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0년11월15일 제334호 

[표지이야기] 잠자던 진실, 30년만에 깨어나다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무엇을 했는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비밀해제 보고서·사진 최초공개


<한겨레21>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미군쪽의 공식문서와 사진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는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National Archives &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2000년 6월1일 30년 만에 비밀해제된 것으로, <한겨레21>이 여러 경로를 통해 최근 입수한 것이다.

이 문서들은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에서 주월미군사령관 및 군부 고위장성에게 보낸 보고서와 사진, 각종 첨부문건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A4용지규격 총 554장(겹치는 부분을 제외하면 실제로는 150여장)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100여종의 문서로 이뤄져 있다. 이 보고서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실재했고, 이에 대한 한-미간 의견교환과 협조가 이뤄졌음을 확인시켜주는 최초의 미국 공식문서이다. 지금까지 국방부는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문서의 실재 여부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해왔다.

이 보고서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해 크게 세 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 중 1968년 2월12일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에서 일어난 첫 번째 사건은 <한겨레21>이 지난 280호 현장르포 ‘단명의 길, 디엔반의 비명’과 306호 표지이야기로 특종보도한 ‘베트남 양민학살, 중앙정보부가 조사했다’의 취재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건은 처음 알려지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퐁니·퐁넛촌 보고서에 첨부된 20장의 현장사진이다. 이 사진은 한국군이 마을을 공격하고 철수한 뒤 미군 상병 본(J.Vaughn)이 도착해 촬영한 것으로,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여성과 아이들인 것으로 드러나 있다.

물론 베트남전의 궁극적 책임자인 미군쪽이 작성한 비밀보고서엔 한국군에 대한 미국쪽의 편견이 개입됐을 여지가 있다. 작성자의 일방적인 주관에 근거해 작성된 부분도 있을 수 있으며 일부 사실은 부정확할 가능성도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겨레21>은 자료 속에 등장하는 한국군 관계자들에 대한 확인취재를 하기도 했다.

<한겨레21>은 앞으로 이 자료를 작성한 미군쪽 관계자들도 취재해서 후속보도할 예정이다.

편집자






(사진/미군 상병 '본'이 한국군의 퐁니·퐁넛촌 공격 직후 찍은 여성과 아이들의 주검사진(맨위). 아래사진에 대해 그는 “이 아이는 몸 어느곳에도 상처가 없다.근처 연못에서 익사한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1969년 12월23일.

베트남 사이공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샘 샤프(Sam H.Sharp) 대령은 자신을 발신자로 한 비밀보고서 한부를 주월미군사령부 참모장 타운젠트 소장에게 제출한다. 제목은 ‘1968년 2월12일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

이것은 시작이었다.

정확히 18일 뒤인 1970년 1월10일,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또다른 고위장교 로버트 쿡(Robert M.Cook) 대령도 비밀보고서 한부를 참모장에게 건넨다. 제목은 ‘1969년 4월15일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

그리고 바로 이튿날인 70년 1월11일, 쿡 대령은 또다른 사건의 보고서를 같은 상관 앞으로 보낸다. 역시 사건날짜만 다른 제목이었다. ‘1968년 10월22일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

연말연시, 미 국무부엔 비상이 걸리다

세 가지 사건이 잇따라 보고된 것이다. 68년 2월12일, 69년 4월15일, 68년 10월22일, 이날에 각각 일어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의혹. 각 보고서에는 여러 가지 첨부문서가 덧붙여졌다.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 및 미국·한국·월남군 병사들에 대한 조사반의 인터뷰 내용과 진상조사 결과, 사건현장의 사진, 각종 메모들….

