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 2000년08월16일 제322호 

[문화] 남자가 남자를 사랑할 때…

20대 여성들의 도락, ‘야오이’의 은밀한 사랑에는 엿보는 쾌감이 있다



‘야오이’가 뜨고 있다. 야오이. 남자들끼리 관계하는 장면을 부각시켜 보여주는 것이 특징인 판타지 연애물. 원래 일본 여성들에게 사랑받던 이 장르는 90년대 중반 국내에 들어왔고, 인터넷시대를 맞아 향유층이 급증해 최근에는 야오이물 시장까지 형성했다. 전형적인 야오이물은 어떤 것일까.

“변태 맞아요. 그냥 즐기게 해 줘요”

잘나가는 사업가이자 멋진 독신남인 윤현빈(32). 어느 날 저녁, 그의 대학 시절 과외교습 제자였던 서민우(19)를 길에서 재회한다. 어느덧 잘생긴 대학 1학년생이 된 민우. 항상 그를 귀엽다고 생각해왔던 현빈은 민우와 술을 나누고, 그날 밤 현빈은 민우의 매력과 술기운에 휩싸여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마는데…. 민우는 “나는 호모가 아닌데”라며 괴로워하지만 어느덧 현빈에게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한다. 현빈의 거듭되는 구애에 민우는 볼을 붉히고, 둘은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사랑을 키우며 도시의 밤을 불태운다.

이렇게 야오이물은 동성애자의 현실적 고통을 다루기보다 환상적인 로맨스를 그린다. 이런 점에서 야오이는 동성애물과 구분된다. 동성애물과 야오이를 동일시하는 것은 동성애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성희롱이라고 생각하는 야오이 팬들도 있다.

만화, 소설, 영화, 만화영화, 라디오CD(일본 라디오 성우들이 녹음한 야오이물) 등 야오이의 형태는 다양하다. 야오이란 말은 일본어에서 연유했다. 야마(극적인 부분)도 없고, 오치(반전)도 없고, 이미(의미)도 없다는 뜻으로, 각 글자 머리를 따서 야오이라고 부른다. 속칭 ‘y물’이라고도 한다. 대개 핸섬하고 돈많고 기골이 장대한 ‘능동적 남자’와, 젊고 아담하고 귀엽고 보살펴줘야 하는 ‘수동적 남자’가 주인공이다.

야오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경악하는 이유는 그 내용 때문이 아니다. 이 내용을 보고 즐기는 계층이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 이성애자 여성들, 이른바 ‘멀쩡한 여자들’이라는 데 있다. 그 중에는 직장여성과 여고생이 대다수고, 30∼40대 가정주부도 있다. 게다가 야오이의 핵심은 성교 장면이다. 모든 이야기구조는 “그와 그가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배치된 것이다. 이 때문에, 야오이물은 “변태다” “포르노 마니아다”라는 비난을 자주 듣는다. 통신상에 있는 야오이 동아리는 1년에 몇번씩 홍역을 치른다. “어떻게 여자가 이런 소설을 본담”류의 글이 게시판에 올라와 반박-재반박을 거치다 한두 사람이 통신을 떠나는 일도 허다하다. 대개 이런 논의는 여자 대 남자로 전선이 갈려 평행선을 달리다가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다.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야오이 팬들은 차라리 이렇게 말한다. “변태 맞아요. 그러니까 그냥 즐기게 놔두세요.”

패러디 야오이, 허준이 유도지를 덥친다?


(사진/야오이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90년대 초 일본만화가 불법복제되면서부터이다.현대 국내에서 창작된 야오이들도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욕을 먹으면서도 야오이를 즐길까? 야오이 독자 오아무개(37)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기존에 나와 있는 포르노는 남성 중심적이잖아요. 서양 것은 안 그런데 한국 것은 여자들이 괴로워하고 수치스러워해요. 볼 게 없어요. 그런데 야오이는 괴로워하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고 남자거든요. 꽃미남 보는 재미도 있고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야오이의 매력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동성애 만화 의 작가 김은희씨는 야오이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선호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주된 향유계층이 10대에서 20대의 여성인데,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은 거죠. 그런데 소년과 자기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야한 장면이 나와도 죄의식이 덜하죠.” ‘내 눈앞에 벌어지는 이 장면은 남의 일’이라는 안전장치가, 베드신을 마음놓고 즐길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야오이는 한 가지 이점(?)을 더 가진다. 남녀관계보다 부담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남녀관계에선 주변 인물들이 끼어들게 되거든요. 부모님 친구 등등….그런데 야오이는 오로지 일대일 관계만 중요해요. 원천적으로 결혼이 불가능하니까, 순간에 충실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고….”(야오이 팬 신아무개씨·30대·여) “이성간에는 잘못하다가 덜커덕 임신해버릴 수도 있고, 불륜이니 뭐니 복잡하죠. 그러나 언뜻 생각하기에 남자+남자라면 일단 ‘증거’는 남지 않잖아요.”(팬 서아무개씨·20대·여) 이렇게 부담없는 파트너가 밥해주고 청소해주고 목욕시켜주고 심지어 자장가 부르며 재워주기까지 한다. 탐미주의, 신데렐라 콤플렉스, 내 얘기가 아니라는 편안한 거리감,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서 야오이의 인기를 부른다.

