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4월 28일 아침 9시 불꽃처럼 던져진 의문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들이 분신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평택의 농민들은 변함없는 질문을 던진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1986년 4월27일 밤 9시30분께 서울 흑석동 중앙대 건너편 원불교 회관 부근 한 옥탑방. 감시의 눈을 피해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이정승(당시 23살)의 자취방으로 일단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전날 서울대 의대 도서관 점거농성 계획이 실패한 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모임에 참석한 학생운동가들은 그해 봄 벌인 ‘전방입소 거부투쟁’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잇따른 농성 기도가 실패로 끝나 분위기는 침울했고, 이튿날로 예정된 전방입소에 맞춰 거리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투쟁을 마무리짓기로 했다.
학생운동을 정리하는 마지막 시위
마지막 시위 장소는 신림사거리 부근 가야쇼핑 앞 거리로 정해졌다. 현장 책임은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당시 23살)이 지기로 했다. 1차 시위가 무산될 경우 신대방 삼거리에서 공대 학생회장 장유식(당시 23살) 주도로 2차 시위를 벌이기로 했고, 이정승은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마무리 집회를 맡기로 했다.

△ 1986년 4월28일 아침 9시 불꽃처럼 던져진 의문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들이 분신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평택의 농민들은 변함없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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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학생회장 김지용의 수배로 김세진이 맡아온 대외연락 총괄업무는 이정승에게 넘겨졌다. 얘기를 끝낸 이들은 흑석동 시장통의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이별’의 소주잔을 기울였다. 구속을 각오하고 벌이는 시위, 학생운동을 ‘정리’할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이튿날 아침 7시께 이정승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선잠을 깼다. 어젯밤 “먼저 (감옥에) 들어가 잘 정리해놓고 있을 테니, 열심히 잘 싸우고 한 놈씩 들어오라”며 호기롭게 웃던 김세진이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준비 좀 할 게 있어서.”
“뭘?”
“어, 시너 좀 사려고.”
“그건 뭐하게?”
“짭새들 겁 좀 주려고.”
서글한 얼굴의 김세진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긴장할 때마다 보이는 특유의 버릇대로 손으로 앞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가 나간 직후 이정승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익숙한 통학로를 따라 학교로 향하던 이정승은 1차 시위 예정 장소인 가야쇼핑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정리집회 때 현장 상황을 자세히 전하기 위해선 시위 장면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먼발치에서나마 절친한 친구 김세진이 학생운동가로서 마지막으로 벌이는 시위를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그룹들은 노동운동 진영으로 이른바 ‘존재이전’을 빨리 해야 한다는 마음의 짐 같은 게 있었다. 빠른 친구들은 2학년이면 ‘현장’으로 들어갔는데, 학생운동 한다고 4학년까지 학교에 있었으니 조바심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그날은 세진이가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빵살이’를 거쳐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는 과정의 출발인 셈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유난히 햇볕이 강렬했던 1986년 4월28일 오전 9시께.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보라매공원 쪽으로 100여m 떨어진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4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거리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팔짱을 낀 채 삽시간에 인도와 차도를 점거한 젊은이들은 “반전반핵 양키고홈”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반대”를 외쳤다. 시위대의 눈길은 길가 3층 건물 옥상에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쩌렁쩌렁 구호를 선창하고 있는 두 젊은이에게 고정됐다. 김세진과 당시 서울대 ‘전방입소 훈련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 공동부위원장을 맡았던 이재호(23)였다.
80년대 중반, 한반도 모순 구조의 주적
거리시위를 시작한 지 5분 남짓이나 지났을까? 득달같이 달려온 전경과 백골단이 시위대를 에워싸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일부 경찰병력은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두 학생을 붙잡기 위해 건물 옥상을 뛰어올랐다. 잠시 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그중 한 학생이 비틀거리며 다시 나타나 팔뚝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불길에 휩싸인 그의 몸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에선 굶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 김세진씨가 분신 이틀 전인 1986년 4월26일 부모님께 보낸 편지. 그는 전방입소 반대시위로 구속될 각오를 하고, 구치소로 이송되면 다시 편지하겠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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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너를 사가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아, 저게 분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진이는 등 쪽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상황에서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쳤다. 이상하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시위 직전 미리 현장에 도착해 있던 이정승은 자기도 모르는 새 도로 한가운데로 달려나가 있었다. 두 사람의 분신 이후 찰나의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연좌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을 끌어내던 경찰들도 멍한 채였다. 3~4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울며, 매를 맞으며 학생들은 그렇게 구호를 외치다 천천히 ‘닭장차’에 태워졌다. 시위 현장에서 체포돼 구속된 이정승은 석 달 뒤 집행유예로 풀려나 판교 김세진의 무덤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전신에 60%와 80%의 3도 화상을 입은 김세진과 이재호는 그해 5월3일과 5월26일 각각 세상을 등진 뒤였다.
1980년대 중반 학생운동권에선 미국을 “한반도 모순 구조의 주적”으로 규정했다. 미군 주둔은 남한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경제적 이해에 따른 것이란 인식이 생겨났다. 전술 핵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한 것은 분단 고착화, 나아가 한반도가 미국의 ‘버릴 수 있는 카드’로서 언제든 핵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몰려 있다는 문제의식도 싹텄다. 다른 한편에선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원화절상과 무역·농산물·금융 시장 개방이 이뤄지고, 이는 결국 한국 경제의 예속화로 이어진다는 논리였다.
