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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60만명, 최대 120만명! 파면 팔수록 끝없이 나오는 유골, 도대체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나
이땅 곳곳에 널려 있는 학살의 흔적들
그러나 학살의 흔적들은 이땅 곳곳에 널려 있다. 지금도 경남 산청군 외공리, 경기도 고양시 탄현동 금정굴, 경북 경산시 평산 2동 코발트 광산 등에서 학살극을 명백히 증거하는 유골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한성훈씨는 “부산에서는 동네 야산만 파헤쳐도 피학살자의 유골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학계는 각종 자료분석과 유골발굴 등 연구작업을 통해 최소 60만명에서 최대 120만명의 민간인이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집단 학살극의 성격과 유형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 한국전쟁기간, 전후 수습과정 등 발생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피학살자는 좌익 인사 및 그 일가친척, 국민보도연맹원, 형무소 수감자, 피난민, 제2전선 지역주민, 부역 혐의자, 공비 및 통비 혐의자,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한국전쟁 전 대표적 학살극은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진압과정에서 이뤄졌다. 48년 4월3일 제주도의 남로당 무장소조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한 5·10 선거 저지를 위해 봉기했다. 상당수 제주도민의 동조 속에 49년까지 지속된 이 봉기에서 전체 제주도 인구의 10%에 가까운 3만명 이상이 희생됐다. 희생자가 5만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희생자의 85% 이상은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끈질긴 토벌작전 과정에서 학살된 민간인이었다. 이 학살극은 미군정 치하에서 이뤄졌고, 학살 당시 제주 해역에 미 함대가 배치되는 등 미국이 개입한 혐의가 짙다. 여순사건은 4·3사건의 연장선에서 발생했다. 4·3사건에 대한 진압출동 명령을 받은 여수주둔 국군 제14연대가 48년 10월19일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14연대 병력 대다수인 3천여명의 군인이 참여한 봉기는 마산주둔 15연대 병력과 이 지역 좌익세력들이 가세하면서 순식간에 민군봉기로 발전했다. 그런 만큼 여순사건 진압에 나선 군경은 보복적인 테러, 학살, 약탈, 방화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관련자 색출작업은 야만적이었다. 전 주민을 학교 등 공공장소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머리가 짧은 자,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등 외모로 관련자를 골라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즉석에서 곤봉, 개머리판, 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하거나 총살했다. 당시 진압에 나선 제5연대의 김종완 대대장은 학교의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즉결 참수처분을 하기도 하였다. 여순사건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다만 전라남도 보건후생부의 이재민 구호자료는 당시 여수를 포함한 7개지역에서 2634명이 사망하고, 4325명이 행방불명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가 작성한 좌익사범 처리지침?
‘4·3’과 ‘여순’사건, 그리고 유격전으로 이어지는 한국전쟁 이전 일련의 사건 속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는 10만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 가운데 민간인학살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최소한 제주도에서 학살된 2만5천여명, 여순사건에서 행방불명이 된 4325명은 대부분 민간인일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3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이다. 50년 6월25일을 계기로 그 전과는 다른 형태의 민간인 학살극이 벌어진다. 전쟁으로 처치 곤란해진 좌익성향 인사에 대한 예방적 차원의 대량 학살이 진행된 것이다. 한홍구 교수(성공회대·한국현대사)는 “전쟁이 발발하자 다급해진 정부는 일제가 작성해놓은 좌익사범 처리지침에 따라 학살을 벌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방적 집단학살’은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처형이었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은 군·경 등 국가공권력이 50년 7월부터 8월까지 두달 사이 경기도 평택 이남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전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자행한 우리 현대사의 최대 학살극이다. 보도연맹원은 48년 12월1일 공포된 국가보안법으로 대량 구속자가 발생하고 전국 교도소가 넘쳐나자 이를 해소할 묘안으로 나왔다. 소위 좌익성향 인사들 가운데 사안이 경미하거나 남로당에서 탈당·전향한 사람을 모아 “사상을 전향·교화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호지도(保護指導)한다”며 49년 6월5일 결성됐다. 그러나 각 지방 경찰 및 우익단체들은 할당제에 따른 인원수 채우기로 좌익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까지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고, 연맹원 수는 30만∼35만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당시 김효석 내무장관, 권승렬 법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등의 지도로 전쟁 전까지 반공시위나 강연회, 모심기 등에 동원됐고 경찰과 협력해 좌익 인사 색출작업에 나서는 등 ‘반공 선전대’ 역할을 했다. 