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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무관심한 사람들
전철을 타본지 10년 된 교수
얼마 전 친구와 같이 문상을 다녀오면서 있었던 일이다. 내 친구는 서울 소재 한 대학 교수다. 그것도 현실을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인문사회학부 교수다. 그에게 서민의 삶을 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서민의 삶을 알아두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익할 텐데도 말이다. 내가 독일에 있을 때 알았던 한 물리학 교수는 한달에 몇번 정도는 일부러 공중교통수단을 이용해 시내를 돌아다닌다거나, 시장터에 가본다거나, 공장지대 등을 돌아다녀 본다고 했다. 자기 전공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교육자로서 학자로서 세상의 현실을 잘 안다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기에 있다. 무엇보다도 서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심각하다. 그것은 곧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진다. 경제 이론에서는 하위 20%를 서민층으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과 거리가 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20 대 80’의 사회로 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상적 인식에서 서민층의 폭은 꽤 넓다. 이른바 중산층이 무너진 오늘의 현실에서는 과거의 중산층을 포함 그 이하의 인구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 서민일 것이다. 그래서 서민의 삶은 상당수 ‘우리의 삶’이고 서민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다. 물론 서민 문제에 갑작스런 해결은 없다. 더구나 복합적인 현대사회에서 경제정책의 효과는 언제나 만점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할 수 있는 일은 있으며,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은 ‘서민을 잊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잊지 않는 일인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 서민을 잊고 있을 때, 서민 문제는 큰 사회문제로 부각된다. 다시 말해, 서민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즉각적 해결은 못하더라도, 항상 ‘함께’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적 연대성이다. 서민 문제는 우선적으로 경제적인 것이지만, 또한 사람의 감성, 심리, 정(情), 사회·문화적 전통 등 폭넓은 영역에 속한 것이다. 서민이 곧 백성인 현실에서 정부는 너무도 당연히 서민을 의식하고 서민을 우선한 정책을 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민이라는 범주 밖에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이 서민을 생각해야 한다. “전철 탈 일 있나?” 식으로, 전철이나 버스 탈 필요없는 것을 자기 과시나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에 속한다.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 데 누가 뭐래?” 하고 자기정당화에 익숙한 사람들도 이에 속하며, “나만 튀고 뜨면 되지” 하는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들도 이에 속한다.
서민에 대한 망각은 ‘사회의 암’
나는 오늘의 현실에서 무엇보다도 ‘무관심의 공포’를 느낀다. 서민들에게는 사회 속 ‘무관심한 사람들’의 존재가 이 겨울 차가운 밤바람보다도 더 매섭다. 더구나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무관심한 사회는 고통 그 자체다. 서민에 대한 망각은 ‘사회의 암’과 같은 것이다. 더욱이 첨단의 디지털 문명 시대에는 이런 망각의 경향이 강해진다. 이는 각 신문이 다투어 ‘IT섹션’은 두어도, ‘재래시장 섹션’ 같은 것을 둘 생각은 못하는 걸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제 ‘서민은 있다’라는 사회적 인식과 줄기찬 관심이, 곧 진정한 연대성이 필요한 때다. 정치인들은 선거를 의식해서 시장터에 가고 빈민촌에 들른다. 하지만 나는 오늘의 현실에서 비교적 경제적 안정을 갖춘 이 나라의 지성인들에게 호소하고 싶다(친구야, 이건 자네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네. 미안하네, 이해해 주게나). 어느 주말 하루라도, 아니 반나절이라도, 아니 그 반나절의 절반이라도 서민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찾아가 보라고. 전철과 버스를 타보고, 재래시장에 가보고, 아파트촌의 공원이 아니라 달동네의 골목이라도 거닐어 보라고. 그래서 정말 ‘관심 갖는 사람들’이 되자고. 김용석/전 로마그레고리안대 교수·철학 uchronia@nets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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