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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쿨~ 하니? 세련되게, 심플하게, 가볍게, 냉정하게…지금 우리 사회는 왜 ‘쿨’을 권하는가
바람났어? 그럼 잘 가!
얼마 전, TV에 나온 한 여대생도 실제 그랬다.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동안 남자친구가 자신의 절친한 여자친구와 바람이 나고야 말았다. ‘3자 대면’ 자리에서 그 황당한 사건을 고백받은 그녀, 여자친구를 보며 말한다. “학교 가면 나는 불쌍하단 얘기 들을 거고, 쟤(남자친구)는 곧 군대갈 건데, 너는 어떡할래” 그는 “두 사람 잘 살아라” 하며 가뿐하게 자리를 떴다. 물론, 남자친구의 뒤통수를 한대 갈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쿨!’. 시청자들은 탄성을 질렀다. 그녀는 징징대지 않고 질척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되 흥분하지 않고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cool’의 정의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함과 자기 조절능력 잃지 않기’ ‘너무 열렬하거나 친근한 모습 보이지 않기’ ‘감정의 기복 절제하기’다. 만약 거리에서 “쿨하다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좋다, 멋있다, 세련됐다, 유행에 맞는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쿨’이란 간단한 형용사에는, 냉정한·서늘한·뻔뻔한·침착한·훌륭한·가벼운, 그러나 천박하지 않은·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등의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열정과 감각을 필요한 순간에 발휘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자기 포장술’이라는 세련된 정의도 있다(문학평론가 백지연). 그렇기에 ‘쿨’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때는 뭐니뭐니해도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절묘한 감정의 줄다리기가 불가피한 연애관계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 자기방어, 남에게 간섭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고도의 능력, 따라서 헤어질 때 울며불며 매달리지 않는 절제가 필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회사원 이아무개(35)씨는 몇년 동안 헌신했던 여자친구와 이별하면서 ‘쿨 가이’로 거듭나게 됐다. 그는 그 뒤 여러 번 크고 작은 로맨스에 빠졌지만, 상대방의 일상에 간섭하거나 전화를 안 한다고 앙앙대거나 헤어진다고 원망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 도전과 포기 모두 적절한 타이밍을 맞춰서 이뤄졌다. “산전수전공중전에 연장전까지 치르면서 집착이란 게 뭔가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내가 그를 좋아했던 것은 어차피 내 행복을 위해서였는데 그가 나를 ‘배신’했다며 몸서리칠 이유가 뭐겠는가.” 그는 “10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야말로 무식하고 정복적으로 들린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는 것보다는 ‘주기는 하되 받을 걸 기대하지는 말자’는 게 내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주기는 하되 돌려받지 못해도 ‘쿨’한 미소를 잃지 않는 인물은 올 상반기 인기리에 방영된 문화방송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도 등장한다. 풋내기 신입사원 남정은(정다빈)을 맘에 두면서도 그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선선히 봐주는, 그렇다고 상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훼방놓거나 못살게 굴지도 않는, 한발 더 나아가 유학까지 보내 회사의 인재로 키우는 유동준 실장(이현우)이다.
돈 있으되 자랑하지 않는…
극중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 이현우도 ‘쿨 가이’의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다. 뮤지션으로서 명성도 얻었고 딸린 가족 없는 능력 있는 노총각에 하고 싶은 건 자유롭게 한다. 싱글족을 위한 요리집을 내 혼자 살면서도 품위 있게 독신을 즐기는 문화에 일조했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경제적 능력이다.
그렇다고 돈이 ‘쿨’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돈자랑 하듯 과시하면 이미 ‘쿨’이 아니다. 패션지 기자 김경숙씨는 꾸며도 안 꾸민 듯, 적당히 숨길 줄 아는 감각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패션에서 쿨의 의미는 다양하지만 일단 지나치게 차려입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것이다. 거울 앞에서 옷을 갖춰입는 데 1시간씩 걸렸더라도 그렇게 공들였다는 티를 내면 안 된다. 멋지면서도 자연스러워 보여야 한다. 가령 옷은 온통 값비싼 명품으로 둘렀더라도 머리는 일부러 베드 헤어(침대에서 갓 빠져나온 듯 말끔히 정리되지 않은 헤어스타일)를 연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심지어 어떤 패션족은 ‘쿨’을 연출하기 위해 자기 경제력을 벗어나는 수준의 명품을 구입하고도 로고를 굳이 떼버린다. 자기는 브랜드 꼬리표 때문에 무작정 이 제품을 사는 사람은 아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상품 이미지를 가장 잘 포장해야 하는 광고계에서도 ‘쿨’은 대세다. 제일기획 김홍탁 국장은 “광고제작 과정에서도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때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쿨하냐 그렇지 않으냐를 따진다. 제품을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보이길 원하는 광고주들이 그렇게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광고에서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톤 앤드 매너’(tone & manner)라고 하는데, 세련됨·모던함 같은 쿨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은색·청색·회색 계통의 색조가 유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쿨’을 원하는 소비자들은 구구하게 설명하기보다는 ‘한눈에 척’ 오는 느낌을 원한다. 금강기획에서는 최근 마케팅 기획조사를 벌였는데 어떤 때 광고를 선호하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세련될 때가 21.2%, 독특할 때가 20.3%, 심플할 때가 12.1%였다. ‘쿨’과 연관 있는 이 세 요소가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이른바 전통적인 요소인 ‘신뢰감을 줄 때’는 3.4%에 지나지 않았다. 이 회사 권용진 국장은 소비자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쿨에 대한 소비자들의 심리를 바꿔 말하면 ‘끈적거리기 싫다, 심플하게 살고 싶다,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살고 싶다’ 정도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제품이 왜 좋은지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은 먹히지 않는다. 이론적이고 기술적인 접근이 아니라 세련되고 심플하고 독특해야 한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내가 좋은 느낌을 받으면 좋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카피가 많은 광고는 효과가 적다.”
