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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을 끌어내라! 수지김 셋째동생 김옥림씨, 15년 통한의 세월에도 채 삭이지 못한 격정과 분노
수지김 가족이 겪은 통한의 15년 세월이다. 이윽고 살인자와 야합한 국가기관의 책임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책임자는 “통감한다”는 말 한 마디로 자신의 죄과를 덮고 공소시효 만료라는 법망 뒤에 숨었다. 사건의 은폐·조작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은 채 곧이어 로비정국의 악취가 이를 덮었다.
꿈에 나타나 “대청소를 해야 하거든…”
수지김(본명 김옥분·당시 34살) 살해 피의자인 윤태식의 정·관계 로비실체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던 1월10일 저녁 충북 충주시의 한 상가3층 살림집에서 수지김의 셋째동생 김옥림(41)씨를 만났다. 김씨는 바로 전날 서울의 인권단체를 방문해 장세동씨 처벌을 위한 서명운동 등을 논의하고 돌아온 터다. 수지김 사건이 터진 뒤 이혼했던 김씨는 재혼해서 얻은 딸 둘과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13)을 기르고 있다. 이혼할 때 젖먹이였던 아들은 두해 전 우연히 시골의 한 절에서 찾았다. 전 남편이 헤어지자마자 절에다 버린 것이다. 김씨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끔찍한 과거는 무조건 잊고자 애쓰며 살아왔다고 한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죠. 서로 전화통화도 하지 못하고 지냈어요. 2000년 2월에 <그것이 알고 싶다>도 우연히 볼 정도였으니까. 언론사를 접촉했던 사람은 오빠예요. 오빠는 우리가 또 상처입을까봐 연락을 안 했던 겁니다.” 김씨는 텔레비전에 윤태식씨의 얼굴이 나올 때 자기도 모르게 리모컨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20인치 TV 아랫부분이 조금 망가져 있었다. 지난해 11월13일 윤태식씨가 살인혐의로 구속기소된 지 일주일 뒤 김옥림씨는 홍콩의 언니 묘소를 찾았다. 92년에 만들어진 묘지에는 이름도 없었다. 그가 흙을 수습해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충주에 사는 오빠의 딸(28) 꿈에 수지김이 나왔다고 한다. “큰조카라 언니를 자세히 기억해요. 꿈속에서 ‘고모 어떻게 된 일이야?’라고 물었더니 언니가 ‘나 이제 너희 옆집으로 이사 왔잖아’ 그러더래요. 뭐하냐고 물었더니 ‘응, 고모가 대청소를 좀 해야 하거든’이라고 말했답니다. 참 희한한 꿈이죠. 나라가 온통 들썩이는 걸 보니 정말 언니가 대청소를 하나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큰언니는 변사체로, 노모는 화병으로…
사건 직후부터 정신병을 앓던 큰언니는 87년 11월 거리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안기부 수사 뒤부터 시름시름 앓던 노모는 끝내 화병으로 10여년 뒤 숨을 거두었다. 오빠는 윤태식씨를 고소한 지 석달 뒤인 2000년 6월 집 앞에서 트럭에 치어 숨졌다. 둘째딸이었던 수지김의 여동생 네명 중 셋은 사건의 후유증으로 이혼해야 했다. 되돌아보기조차 힘든 가족사다. 87년 1월9일 윤태식씨가 귀국해서 납북미수 기자회견을 한 뒤부터 충주의 집 근처에는 헌병대가 쫙 깔렸다. 당일날 어머니와 오빠는 안기부로 끌려갔고, 이틀 뒤에는 수지김의 둘째동생인 김옥경(45)씨가 남편과 세살된 아들과 함께 ‘안가’였던 서울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로 한밤중에 끌려갔다.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자 요원들은 구타와 욕설을 퍼부었다. 노모는 수지김이 홍콩에서 사다줬던 코트를 ‘간첩의 증거품’이라고 빼앗긴 채 홑옷으로 거리로 나와야 했다.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만 다그칠 게 아니라 홍콩에 있는 아파트라도 수색해봐라. 그러면 무슨 증거가 나올 게 아닌가”라고 강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신문방송에서 떠드는 대로 그대로 믿잖아요. ‘그 집 언니가 대체 왜 간첩질을 했대’라고 물어오는 거예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드라마에도 나왔다’면서 우리를 설득하려 하는 거예요. 86년 가을부터 <남십자성>이라는 주말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윤태식이 기자회견한 뒤부터는 아예 수지김이라는 여간첩이 등장했어요. 안기부가 발표한 딱 그대로 줄거리가 바뀐 겁니다.” 김씨는 잠시 숨을 골랐다. “어떻게 정권과 언론이 그렇게 한 박자로 억울한 여성의 누명을 벗길 생각은 안 하고 확인사살까지 합니까. 방송사에서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모른다’고 하대요. 불과 15년 전인데 옛날 자료들은 그렇게 잘 찾아내면서. 드라마에서 조총련계 대부 역할을 탤런트 이낙훈씨가 했어요. PD랑 작가를 모르면 연기자에게라도 묻고 싶어요. 대체 누가 줄거리를 바꾸라고 시켰느냐.”