패러디 야오이의 경우는 또 다르다. 패러디 야오이는 이미 나와 있는 만화의 캐릭터를 변조해서 야오이만화를 만들기도 하고, 시중에 알려진 스타들을 묶어서 소설을 쓰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를 팬픽(fanfic)이라고도 부르는데, 팬픽의 강점은 기존에 존재하는 캐릭터를 움직여 쓰기 때문에, 순수창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패러디 야오이만화는 <슬램덩크> <에반게리온> <바람의 검심> 등 인기가 높았던 원작의 주인공들을 동성애 사이로 바꾸는 방식이 흔히 쓰인다. 가령 <슬램덩크>의 두 주인공 강백호와 서태웅이 사랑에 빠지는 식이다.

“강백호는 서태웅이 하는 일이라면 질투심을 가지고 보잖아요. 서태웅은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강백호한테 툭툭 한마디씩 던지고. 그런 걸 독자들이 보면서 ‘사실은 얘네들 숨겨진 애인인 거 아냐? 그럼 재미있겠다’ 하고 상상해보고, 그러다가 그렇게 만들어보는 거죠.” 야오이 팬 이아무개(23)씨의 말이다. 최근 나온 가장 엽기적인 창작 야오이는 <순풍산부인과>의 장인 오지명과 사위 박영규가 사실은 애인 사이였다는 이야기다. 허준이 유도지를 사모하여 덮치는 <허준> 패러디도 있다. “이는 원전에 대한 오마주이자, 장난이다”라고 야오이 팬 서씨는 밝힌다. 원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형놀이 하듯이 장난쳐본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패러디 야오이를 이성애자 남자들도 곧잘 보는 것이 특징이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사라진다











(사진/<드림스><파이널판타지8>패러디,<바람의 검심>패러디,<에반게리온>패러디,<브론즈> 위쪽부터.)

이런 야오이는 인터넷 사이트와 통신 팬클럽을 기반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 야오이 만화가 중에는 프로작가들도 있고, 직업만화가 중에서 야오이 소설의 삽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야오이 생산의 주체는 소비자다. 야오이문화는 소비자가 쉽게 생산자로 변하는 특징을 가진다. 이름 그대로 개연성이 있을 필요도, 반전을 만들 필요도 없고, 캐릭터를 빌려와도 된다. 따라서 글재주가 없어도 바로 쓸 수 있다. 인기소설을 통신에 올리면 히트 수는 5천∼6천번을 기록한다. 야오이 소설가 서아무개(31·여)씨는 야오이 소설을 2권 출판한 배경을 이렇게 말한다. “96년에 야오이 판매전에서 야오이소설을 봤는데,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통신상에 올리다보니 책낼 분량이 됐죠.”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창작되는 야오이소설은 한권에 8천∼1만원 나가는 고가인데도 인기작가의 경우 판매전 한번에 400권에서 500권 정도 팔 수 있다. 국내에서는 야설록프로와 동산출판이 공식적으로 야오이소설을 출간하고 있다.

만화의 경우는 이보다 제작에 공이 드는 편이다. 오프라인으로는 아카(ACA: 아마추어 만화연합)나 야오이소설 동호회 게토에서 판매전과 소모임을 통해서 회원들끼리 책을 바꿔보거나 사본다. 판매행사를 한번 열면 성인만 입장 가능한데도 2천∼3천명씩 몰린다고 한다. 동인지는 한번에 400부 정도 찍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구하기 어렵다. 이 점을 노려 미리 사두었다가 프리미엄을 붙여 통신상에서 팔기도 한다. 야오이 시장의 규모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웬만한 야오이 인터넷사이트의 방문 수는 20만번을 가뿐히 넘어서고, 하루에도 몇개씩 인터넷 야오이클럽이 신설되는 것을 볼 때 그 규모가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평등한 주종관계의 문제점도

문제는 이 만만치 않은 규모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판매전이나 통신동호회에서 아무리 엄격하게 미성년자를 규제해도, 야오이 사이트들에는 미성년자들을 위한 국경이 없다. 설혹 있다고 해도 해외사이트에서 바로 퍼올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이에 대해 야오이 팬들은 “중고생들이 야오이 보는 것은 걱정된다. 그러나 야오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야오이는 원래 성인여성이라는 한정된 계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항변한다.

