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독자마당 > 노 땡큐! 목록 > 내용   2006년01월12일 제593호
펭귄의 메시지 | 정재승

▣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바이오시스템학과


내 어린 시절 이루지 못한 꿈 중 하나는 냉장고에서 펭귄을 키워보는 것이었다. 애완동물이라곤 그 흔한 강아지 한 마리 키워본 적 없을 정도로 동물을 무서워했지만, 펭귄은 왠지 친근해서 대화가 될 것만 같았다. ‘새’지만 날지 못하고, 피하지방이 하도 두꺼워서 남극에서도 동상에 걸리지 않는다는 비만 동물 펭귄. 이 남극 신사의 매력은 그 외모에서 풍기는 왠지 모를 엉뚱함과 발랄함에 있지 않나 싶다.

리눅스와 ‘펭귄 중독’

컴퓨터 운영체계의 하나인 ‘리눅스’를 개발한 리누스 토발스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선 ‘펭귄 중독’이란 병이 있다고 한다. 펭귄에게 물리면 걸리는 병인데, 물리자마자 그 즉시 펭귄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이 병의 증세다. 자신도 리눅스의 마스코트를 생각할 때 계속 펭귄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아마도 오스트레일리아 동물원에서 우연히 펭귄에게 물린 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는 농담으로 ‘펭귄 중독’은 더욱 유명해졌다.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어렸을 때 서울대공원에서 펭귄에 물린 적이 있는 모양이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그러나 펭귄들의 기나긴 생태 여정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자연 다큐멘터리 <펭귄: 위대한 모험>을 본 사람들이라면, 펭귄에 물리지 않고도 펭귄과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지난해 개봉해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 작품은 펭귄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황제펭귄들의 눈물겨운 생존 투쟁을 보여준다.

남극에 서식하는 황제펭귄들은 짝짓기 시기가 되면 1년 내내 굳은 땅이 존재하고 혹독한 날씨 덕에 천적도 접근할 수 없다는 ‘오모크’란 곳으로 이동해 알을 낳는다(모든 황제펭귄은 고향이 똑같다는 얘기다). 알을 낳느라 지친 어미는 알을 수컷에게 맡긴 뒤, 자신은 태어날 새끼에게 먹일 먹이를 구하러 바다로 떠난다. 그리고 수컷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석 달 동안 굶주리며 알을 품는다. 알이 부화되면 어미는 돌아와 알에서 나온 새끼를 돌보고, 수컷 아비는 먹이를 구하러 다시 바다로 떠난다.

어미와 아비가 번갈아가며 먹이를 구해오는 동안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를 견디며 살아남은 새끼들은 성장해 오모크를 떠나 다시 바다로 긴 여정을 떠난다. 부모 펭귄의 자식 사랑이 눈물겨운 만큼, 자식 펭귄의 홀로서기 또한 냉정하리만치 비장하다. 이들은 오랫동안 대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짝짓기의 계절이 되면, 마법에 걸린 듯 다시 한날 한 장소로 모이고 어미에게서 받은 사랑을 자신의 새끼들에게 되돌려준다.

이 작품이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보다 감동적인 이유는 우선 펭귄 부모의 자식 사랑이 눈물겹도록 절절하다는 데 있다. ‘편하게 태어나서 편하게 삶을 마감하는 생명체’는 정말이지 세상에 단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세상에 어느 생명체의 부모가 펭귄 어미와 다르겠는가에 생각이 미치면, 자연스레 이 추운 겨울 거동이 불편하실 ‘내 부모’를 떠올리게 된다.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또 하나 감동적인 대목은 펭귄들이 극한의 추위에서 새끼를 키워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다른 펭귄들에 대한 협력과 배려를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영화연구소(AFI)는 2005년 ‘올해의 사건’으로 이 영화를 선정하면서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공동체의 일부가 되자는 전 인류적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두 해 전 학교로 부임해 대학원생들과 ‘연구실’이란 걸 꾸리면서,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재난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함께 성의 표시를 하기로 다짐했다. 내 나라 내 민족의 고통만이 아니라, 지구에 함께 사는 시민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하자는 데 학생들도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고통에 빠졌는데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지구인 자격박탈’감이 아닌가 싶다.

펭귄에 관한 단상에서 거창하게 박애주의자 같은 메시지까지 이르게 돼 좀 멋쩍긴 하지만, 영하의 날씨에 펭귄처럼 종종걸음을 걷는 거리의 사람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