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 ] 2000년08월30일 제324호 

[스포츠] ‘메달색’이 무슨 상관이랴

시드니 향해 땀흘리는 취약·비인기 종목 선수들… 스포츠 정신이 ‘금메달 지상주의’ 허문다


(사진/세계 수준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수영. 200m 접영의 한규철만이 A파이널에 들어갈 수 있는 선수로 주목을 받고 있다)


‘동메달이 주는 만족도가 금메달보다 훨씬 높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심리학자이며 선수단 일원인 그래험 윈터스 박사는 최근 금메달리스트나 은메달리스트보다 동메달을 딴 선수가 훨씬 만족해 한다는 이색적인 주장을 폈다. 금메달 선수가 느끼는 짧은 기쁨, 오랜 중압감과 은메달 선수의 아쉬움과는 달리 동메달 선수는 메달을 땄다는 자체에 매우 기뻐한다는 것이다.

기본 종목에 허약한 기형 구조

그렇지만 올림픽을 보는 한국사회의 시각은 어디까지나 ‘금메달 지상주의’다. 김준성 태릉선수촌 트레이닝 지도위원은 “동메달을 딴 것도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금메달 선수는 적어도 동메달 선수보다 더 어려운 것을 해내지 않았느냐”며 1등의 평가와 대우는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국내 뿐 아니라 각국의 역대 올림픽조직위원회도 금메달 1개를 은메달 10개보다 더 앞선 순위로 매기고 있다.

반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태릉선수촌의 김승곤 훈련본부장은 “금메달은 중요하다. 그러나 꼴찌가 있어야 일등이 나오는 것 아니냐. 앞으로는 기량의 차이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올림픽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조직위가 순위를 금메달 중심이 아니라 전체 메달 수의 합계로 정한 것은 이런 인식의 변화가 바깥에서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당시 한국은 금메달 7개 등 전체 27개의 메달을 따 8위를 했다. 그러나 국내 언론은 전통적인 금메달 중심의 순위 계산으로 한국이 10위를 했다고 보도했다.

이제 10여일여 남은 시드니올림픽에 한국은 선수 임원 등 400명 가까운 대규모 인원을 파견한다. 언론을 비롯해 선수촌 관계자, 정부 당국자 등은 이번에도 ‘금메달 몇개로 몇등 가능’의 순위 속셈에 바쁘다.

그러나 한국 스포츠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말 금만이 가치가 있는가를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이른바 3D 종목인 레슬링이나 한국 메달의 텃밭인 양궁·태권도에서 얻은 금메달로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과시하기에는 다소 멋쩍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 스포츠의 허약성은 기본 종목인 수영과 육상의 절대적 열세에서 잘 드러난다. 올림픽 전체 메달 300개 가운데 3분의 1이 수영과 육상에 몰려 있음에도 한국은 두 부문에서는 메달을 기대할 엄두를 못 낸다.

46개의 메달이 걸려 있는 수영부터 보자. 한국은 한명만이라도 경영부문에서 최종 승부를 가리는 A파이널 8강에 들어가는 게 ‘수영인 전체의 염원’일 정도다. 지금까지 경영 최고 성적은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이창하가 여자 배영 200m에서 B파이널 5위를 한 것인데, 이는 세계 13위에 해당한다. 정부광 수영연맹 이사는 “B파이널 5위를 해냈을 때도 수영계가 떠들썩했다”며 “이제는 한국 수영사상 A파이널 8강에 진출하는 게 금메달 이상의 목표”라고 말한다.

한국은 시드니에 17명의 수영선수를 파견하지만, 전원 B급이어서 세계 수준과 차이가 있다. 남자 200m 접영에 나서는 한규철이 그나마 ‘국내 수영인의 한’을 풀어줄 희망이라고 말한다. 한규철은 지난해부터 점점 기록이 나아지고 있는데다 담력이 커 A파이널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나머지 16명은 성적과 상관없이 “자기 기록의 100분의 1이라도 단축하자”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유나미 장윤경이 나서는 싱크로나이즈드와 권경민 태혜진 등이 출전하는 다이빙에서도 국제수준과 격차는 벌어져 있다.

김영호와 김순희, 개천에서 용났네


(사진/열악한 상황에서 펜싱의 김영호가 플러레에서 세계 1위를 노리는 것은 대견하다. 그는 최근 1년 사이에 국제대회에서 세번이나 금빛 칼날을 휘둘렀다)


모든 스포츠의 기본인 육상(트랙 및 필드)의 형편도 열악하다. 11명의 출전선수 가운데 9명이 A급이지만 46개의 메달 가운데 한국이 가져올 메달은 마라톤 외에는 없다. 트랙과 필드에서는 역시 8강이 마지노선인 셈이다.