물론 감찰부와 참모장 사이에서만 보고서가 오간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는 들뜬 분위기 속에서, 워싱턴의 미 국무부와 사이공의 미국대사관, 그리고 주월미군사령부는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 문제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왜 그랬던 것일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각종 보고서들의 내용을 짜맞춰 정황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1970년 2월24일 열리는 미국 상원의 사이밍턴 청문회를 두달 앞두고 미 국무부는 어떤 정보를 입수한다. 68년 7월 랜드재단(Rand Corporation)이 미 국방부의 용역을 받아 ‘베트콩의 정치양식’(The Viet Cong Style of Politics)이라는 보고서(이른바 ‘랜드보고서’)를 발간했고, 여기엔 한국군의 잔혹행위에 관한 사항이 일부 포함돼 있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이 문제가 일부 의원들에 의해서 제기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미 국무부는 이에 따라 주월미국대사관을 경유해 주월미군사령부에 메시지를 보낸다(주월미국대사관에 한국군의 학살 의혹에 관한 정보를 요구했고, 대사관은 이 훈령을 받은 즉시 주월미군사령부에 국무부의 요구를 전달했다). ‘랜드보고서’에 나온 한국군 학살 의혹 사건들과 함께 “당신들이 가지고 있을 정보”(infomation that you may have)를 추가로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 메시지를 수신한 주월미군사령부는 감찰부로 하여금 ‘랜드보고서’에 나온 한국군 잔혹행위 의혹의 진상과, 그동안 내부적으로 조사된 바 있는 해병 제3상륙전부대(당시 베트남에 주둔했던 미 해병부대) 내부의 조사문건을 확보토록 했다. 이 문건은 미 국방부 합참의장(휠러)과 태평양사령관(메케인)을 경유하여 미 국무부에 보고된다.

그런데 주월미군사령부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주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랜드보고서’가 아니다. 네이선 라이츠(Nathan Leites) 교수가 베트콩의 정치적 동기를 연구하기 위해 베트남 학생들을 시켜 포로·난민 수백명을 인터뷰한 이 자료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에 대해,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는 “근거가 박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9명의 인터뷰 과정에서 나온 한국군의 양민학살 의혹(랜드보고서 87∼93쪽에 실렸음)중 8개의 증거자료가 단순한 풍문에 근거한 듯 여겨져,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가 미 국무부의 ‘추가정보 요구’에 따라 보고했던 3가지 사건은 달랐다. 이 사건들은 랜드보고서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먼저 각 사건의 개요를 보자.

심상치 않은 세가지 사건





(사진/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비밀보고서표지(맨위)와 감찰부 로버트 쿡 대령이 사령부 참모장에게 보낸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의혹'보고서)

1. 1968년 2월12일 사건.

장소 : 쿠앙남(Quang Nam)성 디엔반(Dien Ban)현, 퐁니(Phong Nhi)·퐁넛(Phong Nut)마을.

상황 : 한국 해병 2여단 1대대 1중대가 마을 주변을 일렬종대로 지나던 중 저격을 받자 마을을 공격. 앞 소대에서 민간인들을 후송시켰으나 뒤에서 대부분 사살됨.

희생과 손실 : 79명(또는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음. 한국 해병 1명 부상.(<한겨레21>이 확인한 해당일 작전명 : 괴룡1호 작전)

2. 1969년 4월15일 사건.

장소 : 쿠앙남성 지 쑤옌(Di Xuyen)현, 푹미(Phouc My)사.

상황 : 한국 해병 2여단 2대대7중대3소대가 지뢰제거 중 폭발사고 뒤 저격받은 것으로 추정. 그뒤 다시 저격받는 과정에서 수류탄 사고로 한국군 사망. 한국군 전략촌을 무차별 공격. 그뒤에도 4.2인치 20발과 81미리 20발 포격, 그중 일부가 전략촌에 떨어져 미 육군 장교 1명과 2명의 사병이 부상.

희생과 손실 : 베트남 민간인 4명 사망, 12명 부상, 7명 구타, 대규모 재산피해. 지뢰폭발로 한국 해병 1명 사망, 4명 부상, 미 해병 다수 부상.(<한겨레21>이 확인한 해당일 작전명 : 승룡10호 작전) **??쪽과 33쪽 상자기사 참조

3. 1968년 10월22일 사건.

장소 : 쿠앙남성 호앙 쩌우(Hoang Chau)마을.(현재는 사라진 구 남베트남 정부 지명. 확인 결과 호아바아(Hoa Bang)현, 호아 쩌우(Hoa Chau)사일 가능성. 현재는 쿠앙남성에서 다낭(Da Nang)시로 편입.