홍콩신문들은 “간첩 아니다” 정정보도
주검이 발견된 뒤 기관에서 나온 한 남자는 오빠를 만나러 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는 말만 했다고 한다. “오빠가 화가 나 소주잔에 남아 있던 술을 뿌리자 그대로 뒤집어쓴 채 검은색 세단을 타고 돌아갔어요. 그리고는 끝이에요.” 틈만 나면 전화하고 집을 기웃대던 ‘요원’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뒤로 정부나 안기부 어느 쪽에서도 아무런 해명을 듣지 못했다. “홍콩의 전 남편 사이에서 난 언니 딸 쏘냐는 언니가 윤태식하고 결혼한 뒤 한국에서 가족들이 길러줬어요. 그 홍콩사람이 딸을 데리러 오려 했는데 한국 정부가 계속 비자를 내주지 않았대요. 나중에 그 홍콩사람이 딸을 데리러 올 때 신문기사를 하나 오려 왔어요. ‘홍콩신문들은 수지김이 간첩이 아니다’라고 정정보도를 다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방송이고 신문이고 정정보도 한줄 나온 게 없어요. 그냥 주검이 발견됐다는 걸로 그쳤죠. 방송사에 하소연하면 ‘기다려보라’는 말만 돌아왔습니다.” 기다리길 15년이었다. 가족들이 윤태식씨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안기부 개입에 대해 확신한 것은 홍콩의 수지김 전 남편으로부터 자세한 현지 분위기를 전해 듣고서다. 윤태식씨를 소환하고자 했으나 한국 정부가 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둘째 여동생인 김옥경씨가 세 차례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외무부 외사과를 찾아갔지만 “우리도 모른다”는 이야기만 듣고 번번이 쫓겨났다. 김옥림씨는 “안기부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전화하면 되는지 알 수도 없었다”면서 “가진 게 없고 배운 게 없어 끝까지 농락당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수지김은 가족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친 뒤 “밥 한 그릇이라도 줄이고 동생들 학비라도 장만해보겠다”며 서울로 올라온 그는 미8군에서도 일했고 일본인 관광객도 상대했다. 닥치는 대로 힘들게 번 돈을 꼬박꼬박 집에 부쳤고 그 덕분에 동생들은 밥 굶지 않고 중등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홍콩에 간 뒤에도 일년에 한번씩 나와 가족들의 생활비를 내놓던 수지김은 그러나 86년 가을 윤태식씨와 혼인신고차 함께 나왔을 때는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도리어 셋째동생인 김옥림씨에게 “한 300만원이라도 급한 대로 빌려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장세동을 국가보안법으로!