그러나 6·25가 터지자 연맹원이 북한 점령의 첨병역할을 할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권은 그해 7월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을 제외한 경기도 평택 이남의 전체 연맹원을 학살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과거와 같은 단순 소집명령 정도로 알고 모였던 20만∼25만명의 연맹원은 군·경·우익단체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보복학살의 기폭제,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집단학살도 처참했다. 대전형무소 학살 사례는 1999년 12월16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존소에서 비밀해제된 한국전쟁 관련 문서에서 그 실상의 일부가 드러났다.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자 군경은 최고위층의 명령에 의해 50년 7월4∼6일까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 1800여명을 대전시 동구 낭월동 등지에서 불법 처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처형은 이후 대전을 점령한 인민군이 남한 경찰 및 군인 가족과 우익인사 1300여명을 대전형무소 우물에 수장시키는 보복살인을 낳았다. 전쟁 당시 남한 형무소에 수감된 기결수는 모두 3만7천여명이었다. 이 가운데 3일 만에 인민군이 점령한 뒤 풀어준 경기도 평택 이북지역 재소자 1만7천여명을 제외한 2만명이 모두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기결수와 비슷한 수의 미결수가 함께 처형됐기 때문에 전체 피해자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60년 활동한 국회 양민학살진상규명특위는 ‘50년 6월 초순 대구형무소는 특무대, 헌병대, 경찰의 요구로 기결수 1031명을 포함해 1402명을 인도했으나 그뒤의 처지를 알 수 없다’면서 이들이 모두 ‘학살됐다’고 결론짓고 있다. 최근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미결수 300여명은 50년 8월 헌병들이 진주형무소로 이감시킨다며 데려가 삼천포 앞바다에서 수장시킨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전쟁중 임시수도로 결정된 부산에서도 이승만 정권은 지역 내의 불안요소를 제거한다는 미명으로 조직적 학살을 진행했다. 50년 7∼9월 사이 부산형무소의 기·미결수 6천여명이 모두 처형됐고, 특무대의 불심검문에 걸린 민간인도 함께 학살됐다. 51년에는 영도의 벽돌공장에 노숙하던 500명의 피난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군·경은 이들의 시신을 경남 김해시 대동면 신어산,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삼박골짜기, 송정동 골짜기 등에 매장했고, 일부는 오륙도와 영도 앞바다에 철사로 묶어 수장하기도 했다. 최근 지역 연구단체와 유족들이 신어산과 구평동 골짜기에서 피학살자 유골을 발굴함으로써 학살의 실체가 50년 만에 서서히 확인되고 있다. 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에는 청년단 등 우익단체에 의해 ‘빨갱이 가족 처단’, ‘부역혐의자 처단’을 명분으로 민간인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경기도 강화와 고양 금정굴 학살이 대표적이다. 강화에서는 51년 1∼2월 사이 1·4 후퇴 당시 강화읍에서 조직된 우익 향토방위특공대가 부역혐의가 있는 주민 300여명을 비밀리에 연행해 갑곳 나루터와 옥계갯벌에서 학살했다. 강화도 학살사건은 지난해 12월21일 유족 2명이 김원웅 의원(한나라당·대전대덕)을 통해 국회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원을 내면서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 고양시 탄현동 고봉산 기슭에 있는 일제시대 수직폐광굴인 금정굴에서는 50년 10∼11월에 임의조직인 치안대와 태극단이 학살을 벌였다. 고양금정굴공동대책위(집행위원장 이춘열)는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한 사람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약 1천명을 학살했는데 대부분 죄없는 민간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금정굴공대위는 지난 95년 시민모금을 통해 일부 발굴한 피학살자 유골을 현재 전문기관에 의뢰해 감식중이다. 이런 형태의 학살 피해자도 전국적으로 1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폐광에 가둬두고 3일 동안 불을 지르다
비슷한 시기에 빨치산 토벌을 진행하던 군경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도 심각한 수준이다. 주로 국군 제11사단에 의해 자행된 이 학살은 빨치산의 주요 활동지역인 전남 함평·나주·화순, 전북 임실·순창 등에서 발생했다. 94년 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양민학살 진상실태조사 특별위원회’를 발족시킨 전라북도의회가 지난 96년 발표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전북에서만 모두 1200여명이 희생됐다고 적고 있다. 특히 51년 2월7일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폐광에서는 11사단 13연대 2대대 군인들이 저지른 학살은 잔혹했다. 당시 군경이 빨치산 활동지역인 회문산 주변 마을 모든 집을 불태우자 갈 곳 없는 주민 370여명은 이 폐광에 모여 살았다. 그런데 군인들은 이들을 가둬둔 채 3일 동안 갱 입구에 불을 질러 질식사시킨 것으로 조사됐다. 학계는 경남 거창·산청·함양과 경북, 충청 등 다른 지역의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 피해자까지 종합할 경우 적어도 20만명 이상이 이런 식으로 죽임을 당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6·25 전쟁 초기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현재 노근리만 국내외적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지금까지 미군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민원이 제기된 지역은 60여곳에 이른다. 50년 7월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360명이 사망한 전북 익산과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주민 수백명이 떼죽음을 당한 경북 포항시 송골계곡을 비롯해 경남 마산·사천·의령, 경북 구미·칠곡, 충북 단양 등에서 대략 1만여명이 미군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된 ‘야만적인 전쟁’이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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