한국은 반쪽대회인 84년 LA올림픽 남자 멀리뛰기에서 김종일이 최초로 8위를 했고, 88년 서울올림픽 여자 높이뛰기에서 김희선(8위),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이진택(8위)이 결선 진입에 성공했지만 메달의 벽은 넘지 못했다. 다만 여자 투포환의 이명선과 남자 높이뛰기의 이진택이 육상인들의 바람을 실현할 기대주다. 이명선은 4월 상하이대회에서 올 시즌 8위 기록(19m36)을 세웠고, 높이뛰기의 이진택 역시 관록을 무시할 수 없어, 당일 컨디션만 좋다면 8강 진입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마라톤이 세계 정상을 유지하고, 이봉주가 애틀랜타 은메달 이후 연속 메달에 도전하는 것은 놀랍다. 양재성 육상연맹 전무도 “마라톤에서 메달을 따고, 이명선과 이진택이 나란히 결선 8강에 진입하는 것이 당면 목표”라고 말한다.

허약한 국내 스포츠의 기초에서 펜싱의 김영호가 플러레에서 일약 세계 1위를 노리는 것은 대견하다. 김영호는 지난해 이란월드컵과 오스트리아월드컵, 올 2월 2000대우그랑프리국제대회 우승 등 최근 1년 사이에 국제대회에서 세번이나 금빛 칼날을 휘둘렀다. 세계순위 4위다. 지금까지 아시아에서는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중국 여자선수가 은메달을 딴 것이 고작이었고, 한국은 84년 LA올림픽에 처녀출전한 이래 96년 올림픽에서 김영호가 8강에 든 것이 최고성적이었다. 에페에서도 이상기 양뢰성이 3위를 목표로 태릉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여자 역도 75㎏급에 출전하는 김순희의 활약 여부도 관심사다. 김순희의 경기력이 워낙 출중해 시드니에서 처음 정식종목이 된 여자 역도에서 한국에 메달을 안길 가능성이 크다. 김순희는 용상에서 세계 어떤 선수도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 기량을 갖췄고,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이후 취약 종목인 인상에 집중적으로 매달린 결과 세계 정상권을 확신하는 단계다. 중국이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 체급 1위를 차지했지만, 7체급 가운데 4체급밖에 나올 수 없다는 올림픽 규정에 의해 중국이 이 체급에 출전하지 않는다면 김순희의 금메달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사진/아시아에서는 더이상 경쟁자를 찾기 어려운 김태현. “이번이 마지막 무대’라는 절박감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다)


0.2초의 승부를 위해 하루 3만㎏을 들어올리는 남자 역도도 내심 전병관의 ‘금 번쩍’ 영광 재현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더이상 적수가 없는 김태현은 “이번이 마지막 올림픽 무대”라는 절박감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다. 김태현은 260㎏의 쇳덩이가 걸려 20㎏인 봉이 양쪽으로 휘청거리는 용상 바벨을 거뜬히 들어올리고 있다. 비공인 세계 최고다. 최성용 감독은 “최근 연습에서 김순희와 김태현이 평소 기록을 뛰어넘는 기량 향상을 보여 잘만 하면 금메달도 바라볼 수 있다”고 귀띔한다. 남자 105㎏급의 최종근, 69㎏급에 나란히 출전하는 이배영 김학봉도 무심한 쇳덩이를 벗삼아 시드니 메달을 향해 진을 빼고 있다.

음지의 설움 이겨내는 핸드볼과 하키


(사진/96년 애틀랜타 올림픽 5위가 최고 성적인 남자하키도 시드니 메달을 향해 맹렬히 연습하고 있다. 음지의 설움을 털어내기 위한 방법은 메달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정작 국제대회 성적이 초라한 올림픽 축구는 메달권에 진입하겠다는 욕심보다는 9월14일부터 시작되는 B조 예선을 통과해 단 한번도 오르지 못한 8강에 진입하는 게 목표다. 유럽의 강호 스페인, 남미의 개인기를 앞세운 칠레, 아프리카의 복병 모로코와 차례로 격돌하는 한국으로서는 8강 진출마저 낙관할 수 없다. 축구 전문가들조차 한국의 예선 성적은 1승1무1패로 보지만, 한국에 1승을 헌납해줄 팀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축구가 미드필드 싸움인 만큼 한국이 역대 가장 우수한 미드필드 진용을 확보하고 있어 어느 때보다 8강 진출의 확률은 높다. 특히 예선전이 열리는 애들레이드의 시차가 한국과 1시간밖에 나지 않아 컨디션 조절이 쉬운데다 이미 하인드마시 경기장에서는 1월 오스트레일리아 4개국 초청경기를 치러 분위기에 익숙하다는 것에 희망을 건다.

