투옥되었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모두 1949년 6월의 뜨거운 여름에 일어난, 친일파 청산을 외치던 민족세력들이 오히려 친일파에게 청산당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개인주의의 결여, 국가주의의 과잉
7년 만에 다시 찾아 온 기회 6월민주항쟁 역시 군사독재를 청산할 수 없었다. 대통령 직선제의 실시는 오래 참던 볼일을 보는 시원함을 기대하게 했으나 그 결과는 마저 다 배설하지 못한 떨떠름함이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흘러 우리는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지만, 이 감격의 꿈이 깨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권교체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듯했지만, 군사독재의 잔재는 버젓이 살아 있다. 아니, 잔재가 남은 정도가 아니라 5ㆍ16 군사쿠데타의 장본인이며 자신은 유신잔당이 아니라 유신본당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자는 공동여당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국가보안법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백성에서 일제강점기의 황국신민을 거쳐 대한민국 국민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우리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권리를 갖는 시민으로서의 자각을 심화시킬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다. 시민혁명의 결여는 이 땅에 개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없애버렸다.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 집단으로서의 민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민족해방운동에서도 개인주의가 설 자리는 없었다. 국민총화를 외친 독재자에게나 독재타도를 외친 민주화운동세력에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의 동의어일 뿐이었다. 정당한 개인주의의 결여는 우리 사회에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 횡행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시민없는 시민사회
이식된 근대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적어도 형식적으로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성과들은 우리 민중이 정당한 투쟁을 거쳐 쟁취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48년부터 시행된 보통선거제도이다. 서구에서 보통선거권의 역사는 그야말로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여성참정권의 경우 이를 보장하기 위한 운동을 18세기 말에 처음 시작한 프랑스의 메리쿠르는 ‘미친 년’ 소리를 듣다가 정말로 미쳐버렸고, 구즈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단상에도 오를 권리도 있다”고 말하다가 의정단상에 오르기 전에 단두대에 올라야 했다. 여성참정권이 프랑스에서 1946년에야 보장된 것을 본다면 우리의 남녀평등 보통선거가 1948년에 실시된 것이 얼마나 빠른 것인지 알 수 있다. 1952년에 실시되었던 지방자치제도도 이승만 정권이 국회를 약화시키고 지방 토호들에게 족보에 기록할 벼슬자리를 주어 포섭하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보통선거나 지방자치제는 분명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지만, 한국에서 이런 제도는 이식된 민주주의의 시혜로, 국가의 대중조작 기제로 출현하였으며, 대중으로서는 무임승차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돈받고 표를 파는 매표행위가 선거 때마다 문제되는 것도 역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전근대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고 무늬만 민주주의인 선거가 실시되고, 게다가 계급과 이념에 기초한 정당정치는 한국전쟁으로 말살되고보니, 종친회, 화수회(花樹會), 향우회, 동창회 등 혈연, 지연, 학연으로 똘똘 뭉친 조직들이 근대적 이익집단으로 변화하여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우리가 겪은 근대화의 특징은 이식(移植)근대화이면서 동시에 압축근대화라는 점이다. 한 예로 도시화 비율을 보면 1949년 17.3%이던 것이 1960년 28%, 1980년 57.3%, 1995년 78.5%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서구에서 최소 150년에서 200년은 걸렸을 변화를 우리는 불과 30∼40년에 해치운 것이다. 70년대까지 우리의 유행가에 유달리 고향타령이 많았고 지금도 추석과 설이면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지는 것도 다 이 압축근대화의 부산물이다. 선발주자를 따라잡기에 급급한 후후발 산업화(late-late-industrialization)는 민주적 인간관계의 정립이나 전통적 의식의 극복을 통한 근대적 시민의식의 함양없이 생산의 확대와 생산성 향상을 향해 줄달음쳐갔다.
전근대와 근대의 기괴한 공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근대화를 치러내며 우리가 이룬 진보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진보에 스스로 대견해 하기에는 너무 가슴 답답하고 숨이 콱콱 막히는 현실을 근대와 전근대의 기괴한 공존은 보여준다. 게다가 우리는 통일된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근대의 핵심과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 포스트모던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던 한국에는 아직도 동성동본 결혼과 호주제의 폐지를 결사반대하는 갓쓰고 수염기른 유림들의 시위를 볼 수 있다. 언론은 동교동, 상도동, 청구동의 봉건영주들과 그들의 가신(家臣)들이 지배하는 정치권을 통렬히 비판한다. 자기 회사 사주를 ‘밤의 대통령'으로 모시는 언론은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지만 가신으로 불리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그런 비판이 나올 만도 하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은 조선시대의 왕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뿐 아니라 더 권위주의적이었다. 과학기술과 조직에 힘입어 조선시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통제와 동원력을 누린 독재자들은 그 근대적 힘을 전근대적 권위주의와 결합시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전근대의 부정적 요인이 근대의 부정적 요인과 결합하여 민주화를 가로막은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러나…
왕의 목을 치지 못한 채 근대화를 겪은 우리 사회에서 권위주의의 혜택을 누리는 자가 어디 독재자뿐이었겠는가? 형식적 민주주의는 상당히 진전되었지만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수구세력은 오히려 이 발전에 힘입어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있다. 각계의 기득권층도 다들 젊은 시절이 있었고 민주주의에 대한 꿈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독재권력이 우리 사회의 각 부분을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법조계의 원로들은 1971년 사법파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고, 90년대 초반 전교조의 탄압에 앞장섰던 학교장들은 대개 1961년 교원노조가 탄압받을 때 한발 비켜 서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보수언론인들은 1975년과 1980년 언론계 대학살의 생존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그 당시부터 권력의 앞잡이가 된 자들도 있었겠지만, 대개는 쫓겨나는 동료들의 아픔을 같이 느끼며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부끄러움, 도덕적 책무에 번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지위가 높아지고 해당 분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그날의 아픔은 죽은 자들,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는 자들에 대한 공격성향으로 나타났다.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보수성은 개혁의 기회를 거듭 놓친 축적된 패배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 여기까지 왔다. 자유총연맹은 있어도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한발은 군사독재의 시대에 딛고, 다른 한발은 엉거주춤 민주화의 시대에 걸치고 있는 오늘도 우리는 바쁘게 살고 있다. 한 시대를 제대로 장송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새 시대로 들어가다보면, 우리는 항생제의 남용이 병균의 내성만 키워주듯 전시대의 잔재가 새 시대의 옷 속에 반민주성을 감추고 도사리고 앉아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악순환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을 벗어나려면 시대를 거슬러올라가 미해결의 과제를 모조리 해결할 수는 없지만, 독재잔재만큼은 확실히 청산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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