“홍콩 남편하고 헤어지면서 위자료를 넉넉히 받았거든요. 아마도 윤태식이는 돈 보고 언니에게 접근했던 모양이에요. 그해 가을에 한국에 왔을 때에도 이런저런 거짓말한 게 가족들에게 들켰거든요. 끼고 있는 반지가 육사 반지가 아닌데도 육사 반지라 그러고. 그동안 세 차례 재판이 있었는데 사기꾼도 그런 사기꾼이 없습니다. 어떻게 청와대며 장관이며 국회의원이며 줄줄이 친분을 맺을 수 있었을까요. 국정원의 비호가 없다면 그게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김옥림씨는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고 정치인도 있는 게 아니냐”며 울먹였다. “어떻게 그런 살인자를 국가기관이 비호하고 키워줍니까. 출국금지도 시키고 최근까지 관리했다면서요. 한두 사람이 한 일이 아닐 텐데 그 사람들은 대체 안 잡는 겁니까, 못 잡는 겁니까.” 수년간 윤씨를 밀착 감시해온 전 국정원 대공수사국 수사관 김아무개씨는 패스21 자회사의 이사로 근무했다. 국정원과 윤씨의 가교역할을 했던 그는 현재 잠적한 상태이다. 2000년 1월 에스비에스 <그것이 알고 싶다>팀의 홍콩취재를 현지에서 보고받았던 경찰은 2월에 내사에 들어갔으나 국정원의 만류로 내사를 중단했다. “경찰 내사 덮었다고 경찰청장, 국정원 국장 하나 잡아넣으면 뭐 합니까. 그때 그 자리에서 사건을 조작·은폐한 사람들을 잡아야죠. 간첩은 국가보안법으로 때려잡으면서 억울한 사람을 간첩으로 둔갑시킨 그 책임자는 왜 국가보안법을 걸지 않습니까? 장세동은 역적이에요. 권력만 잡으면 모든 죄가 면죄된다는 꼴을 우리가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합니까. 전 크게 배운 것은 없지만 선량하게 열심히 살았던 평범한 사람을 희생양 삼아 유지해야만 했던 권력이라면 그 최고책임자도 공모자라고 생각해요. 마음 같아서는 전두환까지 잡아넣고 싶어요.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서 한번 뿔뿔이 흩어져 살아보라고 하고 싶어요.” 김씨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김씨는 한참 동안 숨을 고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목욕탕에 갔더니 아줌마들이 마실 것을 건네면서 위로를 하더군요. 간첩 집안으로 몰린 우리를 경원시했던 이웃들은 ‘그때 미안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고 위로하는데…. 지난번 천도제 때 책임있는 사람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더군요. 진심으로 미안하다면 언니 영혼에게 사죄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씨는 보험설계사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재혼한 남편은 한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제 손으로 번 게 아니면 쳐다도 보지 않는 성품”이라 다리를 끌며 농사도 짓고 산에서 나무도 팬다. 다른 자매들도 가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 도중 김씨는 지갑에서 흰봉투를 하나 꺼냈다. 부천에서 자동차 부품대리점을 하는 한 부부가 김씨에게 “도울 수 있는 게 없으니, 보험이라도 들고 싶다”며 연락해와 내민 봉투라고 한다. 계약금이 들어 있으려니 했는데 30만원이 더 들어 있었다. 뒤늦게 이를 알고 전화하자, 그 부부는 “천도제 때 필요한 물품을 사는 데 보태달라”고 했다 한다. 김옥림씨는 지갑에 항상 그 봉투를 넣고 다닌다.
‘공소시효’를 치워라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었는데, 눈물 날 정도로 고마웠어요. 힘없는 서민들은 이런데도 힘있는 사람들은 어떤지 아세요? ‘책임자를 처벌해 달라’면서 정당 문을 두드리고 국회의원을 만나봤지만 다들 우리를 거지취급해요. 돈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사람의 진심까지 왜곡하는 거라면, 어디 저도 수단방법 안 가리고 장세동이든 국가에서든 돈 좀 빼앗아야겠어요. 그런 다음 높은 분들 면전에다 내던지고 싶어요.” 그는 앞으로 법개정 청원도 내겠다고 말한다. 현재 국가와 장세동씨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필요한 서류는 이미 마무리된 상태이다. 수지김 사건의 전모를 공개한 검찰은 당시 안기부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공소시효가 지나 형사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국가기관이 국가기관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자행한 인권유린에 대해서도 일반 직무와 마찬가지의 범죄시효를 적용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런 논란 속에 특별법 제정 움직임도 있다. 함승희 의원(민주당·서울 노원갑)은 “수지김 간첩조작 사건과 최종길 교수 자살조작 사건 등 반인륜·반사회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도록 하는 특별법안을 1월 셋쨋주 안으로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행 민사소송법은 소멸시효 기산점을 범죄가 종료된 시점부터 하고 있는 데 비해 형사소송법은 범죄가 발생한 시점부터 공소시효를 진행시키고 있어 매번 논란이 돼 왔다. 함 의원이 준비하는 법안은 공권력에 의한 은폐·조작사건일 경우 범죄사실을 알게 된 날을 공소시효 기산점으로 하는 내용이 핵심적으로 담겨 있다.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느라 살림을 전폐했다고 하지만 김옥림씨의 집은 깨끗했다. 커피를 끓이고 자료를 내오는 손이 바지런했다. 그는 “아들은 물론 딸들도 엄하고 강하게 키우고 있다”고 말한다. 가족들이 너무나 무력했던 탓에 언니가 간첩으로 내몰렸던 것이라면서. 언론 접촉을 꺼린다는 이야기와 달리 김옥림씨는 “먼 데서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충주=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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