상황 : 한국 해병 2여단 2대대 6중대 1소대가 야간방어진지 구축 중 저격당하자 마을을 공격한 뒤 포위(<한겨레21>이 ‘해병전투사’를 확인해본 결과 당일 유사한 작전을 벌인 중대는 2대대 5중대 1, 3소대로 나옴)

희생과 손실 : 베트남 민간인 22명 사망(8명의 어린이와 12명의 성인- 합계 불일치- 필자 주), 베트남 민간인 16명 부상(5명의 어린이와 11명의 성인), 13마리의 물소 사살, 95채의 주택이 100% 파괴, 1천개의 저장고 파괴. 초기 작전중 한국 해병대 대원 일부 사망.(<한겨레21>이 확인한 해당일 작전명 : 승룡3호 작전)

*** 세 작전 모두 <파월한국군전사>와 <해병전투사>에는 민간인 피해가 언급돼 있지 않다.

먼저 첫 번째 사건을 보자.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보고서에 따르면, 퐁니·퐁넛마을 주변에서 작전하던 한국 해병대에 의해 주민들이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사살되었다. 보고서는, 몇몇 피해자들이 칼에 찔렸고 한 젊은 여인은 가슴이 도려내어졌으며 총 79명(또는 69명)의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고 마을이 불태워졌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당시 사건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미 혼합작전 소대 본(J.Vaughn) 상병은 처참하게 죽은 주검들을 자신의 카메라로 촬영했고, 인화된 흑백사진들은 그뒤 각각에 대한 본의 설명과 함께 조사반의 조사보고서에 첨부된다. 사건 6일 뒤인 2월18일, 미 해병 제3상륙전부대 참모차장의 구두명령에 의해 두개 마을의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당일 조사반의 보고서가 해병 제3상륙전부대 사령관에게 전달된다. 이틀 뒤 보충조사가 실시되고, 4월16일엔 해병 제3상륙전부대 사령관의 이름으로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몰랜드에게 보고서가 올라간다. 보고서 후반부엔, 당시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해병2여단장 김연상 준장(여단장 임기 66.12.20∼68.8.4)에 대한 임기연장을 거부한 이유를 분석한 내용도 나온다. 암시장 거래등의 책임을 물어 여단장을 해임했지만, 실은 퐁니·퐁넛 사건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다.

한-미-월 합동조사반이 구성되다


(사진/퐁니·퐁넛촌에서 이 사진을 찍은 '본'은 “가슴이 도려진채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라는 설명문을 달았다)


퐁니·퐁넛 사건을 보고받은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은 4월29일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중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제네바협약의 서명국으로서 미국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라며 한국군 해병들의 전쟁범죄 가능성을 물었다. 채명신 사령관이 이 편지에 응답한 것은 6월4일. “퐁니·퐁넛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음모”라는 결론이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한국군의 III급 비밀 조사보고서도 첨부했다. 이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주월한국군의 ‘한국군 양민학살 의혹’ 관련 자체보고서이다.

미군쪽 자료에 따르면, 당시 주월한국군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해 자체조사뿐 아니라 미국-남베트남 정부군과 함께 합동조사반에 참여했다. 그것은 두 번째 사건인 69년 4월15일 사건 때문이었다. 이는 소탕작전을 실시하던 한국 해병 2대대7중대3소대가 저격을 받은 뒤 1명이 부비트랩 매설지점에서 수류탄을 제거하려다 폭발사고로 사망하자, 이에 흥분하여 전략촌에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다음날, 베트남 제1군단 사령관 호앙 수언 람(Hoang Xuan Lam), 이동호 해병 제2여단장, 미국 해병 제3상륙전사령부 니커슨(W.Nickerson) 중장 명의로 1969년 4월15일 사건에 대한 합동조사반 구성이 공표된다. 이 한-미-월 합동조사반에는 해럴드 체이스(Harold W.Chase) 미군 해병 대령, 차오 칵 낫(Cao Khac Nhat) 베트남 육군 중령, 이영주 해병 제2여단 소령이 참여한다.

조사결과가 보고된 것은 69년 5월10일. 합동조사반은 남베트남 제1군단 사령관에게 보낸 극비문서를 통해 다음을 포함한 7가지 결론을 내렸다. “지뢰와 수류탄 폭발로 인해 지뢰제거팀에 희생자가 발생했고 저격으로 인한 고통을 당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나, 한국 해병이 광분 상태에서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와 함께 합동조사반은 문서에서 “한국 해병여단은 푹미촌의 민간인들에게 발생한 사망·부상·상해·재산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이른 시일 안에 지급할 것, 책임자들에게 적절한 징계처분을 내릴 것” 등을 권고하고 있다. 이 합동조사보고서 문서에 대해 당시 해병 제2여단장인 이동호 준장도 사인을 했으며, 이는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보고서에 첨부돼 있다.