‘쿨족’들은 주변 환경과 마찰 빚기도
권 국장은 “쿨 광고에 호감을 가지는 연령층은 10~30대 초반으로 내일의 풍요보다는 지금의 행복이 중요한 세대”라고 지적한다. 오늘의 피땀으로 내일의 미래를 저축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하고 싶은 건 그때그때 ‘저지른다’. 대학생 김흥주(22)씨는 “라이프스타일을 비롯해 대학생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미선이·효순이 사건이 있으면 갑자기 미국이 못 견디게 싫어지고, 이라크 전쟁이 터지면 지나가다 반전 배지 하나 사고, 지나가다가 인라인스케이트 타고 싶어지면 사서 타는 거다. 그때그때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간다. 그래서 가끔 튀는 짓도 해보는 거다.” 이들은 궂은 ‘노가다’조차 자신이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는다. 한 조경업체 사장은 “요즘 공사장에 가보면 20대 대학생들이 꽤 많이 눈에 띄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그런가 물어보면 휴대전화 바꿀 때가 됐다거나 MP3 플레이어가 필요해서라고 대꾸한다”라고 전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옷 입듯, 돈이 궁하면 험한 일도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자기가 원하는 일은 쓱쓱 해치우고 감정에 숨김이 없고 호불호가 분명한 ‘쿨족’들은 주변의 ‘쿨하지 못한’ 환경과 마찰을 빚을 때도 있다. 얼마 전까지 사회단체에서 일했던 황아무개(27)씨는 ‘관계’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못 참는다. “직장 동료이기 때문에 친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메신저 아이디를 보면 보통 그 사람 심경이 대충 나오지 않는가.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냐’고 꼬치꼬치 캐묻는다. 회의할 때도 말만 어렵게 한다. 세상이 너무 삭막하다느니 주체적인 고민이 없다느니 하면서. 지난번에 직장을 그만둘 때도 한 상사는 ‘일이 너한테 안 맞냐’라고 묻는 게 아니라, ‘네가 다니는 것 자체가 사람들한테 힘을 줄 거다’라는 식으로 얘기하더라. 정말 황당했다.”
집단 해체 시대의 개인주의
집단주의 속에서 개인성이 사장되었던 한국사회에서 ‘쿨’은 허례허식과 과장, 명분과 관계의 집착이 강한 ‘어른들’의 풍토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조한혜정 교수(연세대 사회학과)는 “젊은이들로부터 ‘우리 사회 왜 이렇게 후지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 돌아보면 ‘후진 사회’의 특징은 가족주의적 끈적거림과 군사주의적 의리, 식민지적 가식 같은 것이다. 이제는 각자가 생각한 바를 눈치 보지 않고 추진하는 것, ‘국민정서’라거나 ‘안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하냐?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라는 말로 채근해 물귀신처럼 끌어내리지 않고 가볍게 움직여야 할 때다. ‘근대적 집요함’은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경험이 널려 있는 요즘 세상에서 병을 고치기보다 악화시킬 뿐이다”라고 진단한다. 그는 “이런 시대의 미덕은 선뜻 포기하는 것, 올 때 오고 갈 때 가는 것, 집착하지 않는 것, 상대의 의사와 감수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다원화된 사회의 다양한 시민들이 존중되는 질서를 만들어가려면 그전과는 전혀 다른 관계 맺음의 원칙과 감수성이 필요한데, ‘쿨’이라는 간단한 표현 속에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쿨’은 동시에 집단이라는 보호막이 해체되고 노동이 유연화돼가는 요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자 환상일지 모른다. 수면 위에선 우아한 미소를 흘리지만 물밑에선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대야 하는 오리배처럼, 타인에게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속으로 삼키는 눈물은 얼마나 쓰라린가. 그래서 ‘쿨’은 자신을 종신토록 고용해주는 직장이나, 영원히 감싸주는 집단 또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현대인들이 무의식·의식적으로 발명해낸 감정의 조절 양식으로도 읽힌다. 타인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도 않고 그래서 상대방을 포용하지도 못하면서 고통을 그냥 견디는 ‘개인’. ‘쿨’을 이처럼 ‘뜨겁게’ 설명한 끝에 가지는 안쓰러움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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