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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세계] 9·16 선언의 열쇠는 군부? 후지모리의 재선거 발표로 술렁이는 군부… 페루에 민주화의 꽃 필 것인가
“협박용 비디오가 새나갔다”
후지모리 10년 권력 아성을 무너뜨리는 폭발력을 지닌 이 비디오는 몬테시노스 집무실에서 야당의원 루이스 알베르토 코우리와 몬테시노스가 단둘이 만나, “얼마를 줄 건가” “10장이다” “20장은 돼야지”란 흥정이 오간 다음, “15장으로 하자” “앞으로도 계속 지원한다”는 합의를 본 뒤 △코우리 의원이 한 서류에 서명을 하고 △1만5천달러(일설에는 15만달러) 상당의 현금이 든 것으로 알려진 흰 봉투 2개를 받아 양복 안주머니에 챙겨넣고 일어나는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소문으로만 나돌던 후지모리 정권의 ‘야당빼내기’ 공작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들이 만난 시점은 지난 5월5일. 코우리 의원은 몬테시노스에게서 현금을 챙긴 직후 야당인 ‘페루 포시블레’에서 여당인 ‘페루 2000’으로 당적을 옮겼다. 코우리는 처음엔 현금수수 사실 자체를 부인하다가 “내가 관계하고 있는 빈민구호사업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생선을 운반할 냉동차가 필요해서 1만달러를 빌려달라고 요구했다”고 궁색한 변명으로 말을 바꿨다. 페루 최고위 정치공작 책임자의 방에서 벌어진 은밀한 거래가 비디오 카메라에 담겨 밖으로 유출된 과정은 아직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60년대 3선개헌 과정에서 야당의원 포섭공작에 나섰던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야당의원의 약점을 잡느라 ‘몰래카메라’를 활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몬테시노스도 야당 코우리 의원에게 돈을 건네면서 나중에 이를 증거삼아 협박할 자료로 만들어 보관하려다 바깥에 새나갔을 확률이 높다. 지난 8월 리마에서 필자가 만난 한 중견 언론사 간부는 “몬테시노스가 수천개의 비밀 녹취 테이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귀띔한 바 있다. 필자가 그의 말에 설마 그럴까 하는 태도를 보이자, “몬테시노스에겐 비밀이 재산”이라고 못을 박았다. 몬테시노스는 야당은 물론이고 언론사, 심지어 정부기관에까지 정보원들을 상주시키고 도청을 일삼아왔다고 한다. 이번 테이프 파문은 말하자면 자기 도끼에 발등이 찍힌 꼴이다.
정보기관들의 권력게임
몬테시노스 테이프가 TV전파를 타고 방영되자 페루 안팎에서는 거센 항의시위와 비판이 일었다. 페루 대통령궁 앞에서는 데모대들이 모여 “더러운 정치 청산”을 외쳤다. 일부 여성데모대들은 빨래판을 갖다놓고 더러워진 페루 국기를 세탁하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페루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페루 주재 미국대사 존 해밀턴도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시킬 분명하고 단호한 조처”를 요구했다. 파문의 장본인인 블리디미로 몬테시노스의 공식 직함은 대통령보좌역. 우리의 지난 어두웠던 정치사에 비추어보면 몬테시노스는 ‘페루의 김형욱이나 차지철’에 해당하는 존재. 지난 90년 후지모리 대통령 집권 이후 각종 정치공작과 인권탄압, 그리고 부패의 화신으로 페루 국민들 사이에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상자기사 참조). 후지모리 정권을 비판하는 페루지식인들의 견해를 모아보면, 페루의 실세는 후지모리와 몬테시노스 2인이다. “아집과 독선으로 뭉친 양두마차에 실려 페루가 민주화와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면 정확하다”고 리마 가톨릭대학의 한 교수는 후지모리와 몬테시노스를 싸잡아 비판한다. 페루의 정보기관 요원은 줄잡아 1만5천명. 중추기관인 국가정보원(SIN)을 비롯해 SIE, 해군정보기관(DIN), FAIN, 경찰(DIP), 국가보안원(SE) 등 여러 종류의 기관원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후지모리에 충성을 다해왔다. 후지모리 정권의 정보총책 몬테시노스는 이들 정보기관들의 경쟁을 부추기며 나름의 권력게임을 즐겨온 것으로 알려진다. 몬테시노스가 재정적으로 허약한 페루의 군소 언론사들에게 검은 돈을 뿌리면서 야당에 대한 음해공작을 해온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지난 봄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후보 알레한드로 톨레도에 대한 악성루머를 퍼뜨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톨레도에게는 사생아로 난 딸이 있는데, 톨레도는 그 모녀를 돌보지 않고 버렸다”는 따위다. 한 신문이 이런 기사를 내면, 다른 신문이나 TV가 받아쓰고 확대재생산 과정을 밟곤 했다. 이러한 음해공작에 맞서 “진실을 가리자”는 톨레도쪽의 반론은 대부분의 페루언론에서 무시당했다.