미성년자 문제 외에도 야오이문화는 여러 가지 문제제기를 받아왔다. 동성애 문화운동가 서동진씨는 야오이에 대해 “관계 미성숙자들이 즐기는 장르”라고 규정한다. 동성애를 그린 만화 의 작가 김은희씨는 이렇게 말한다. “야오이를 보면 능동적인 쪽이 관계를 주도하고, 수동적인 쪽이 복종한다. 여기서 복종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데, 복종해버리면 책임이 없기 때문에 편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이 건강해보이지는 않는다.” 일부 팬들은 “같은 남자입장에서 평등하게 연애하고 싶은 욕구에서 야오이를 본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또다른 불평등한 관계를 공상해보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 야오이는 가부장적인 남녀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능동적인 남자’는 여성들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남성이고, ‘수동적인 남자’는 여성독자 자신의 분신이다. 능동적인 남자에게 수동적인 남자가 복종하는 구조를 여성들이 거부감 없이 보는 것은, 평등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이중적 심리의 발로다.



이에 대해 야오이 팬들은 “일반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여성들이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판타지라도 없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맞대응한다. 그들은 또 페미니즘과 연계해서 야오이를 보는 것도 거부한다. 야오이는 그냥 야오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포르노를 볼 때 사회정의를 고려하면서 보는가? 누구나 은밀한 도락 정도는 있는 것 아닌가. 음지에서 조용히 즐기고 싶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은밀한 도락’을 추구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터넷 책갈피에서 미소년들은 더 고생을 해야 할 것 같다.

야오이의 진화, 만화에서 소설로

야오이는 애초 만화에서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 등단하지 않은 일본의 여성만화가들이 동성애물을 그려 동인지에 싣기 시작했다. 아마추어들이니만큼 줄거리, 캐릭터 설정이 미숙했다. 반면, 남자들끼리의 성행위를 세세히 묘사한 것이 특징이었다. 야오이란 이름은 이를 극적이지 않고 반전없고 의미없다며 비꼬아 붙인 것이다. 나중에 일본 굴지의 만화작품상인 쇼가쿠간 만화상을 수상한 다케미야 게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처럼 수준있는 야오이물이 생기게 된 뒤에도, 이 명칭은 바뀌지 않는다. 야오이의 수요가 많아지자 하드코어 포르노에 가까운 야오이도 출현해, 야바이(심하다), 오조마시이(생각하기도 싫다), 이야라시이(추잡하다)라는 말의 줄임말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렇게 만화로 시작한 야오이는 소설로 진화한다. 야오이소설은 원래 일본 야오이만화 스토리작가들이 예쁜 그림을 부속삽화로 넣어 한권 두권 출판한 데서 연유했다. 이것이 만화 못지않은 인기를 얻자 슈에이사, 하쿠센사 등 유수 출판사에서도 코발트 문고, 하나마루 코믹스 등 야오이 시리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야오이 전문 출판사는 비블루스, 오쿠라가 등이 있는데 이들 전문 출판사들이 관리하는 야오이 소설가 중에는 작품성 있는 작가들도 많은 편이다.

야오이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리면서 막강한 전파력을 갖게 되었다. 일정한 만화 창작테크닉을 익혀야 만들 수 있는 만화와 달리, 야오이소설은 글을 쓸 수 있으면 누구든 창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란 매체를 만나면서 야오이소설은 파급력면에서 날개를 달게 된다. 내려받을 때 시간이 걸리고 출력해보기도 번거로운 만화에 비해, 텍스트파일로 이루어진 소설은 읽고 옮기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야오이가 국내에 들어온 경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만화인데, 90년대 초 일본만화가 불법복제되면서, 야오이물도 섞여 들어왔다. 또 하나는 소설이다. 이것은 96년 하이텔 통신의 ‘순정만화사랑’(순만사)에서 비롯했다. 일본책들을 먼저 접할 수 있고 그것을 번역하는 일이 가능한 고학력 20대들이 게시판에 한두개씩 올려본 것이다. 이것이 폭발적인 조회 수를 가져오면서 야오이 소설 애호가들만 분리해나왔다. 9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국내창작 야오이소설의 자비출판이 가능해졌고, 야오이만화도 국내 애호가들에 의해 그려지게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도 야오이 팬들이 있다. 이들은 인터넷상에서 동호회를 꾸리며, 일본에서 열리는 ‘코미케’(코믹 마켓의 준말. 아마추어 만화가들이 동인지를 파는 시장)에 와서 야오이물을 사가기도 한다.

이민아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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