68년 10월22일 일어난 세 번째 사건도 두 번째와 비슷하다. 그 전날 밤 10시께 호앙 쩌우마을 외곽에 야간방어 진지를 구축한 해병 2대대 7중대 3소대가 규모를 알 수 없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대원 일부가 사망한다. 해병대원들은 즉각 마을을 향해 M72 LAW 및 소화기를 이용해 직격사격으로 대응하고 마을을 포위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2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한국군은 주민들을 한곳으로 모이게 한 뒤 약탈을 했다는 것이다. 사건 하루 뒤 마을 주민들이 이 사건에 대해 항의시위를 준비하자, 한국군 해병대는 20포대의 쌀과 200포대의 옥수수유, 30통의 식용유를 지급했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절대로 절대로 언론에 알리지 말라”

위의 세 가지 사건은 모두 베트남 중부지역인 쿠앙남성에서 1년2개월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연속되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에 대해서 남베트남 정부의 태도는 어땠을까. 또 한국군에 대한 현지의 민심은 어땠을까.

다낭시에 파견된 미군쪽 정치고문 제임스 맥(James F.Mack)은 1969년 4월25일, 주월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Nicholas G.W.Throne)에게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다. 제목은 ‘한국군 해병 제2여단이 1969년 4월까지 쿠앙남 지방에서 행한 활동개요’. 16종의 첨부문서가 붙은 이 보고서엔 ‘학살 의혹’뿐 아니라 당시 쿠앙남성에 주둔했던 한국군의 양태들이 묘사돼 있다.(28∼30쪽 기사 참조) 이 보고서는 한국군을 대단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제임스 맥의 보고서에 따르면, 69년 4월15일 사건 직후 그와의 인터뷰에 응한 쿠앙남성 디엔반현 현장 레 킴 부(Le Kim Vu)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성에 주둔중인 한국군에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라고 부탁하기가 꺼려진다. 마을로부터 사격을 당하면 1968년 2월12일 사건이나 그뒤 사건과 마찬가지로 주민을 모아놓고 그들 중 몇명을 보복사살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다시 1970년 1월로 돌아가보자. ‘한국군의 잔혹행위 의혹’과 관련해 급박하게 돌아가던 미 국무부-주월미국대사관-주월미군사령부 라인은 번개를 맞는다. 1월10일치 <뉴욕타임스>에 실린 재월 인문과학연구소 전 소장인 테리 램보(Terry Rambo)의 글 때문이었다. 람보는 이 글에서 “한국군이 수백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을 살해했고 주월미군사령부의 고위장성이 한국군에 대한 조사를 중단시켰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로저스(William Rogers) 미 국무장관은 즉각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한국군 관련사건에 관한 보고서가 절대로 절대로 언론에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주한미대사 포터(Porter)는 1월10일 로저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의 <동화통신>이 <뉴욕타임스> 보도에 대한 한국 정부 관계자의 반응에 관해 보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포터는 또한 다음과 같이 한국 내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청와대에서는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최규하 외무장관 등이 모여 긴급히 우리와 토의했다. 청와대는 한국 언론매체들이 이 이야기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포터 대사는 13일 뒤인 1월23일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또다른 전문에서 “1월22일 두명의 한국군 장교가 한국해병의 베트남 민간인학살 의혹 보도를 조사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출발했다”고 전하고 있다. 전문에 나온 장교 두명은 합참 작전참모부장 김여림 준장과 합참 정보참모부 무관 담당 김명희 대령이었다(33쪽 상자기사 참조).

어쨌든 미 국무부의 우려와는 달리 70년 2월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한국군의 잔혹행위 의혹’은 큰 논란이 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가 관련보도를 하는 등 ‘찻잔 속의 태풍’도 없지 않았지만 곧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뒤 ‘한국군 잔혹행위 의혹’과 관련된 모든 문서들은 비밀로 취급돼 30년 동안 기나긴 잠을 자야만 했다.

고경태 기자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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