“물러나다니, 내가 희생양이냐”
지난 7월 말 대통령 취임식 뒤 후지모리 대통령은 미주기구(OAS)쪽이 제시한 29개항 민주화 요구사항과 관련해 민주화제스처의 일환으로 몬테시노스를 정보관계에서 손을 떼게 하고 SIN을 비롯한 여러 정보기관을 국가정보원(NIC)으로 축소 통폐합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 8월 페루 현지에서 만난 루이스 솔라리 의원(제1야당 페루 포시블레 사무총장)은 “정보정치의 본질은 그대로일 것”이란 냉소를 보였다. 8월 중순 당사 안에 있던 컴퓨터 5대가 감쪽같이 사라진 사건을 두고 솔라리 사무총장은 “몬테시노스 부하들의 짓이 분명하다”고 못박았다. 지난 4월 대통령선거 1차선거와 함께 치러졌던 총선에서 집권당 ‘페루 2000’이 국회정원(120명)의 과반수에 못 미치는 52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치자, 후지모리 정권은 회유 매수 압력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야당의원 빼내기에 주력해왔다. 그래서 지금은 과반수를 넘어선 63명이 여당인 페루 2000 소속이다. ‘페루 포시블레’ 사무총장 솔라리 의원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몬테시노스는 우리 야당의원 빼내가기 공작에 거금을 쓰고 있다”면서 “조금 전에도 한 의원으로부터 몬테시노스가 여러 가지로 은근한 압력을 가하고 있어 괴롭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탄했다. 후지모리의 전격적인 재선 실시 선언으로 페루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찮다는 소식이다. 이른바 쿠데타설이다. 후지모리는 집권 내내 군부와의 원만한 관계 설정에 상당한 힘을 기울여왔으며, 몬테시노스는 후지모리의 군부 다스리기에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후지모리가 몬테시노스에게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제의하자, 그는 “내가 희생양이냐”며 반발했다고 알려진다. 후지모리가 재선거 실시라는 극약처방을 전격적으로 내놓게 된 것은 몬테시노스와 그의 사관학교 동기생 장군들이 실세로 포진하고 있는 군부의 심상찮은 움직임 때문이란 설이 유력하다. 몬테시노스는 후지모리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고, 군부를 상대로 구명운동을 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군부에는 몬테시노스 추종세력들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몬테시노스는 군부는 물론이고 사법부와 검찰까지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어온 인물이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최근 군부와의 불화설에 손을 내저으면서 “나는 군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재선거 실시 발표 뒤 며칠 동안 침묵을 지키던 후지모리가 그동안 군부 달래기에 열중했고 어느 정도 그것이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에는 미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개입이 상당히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페루 리마 시내에 자리한 미국대사관은 겉보기에도 하나의 거대한 요새같이 지어진 건물이다. 그곳에 자동차를 타고 들어가려면, 용인자연농원의 사자울타리같이 생긴 육중한 철대문을 거푸 두번 지나야 한다. 현지 리마 사람들은 미국대사를 “총독” 또는 “고문관”이란 별명으로 불러왔다. 페루 정권과 군부에 미국이 지닌 입김이 어느 정도인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군부가 탱크를 몰고 나올까
후지모리의 재선거 발표 뒤 침묵을 지키던 군부는 지난 21일 후지모리 결정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혔다. 그럼에도 페루의 지식인들은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익명을 요구하는 페루 퍼시픽대학의 한 교수는 “군부가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외면하고 상황을 잘못 판단해 탱크를 몰고 나올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군부가 다시 친위 쿠데타의 들러리가 될 것 같지는 않으며 군부가 정치에 개입한다면 직접 전면에 나서는 최악의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최근 후지모리는 차차기가 될 2006년 대선에 다시 나설 뜻을 비쳤다가 나라 안팎의 빈축을 샀다. 몬테시노스의 비디오 파문으로 불거진 정치적 소용돌이를 페루가 어떻게 헤쳐갈지, 무엇보다 페루에 민주화의 꽃이 과연 피어날지 지켜볼 일이다.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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