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9월06일 제626호
주민증 내미는 게 지옥이다

마이너리티 중의 마이너리티, 두명의 트렌스젠더 남성에게 들어본 인생사… 내가 나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대법원 판결 땐 손 떨려 운전 못해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들은 마이너리티의 마이너리티의 마이너리티다. 성소수자를 굳이 인구에 따라 줄을 세우자면, 동성애자가 트랜스젠더보다 많다(동성애자 중에서는 남성 동성애자가 여성 동성애자보다 많다). 트랜스젠더 중에서도 트랜스젠더 여성(남성 → 여성)이 트랜스젠더 남성(여성 → 남성)보다 많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미국정신과학회는 1994년 남성에서 여성으로 트랜스젠더(Male To Female Transgender)는 3만 명 중 1명, 여성에서 남성으로 트랜스젠더(Female To Male Transgender)는 10만 명 중 1명이라고 보고했다(통계에 따라 인구 비율의 차이는 있다). 경기도의 한 도시에서 마이너리티 중의 마이너리티인 트랜스젠더 남성 둘을 만났다.

언제나 자기 이름으론 사업할 수 없어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는 김대호(46·가명)씨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들어간 맥줏집에 앉자마자 면허증부터 ‘깠다’. 그가 꺼내놓은 운전면허증은 얼핏 보면 평범한 남성의 면허증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운전면허증에 찍힌 주민등록 뒷자리 첫 번째 번호 ‘2’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한 맺힌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얼마 전 경기도의 도시로 이사하기 전, 그는 충청도의 큰 도시에서 애견사업을 했다. 그는 애견센터의 사업증을 부인의 이름으로 얻었다(물론 동성혼이 허용되지 않아서 그의 혼인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는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평생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을 해본 적이 없다. 그의 애견사업은 번성했지만, 애견센터가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뀌면서 위기를 맞았다. 허가제로 바뀌면서 강아지 판매자의 책임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강아지에 대한 모든 관리는 그가 하면서, 책임은 부인이 져야 하는 상황을 갈수록 수습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내 얼굴이 간판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벽에 걸린 사업자 등록증에는 그의 부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번호’ 하나 때문에 기회를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가 운영하던 애견농장이 좋다고 소문이 나자 사업가가 찾아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농장을 보고 사업가는 2억원을 투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사업가는 외모가 바뀐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 그가 알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이름을 여성적인 이름에서 남성적인 이름으로 바꾸고 비로소 취직할 엄두를 냈다. 그는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지 않느냐”며 “개명을 하고 나서는 취업할 때 내가 먼저 주민등록증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크나큰 변화였다. 그는 45년 동안 자신의 주민증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40대 중반 전까지 정말로 어쩌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보아도 돌아갈 정도였다. 그는 “언젠가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저랑 비슷한 사람을 봤어요. 가슴이 드러나는 셔츠를 입고 장딴지에 털이 수북이 났지만 단박에 트랜스젠더라는 걸 알아봤죠.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다 일부러 피했죠”라고 돌이켰다. 혹시 자신에 대해 알려질까 염려했던 것이다.

김씨는 강원도에서 오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동네의 구슬치기, 딱지 따먹기 왕이었다. 그는 “내가 딴 딱지로 어머니가 사흘을 불을 땠다”고 말했다. 물론 그에게도 학교에 들어가면서 시련이 닥쳤다. 그는 14살에 같은 반의 짝꿍을 좋아하면서 “나는 여자가 아니야”라고 확신했다. 15살에 생리가 비쳤다. 그는 “도저히 수치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입학한 여고는 하필이면 복장단속이 엄격한 학교였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안 입었어요, 치마”라고 돌이켰다. 18살에 그는 더 이상 학교를 참기가 힘들었다. 그는 “여자의 ‘여’ 자만 들어도 화딱지가 나고, 죽어버리고 싶었다”고 돌이켰다. 그리고 18살에 “나는 남자야”라고 확신했다. 남자로 살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을 결심했다.

