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 ] 2001년01월17일 제343호 

[과학] 진실을 밝히는 게놈의 능력

생명체의 자서전을 파헤치는 유전자 감식… 연쇄반복 부위 분석해 친자 여부 확인


사진/재임 기간 동안 화려하고도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 하지만 그도 르윈스키 외투에 남겨진 정액의 흔적으로 치명적 위기를 맞았다.(SYGMA)


토머스 제퍼슨(1743∼1825)은 미국의 3대 대통령이다. 그는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것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제퍼슨을 따라다녔던 해묵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와 흑인 노예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의 직접적인 주인공이었던 흑인 노예는 당시 제퍼슨보다 28살 연하였던 샐리 헤밍스라는 여인이었다.

이것이 200여년 전에 일어난 일이어서 심증 이외에는 증명하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남녀 사이의 애정관계가 얽힌 문제여서 미국 내에서도 소문이 꼬리를 이었다. 이에 대해 토머스 제퍼슨 기념재단쪽은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이 소문에 대한 다각적인 진상규명에 들어갔다. 5개월여에 걸친 철저한 증거조사 결과 결국 재단쪽은 미 제퍼슨 전 대통령이 흑인 후손을 두었다는 설이 사실이라고 발표했다. 이 발표가 다소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이 결과발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것은 흑인 노예 헤밍스의 아들인 이스튼과 제퍼슨의 후손인 필드 제퍼슨 사이의 DNA 감식결과였다.

사건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DNA 감식을 사용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제법 많이 있다.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 백악관 인턴 사원과의 섹스 스캔들로 세계 언론의 도마 위에 올려졌던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지퍼게이트도 결국 르윈스키의 옷에 남겨진 정액 흔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단서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한 인기 앵커우먼이 자신의 아들이 전 남편의 친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 감식을 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사람마다 염기반복 개수·횟수 달라


사진/컴퓨터를 이용해 가상적으로 색을 입힌 사람의 염색체. 유전물질을 지니고 있는 DNA 내의 연쇄반복 부위를 분석해 조사 대상이 되는 사람을 정확히 가려낼 수 있다.


유전자 감식은 다른 말로 DNA 감식이란 말로 쓰이기도 한다. 유전정보를 지니고 있는 DNA는 우리의 청사진을 지니고 있는 물질로,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의 약자이다. 우리의 몸은 대략 60조개 정도의 세포로 구성돼 있는데, 이것은 결국 모계에서 온 난자와 부계에서 온 정자가 만나 만들어진 수정란이라고 하는 단 한개의 세포가 분열을 거듭해 이뤄낸 것이다. 각각의 세포에는 핵(nucleus)이라는 부분이 있고, 바로 이곳에 DNA가 들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민족이라 외모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제각기 다른 얼굴 모양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유전물질의 구성이 개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유전물질에는 연쇄반복(STR, Short Tandem Repeat)이라는 부위가 존재하는데 이것이 DNA 감식에 이용되는 부분이다. 이 연쇄반복 부위는 3개에서 7개 정도의 반복적인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유전물질에는 이와 같은 연쇄반복 부위에 염색체의 특정한 부위가 다수 존재하는데, 사람마다 염기반복 개수와 횟수에서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 부위는 손바닥의 지문 구조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개인을 구분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연쇄반복 부위가 성장해가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각각 한개씩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부위를 분석해 보면 누가 자신의 자식인지를 명확히 알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염색체 내의 임의 지점인 A에 부계의 경우 21개와 25개의 연쇄반복 부위가 존재하고, 모계의 경우 각각 15개와 35개의 연쇄반복 부위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자손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21개나 25개 중 하나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15개나 35개 중 한 가지의 연속반복 부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 자손은 부모로부터 어느 염색체를 받았느냐에 따라 A지점의 연쇄반복이 (21과 15), (21과 35), (25와 15), (25와 35) 중 어느 한 가지를 가지게 된다. 이때 한 부위의 연쇄반복만을 분석하는 경우 친자가 아니면서 친자인 것같이 나타날 확률은 5% 정도로 높지만, 보통 DNA 프로필을 분석하는 경우 10에서 20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지점에 존재하는 연쇄반복 지역을 분석하기 때문에 친자가 아니면서 모든 유전자의 구조가 마치 친자인 것처럼 나타날 확률은 1조분의 1까지 낮출 수 있다. 따라서 유전자 감식을 통하면 친자 여부를 거의 완벽하게 입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지난해 가을 안방극장에 폭풍을 몰고왔던 미니시리즈 <가을동화>. 이 드라마는 준서(송승헌)의 동생인 은서(송혜교)가 부모와 혈액형이 다르다는 소재를 가지고 전반부의 얘기를 이끌어 갔다. <가을동화>가 보여주었듯이 혈액형 검사법은 출생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우리나라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인기있게 사용하는 친자 확인법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방법은 누가 자신의 자식인지를 확인하는 친자 확인법이 아니고, 누가 내 자식이 아닌지를 알아내는 비친자 확인법이다.

우리의 혈액형은 대립 유전자가 A, B, 그리고 O의 세 가지가 존재한다. 대립 유전자란 동일한 상염색체에 존재하는 같은 기능을 갖지만 형태가 다른 유전자를 말한다. 우리의 염색체는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혈액형을 만드는 유전자 타입은 AA, AO, BB, BO, OO, 그리고 AB의 6가지가 가능하다. 여기에서 AA와 AO는 A형, BB와 BO는 B형, OO는 O형, 그리고 AB는 AB형의 혈액형으로 나타나므로 혈액검사를 거쳐 나오는 표현형은 A, B, O, 그리고 AB형의 네 가지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작가들이 많이 사용한 것처럼 부모가 A형과 O형인데 자식이 B형의 유전자 타입으로 나타나는 경우나, 반대로 부모가 B형과 O형인데 A형의 자식이 있는 경우 흔히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혈액형 검사에 의한 친자 감정의 불확실성


사진/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던 드라마 <가을동화>. 작가는 혈액검사라는 친자 확인법을 이용해 준서와 은서가 친남매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혈액형이 다르다고 해서 꼭 내 자식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최근에 학계에 보고되는 내용들에 의하면 기존의 ABO식 혈액형 검사가 친자 감정에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드문 경우지만 부모가 각각 AB형과 O형인데도 자식이 O형이 나온다거나, 부모가 B형과 O형인데 A형의 자식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ABO식 혈액형에 대한 돌연변이에 의해 생겨난다.

유전자 감식 기술은 국내외 입양아들이 자신들의 친부모를 찾기 원하는 경우에도 활용된다. 분단의 상징인 남북한 이산가족들을 확인해 주는 데도 유전자 감식 기술이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유전자 감식 기술의 개발은 수십년 전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미제 사건의 단서를 제공하는 데 유용하게 이용되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범행 현장에 남아 있는 범인이 남긴 흔적을 분석해 범인 고유의 DNA 형태를 파악하는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핏자국이나 머리카락 등의 DNA 감식 기술을 이용해 100건이 넘는 미제 사건이 재수사에 들어갔다. DNA 감식은 가짜 한우고기를 잡아내는 데도 이용된다. 한우고기로 둔갑되어 판매되는 젖소고기를 유전자 감식 기술을 이용해 가려내는 것이다.

2000년대를 흔히 유전자 프로필 시대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사람 사이에서 유전자 배열순서가 일치할 확률은 1억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머지않아 유전자 분석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김정호/ 이학박사·미국 MIT 연구원jungho@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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