김세진·이재호 두 젊은이가 불꽃으로 생을 마감한 지 꼭 20년이 흘렀다. 그사이 세계도 변했고, 우리 사회도 달라졌다. 냉전의 극한 대결이 끝났고, 피의 학살로 집권했던 독재정권도 막을 내린 지 오래다. 남과 북의 정상이 얼싸안고 감격의 상봉을 한 뒤 불어온 화해의 훈풍을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녘 땅으로 관광을 다니는 세상이 됐다. 20년은 긴 세월이다.
그럼에도 2006년 봄 변하지 않은 게 있다. 이라크 파병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서 용산기지 이전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산적한 동맹의 현안들이 도처에서 파열음을 내며 논쟁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하나로 모인다. 김세진·이재호 두 청년이 20년 전 던지고 간 바로 그 물음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예, 예” 거리는 정부 꼴보기 싫다
2006년 4월12일 오후 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볏짚 타는 은은한 내음이 가득한 마을의 시뻘건 황톳빛 채소밭에선 풋마늘이 눈부신 초록으로 자라고 있었다. 못자리에 물도 대고, 비닐 씌워 고추 모종도 해야 하는 시기 하루 해가 짧기만 하다. 들녘으로 일을 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개들의 컹컹 짖는 소리만 아련히 들려오는 한적한 마을 어귀에서 박아무개(68·여)씨가 대뜸 목소리를 높인다. “수족도 제대로 못 쓰는 늙은이보고 가긴 어딜 가라는 거야. 물어보지도 않고 돈 몇 푼 던져주고 나가라는 게 말이나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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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신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이재호씨. 1980년대 중반 학생운동권에선 미국을 한반도 모순 구조의 주적으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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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댁으로 대추리에 들어와 45년째 그 땅을 지키고 있는 박씨는 “국민이 있어야 나라도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돈 한 푼 안 받았는데, 왜 때려부수고 파헤치냐”며 “한국도 좋아졌다면서 왜 아직도 미국에 의지하려고만 드느냐”고도 했다. “미국 돈도 아니고 우리가 낸 세금으로 왜 미군지지를 지어주느냐”고도 했다. 박씨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사이 전투기 편대가 굉음을 내며 상공을 가른다.
드넓은 대추리 원장을 가로질러 도두리로 향했다. 도랑으로 미군기지 하수가 흘러나온다고 해 이름이 붙여졌다는 ‘오랑캐똘’을 지나다 술기운에 얼굴이 불콰해진 주민 최상빈(59)씨를 만났다. “갯고랑이라 5~6년 묵혀가며 간을 빼고, 지게로 지고 이고 흙을 퍼날라 간신히 문전옥답을 만들어놨다. 이제 와서 미군기지 터로 내놓으라니. 언제 정부가 미국에서 가져온 원조 밀가루 1포대라도 줘보기나 했냐?”
최씨가 보기에 미국은 자기들 잇속 있는 일만 하지 손해보는 일은 눈곱만큼도 안 한단다. 우리나라를 위해 일했다고 쳐도 그게 벌써 50년 전이고, 이미 본전 다 찾아간 거 아니냔다. 미군기지를 짓기 위해 땅을 돋워준다는데, 근방에 산이 없으니 어디선가 멀쩡한 산을 허물어 흙을 퍼와야 할 지경이란다. 그런데도 미국이라면 그저 ‘예, 예’거리는 정부가 꼴도 보기 싫단다. “물 끊으려면 끊으라고 해. 못자리 뭐하러 해. 그냥 건답직파 해버리면 그냥이야. 못자리판에 물 댈 필요 없이 마른 논에 그냥 볍씨를 뿌릴 거야. 가기는 뭐하러, 어디로 가. 여기가 내 땅이고 내 집인데….” 성난 그의 눈가도 얼굴만큼 붉어졌다.
길 양편에 처연하게 늘어선 허수아비 사이를 지나 외롭게 마주 선 거대한 대나무 장승을 끼고 도두리 장원을 내처 달렸다. 저물기 시작한 들녘에선 미군기지 수용 예정 지역임을 알리는 흰 깃발과 기지 이전 반대를 외치는 노란색 깃발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아산만 방조제가 막아놓은 물길을 따라 길닦이 공사가 한창인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논둑에서 삽질을 하고 있는 신대리 주민 이승우(69)씨를 만났다. “힘이 없는데 어떡할 거야. 미국한테 그래도 우리가 덕보는 거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한평생 미국에게서 덕본 것 없을 늙은 농부는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우리가 뭘 어떡하겠느냐. 미군이 물러간다고 하면 어쨌든 불안하지 않겠냐”며 허허롭게 웃었다.
동맹 없는 내일에 대하여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위협의 공유가 동맹의 중요한 척도”라고 지적한다. 공산주의 확산과 북한의 남침 위협이 미국과 한국의 동맹을 ‘혈맹’으로 만들어준 토대였다. 동맹의 조건은 바뀌었다. 자본주의의 승리로 체제 대결은 막을 내렸고, 탈냉전 시대 남북의 적대적 대결구도는 급속히 이완되고 있다.

△ 1989년 4월28일 서울대에서 열린 김세진·이재호 분신 3주기 추모와 계승투쟁 결의대회(왼쪽). 이 대회에서 학생들이 당시 분신 장면을 재현하자 이재호씨의 어머니 전계순씨가 통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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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의 성격과 내용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진 셈이다. 그럼에도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여전히 변수가 아닌 상수로 취급된다. 미국과의 동거를 전제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건 아직도 불온한 ‘반미’로 여겨진다. 이제는 김세진·이재호가 우리 사회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놔야 할 때다. 20년 전 젊은 그들이 외쳤던 미국과의 동맹 없는 한반도의 내일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모색의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