두 번의 자살시도, 주검조차 보이기 싫어

20대 초반에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왔다. 한동안 다방에서 일했다. 오토바이로 배달 나가는 아가씨들을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하얀 얼굴에 바람 머리를 한 그는 “용필이 오빠”로 불렸다. 20대 중반에는 3살 연상의 여인과 다방을 차렸다. 그는 “제가 다른 복은 없는데 여복 하나는 있다”며 웃었다. 다방을 함께 하던 여인과 연인 사이로 5년을 살았다. 지금은 10년을 함께 살아온 부인이 있다. 그는 “20대부터 언제나 곁에 사람이 있었다”며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함께 살던 사람과 헤어지면서 언제나 빈손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미안하고 고마웠기 때문이다.


△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으로 살고 싶은 사람의 시련을 담고 있다.

그도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 20대 후반에는 약을 먹었고, 30대에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는 “본성이 드러나는 시체조차도 남에게 보이는 치욕이 싫어서 시체도 찾지 못할 먼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말했다.

40대 중반에 인터넷을 시작했다. 2002년 전까지 단 한 명의 트랜스젠더 남성인 친구가 없었지만, 인터넷을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모임에 나가면서 후배들을 만났다. 그리고 2003년에는 병원을 찾았고 호르몬 투여도 시작했다. 가족에게도 커밍아웃을 했다. 10년 전, 현재의 부인을 만나면서 형제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아느냐”고 물었고, “내가 왜 당신들의 인생에 맞춰서 살아야 하느냐”고 따졌다. 형에게는 “어디 가서 지금의 나를 보고 여동생이라고 하면 형이 정신병자 소리 듣는다”는 말도 했다. 억울해서 피눈물이 떨어졌다. 그즈음 그는 어디선가 “트랜스”라는 단어를 들었다. 성확정(전환) 수술을 하려면 2억~3억원은 필요하다는 풍문도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희망도 품었다. 그는 “올가을에 수술을 하고 봄까지 호적 정정을 반드시 끝낸다”고 다짐했다. 어머니에게도 “내년에 호적 정정 되더라도 놀라지 마시라”고 미리 알렸다. 어머니는 “위험하다는데 꼭 해야 하느냐”고 걱정하지만, 그에게는 목숨을 걸어도 좋은 수술이다. 그는 “수술대 위에서 죽더라도, 수술하고 아파서 지옥이 기다리더라도 나는 해야 된다”고 말했다. “평생 그 목표를 위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6월22일 대법원의 성전환자 호적 정정 판결이 나온 뒤로 하루하루가 꿈만 같다. 그는 “내 평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술 마치고 10년만 더 살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는 판결이 나오던 날 사고를 칠 뻔했다. 손이 떨려서 운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트렌스젠더 여성과 사는 트렌스젠더 남성

그리고 그에게는 ‘동생들’이 생겼다.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동생들이다. 이날도 그는 친한 트랜스젠더 동생인 정동민(35·가명)씨를 불렀다. 정씨는 차로 한 시간 걸리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 김씨는 정씨를 보면서 “어머니는 아프면 다른 자식이라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서로밖에 없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남성인 정씨는 트랜스젠더 여성과 사귀고 있다. 정씨는 “아직 애인이 가족 때문에 호르몬 투여도 하지 못하지만, 내 눈에는 정말로 예쁜 여자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씨는 정씨를 보면서 “여자라고 하면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그 애와 함께 하루만 살 수 있다면, 본성대로 자기는 드레스 입고 그 애는 양복 입고 결혼해도 좋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렇게 성전환자들끼리 사귀는 경우가 없지 않다. 정씨도 지금의 애인을 만나기 전에는 일반 여성과 사귀었다. 22살에 회사 기숙사에서 만난 여성과 4년을 살았고, 27살 때부터는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동창과 8년을 함께 살았다. 그도 “우리는 아플 수밖에 없지만, 그 여성들은 우리 고통의 절반을 나누어 가진 것 아니냐”며 미안해했다.