축구와 반대로 올림픽에서는 늘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올림픽만 끝나면 음지에 묻히는 종목이 있다. 바로 핸드볼과 하키다.

구기종목사상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최강’으로 군림한 것은 오로지 핸드볼과 하키였다. 특히 여자 핸드볼은 88년과 92년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96년에는 은메달을 따는 등 세계 최고 수준이다. 남자 핸드볼도 88년 은메달을 따고 92년에는 6위를 차지했다. 여자 실업팀 4개에 남자 실업팀 2개, 전체 등록선수가 1천명 안팎인 한국의 핸드볼이 수만명 가운데 뽑힌 유럽선수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핸드볼 인기가 높은 유럽에서는 한국의 이런 성적을 두고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털어버리기 위한 핸드볼선수들의 훈련은 거의 전투집단의 실전 연습과도 같이 혹독하다. 모두 땀의 결과였던 셈이다. 5월부터 소집된 여자 핸드볼선수들은 태릉선수촌의 ‘지옥훈련’인 슈퍼서킷을 단 한 차례도 빼먹지 않았다. 95가지 운동기구를 60분 동안 1초의 휴식시간 없이 모두 섭렵하는 이 트레이닝에 올해 사상 처음 참여한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쩔쩔맸다. 고병훈 여자 핸드볼 감독은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때마다 여기저기서 팀 창단을 하고 싶다고 알려오지만 대회가 끝나고 나면 나 몰라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만큼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게 핸드볼”이라고 말한다.

여자 하키도 88년 은메달, 92년 4위, 96년 은메달 등 빛나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바깥에서 ‘원더풀 코리아 하키’에 비하면 국내에서 대접은 초라하다. 태릉선수촌의 전용구장이 망가져 성남 하키장에서 연습하고 있는 하키선수들은 먹을 물을 대주는 스폰서가 없어 감독이 일일이 시장을 봐야 할 정도다. 김계수 여자 하키 감독은 직접 구입한 승합차를 몰고 경기장 인근 여관에서 하키장까지 선수를 실어 나르는 ‘운전 기사’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열악한 환경에서도 선수들이 뛰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한다. 96년 5위가 최고 성적인 남자 하키도 시드니에서는 처음으로 메달을 노린다. 팬도 없고 돈도 없고 인기도 없는 음지종목의 설움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메달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동메달에, 8강 진입에 박수를


(유나미-장윤경 짝이 출전하는 싱크로나이즈드 수영에서도 메달은 기대하기 어렵다. 기본종목인 육상과 수영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을 날은 언제인가)


몇몇 특출한 선수를 기반으로 유지돼온 체조도 이주형과 여홍철을 앞세워 메달권에 도전해 값진 결실을 기대한다. 이주형은 지난해 톈진 세계선수권대회 평행봉 1위를 기록했고, 여홍철 역시 96년 애틀랜타 은메달의 한을 풀기 위해 뜀틀의 마지막 착지동작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반복하고 있다. 올림픽 출전권을 따지 못한 여자 체조에서는 최미선이 와일드카드로 나가 국제경험을 쌓게 된다. 이영택 체조 감독은 “선수들의 손목 연골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연습하고 있다”며 메달 욕심을 감추지 않는다. 이 밖에 사이클의 조호성, 출전자격을 따지 못해 와일드카드를 받은 요트와 테니스, 산악자전거에서도 한국선수들은 메달보다 값진 최선의 경기를 피겠다는 각오로 시드니로 향한다.

이들이 모두 시드니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이들이 금을 따지 못해도 우리는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은 열악한 시설, 절대적으로 얕은 선수층의 한계를 합숙과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해 극복했고, 개인의 모든 것을 승리를 위해 희생했다. 자신의 기량을 최선을 다해 발휘했다면 메달의 색깔은 더이상 큰 문제가 안 된다. 시드니올림픽에서는 금이 아니라 동메달을 따고, 메달이 아닌 8강에 들어가도 기뻐하고 축하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금메달 지상주의’가 깨지고, 이기는 스포츠에서 즐기는 스포츠 문화로 바뀐다. 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존중되는 스포츠 시대, 엘리트 중심이 아닌 뿌리가 튼튼한 클럽형의 선진국형 스포츠 문화는 금메달보다 동메달에 더 큰 박수를 쳐줄 때 좀더 가까워질 수 있다. 시드니는 시험대다.

김창금 기자/ 한겨레 체육부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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