정씨는 10년 가까이 호르몬 투여를 해오고 있다. 그는 “수술은 언제나 꿈이었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초등학교 동창과 오랜 세월 살면서 집을 마련하고 생활을 꾸리느라 수술의 꿈도 미루었다. 그는 “자궁암에 걸려서 자궁을 덜어내는 사람이 부러웠다”며 “혹시 암에 안 걸리면 안 해주나 생각해본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애인을 만나면서 가족에게도 커밍아웃을 했다. 그는 어머니가 “호르몬 하니?”라고 물으면 “어” 하고, 아버지가 “바뀐 외모에 만족하냐”고 물어도 “어” 한다. 작은누나에게는 지금 애인을 만나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얼마 전 그는 애인과 함께 한강변을 걷다가 한강변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 형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눈이 동그래졌다. 마침 형은 그도 아는 형의 동창과 같이 있었다. 하지만 형의 친구는 외모가 바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형도 동생을 아는 체하지 않았고, 그도 형을 애인에게 “오빠”라고 소개하기 싫었다.

정씨는 회사 사람들에게도 그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굳이 커밍아웃을 하지는 않지만, 누군가 물으면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다. 김씨는 주민등록증 때문에 신분증명을 요구하는 직장에 취업할 엄두도 못 냈지만, 정씨는 회사에 떳떳하게 서류를 내밀곤 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도 호적상 그의 성별을 알고 있다. 정씨는 “먹고살아야 하니까 주민증을 내밀 수밖에 없죠”라고 말했다. 그는 “남들이 쑥덕거리는 것이 두려웠으면 직장생활 못했죠”라며 “호르몬 투여로 머리가 빠지고, 수염이 나도 그냥 다녀요”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의 인생을 “그래도 평탄했다”고 돌이켰다. 다행히 그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교복 자율화가 됐고, 고등학교까지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됐다. 졸업사진을 찍을 때 다른 친구들은 한복을 입었지만, 그는 점퍼에 넥타이를 매고 나갔다. 큰누나 결혼식 때도 양복을 입었다. 어머니는 “쟤가 좋다는데 어쩌냐”며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통장·국민연금·운전면허 곳곳이 암초

그렇게 자신을 감추지 않고 살아온 정씨도 주민등록증 때문에 자주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그는 “카드 대출이 연체돼서 갚으려고 전화를 했더니, 목소리를 듣고 본인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의 남자다운 목소리와 주민등록번호의 앞자리가 충돌했던 것이다. 그는 “돈을 갚으려고 해도 갚지도 못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병원에서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내분비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 하필이면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외모가 남성인 그는 마치 대리인처럼 행동하다가 진찰실에 들어가 “사실은 트랜스젠더”라고 말했다. 이렇게 유능하게 대처하는 정씨지만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김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는 주민등록증의 번호와 여성적인 이름 탓에 은행 통장을 만들기 싫었다. 본인 확인한다고 이것저것 서류를 요구할 것이 뻔해 국민연금도, 의료보험도 가입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는 직업상 필요해 취소된 운전면허를 다시 땄다. 운전학원에서 시험에 합격한 수강생의 면허증을 시험장에서 가져다주었지만, 그의 것만 빠져 있었다. 운전학원 강사는 “시험장에서 직접 오라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시험장에서 본인확인을 명목으로 열 손가락 지문을 찍어야 했다. 그는 “현행범도 아닌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있던 정씨는 “나는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졌는데도 열 손가락 지문 다 찍었잖아”라고 거들었다. 김씨는 “나는 1천만원짜리 수표를 준다고 해도 싫다”고 말했다. 수표를 바꾸기 위해서 주민증을 제시하는 일이 싫은 탓이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내가 나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는데, 이게 지옥이고 독재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