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여성

마르크스의 딸 엘리노어의 비극적 죽음

칼 마르크스와 예니 폰 베스트팔렌 부부에게는 딸이 셋 있었다. 본래 딸 넷,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중 셋은 어려서 죽고, 예니(어머니와 이름이 같다), 라우라, 엘리노어 세 딸만 남았다.

예니와 라우라는 파리코뮌에서 활약한 프랑스 혁명가들과 결혼했다. 마르 크스는 딸들이 혁명가와 결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같은 일을 하겠지만,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윗감에 게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 혁명과 결혼생활을 병행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가족 특히 아내의 희생이 얼마나 커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마르크스의 헌신적인 아내 예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일년 뒤 큰딸 예니도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두달 뒤엔 마르크스가 눈을 감았다. 막내딸 엘리노어는 외로움에 시달리다 한 남자를 만난다. 런던대 학 의학부 출신으로 진화론의 신봉자요, 마르크스의 지지자인 에드워드 에이블링이다. 엘리노어가 27세 때였다.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에이블링이 별거중인 아내와 세 아이를 둔 기혼자였음으로 엘리노어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다. 단란 한 가정과 정숙한 숙녀를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던 그때, 기혼남자와 의 동거는 비난거리가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엘리노어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합이 그 어느 결혼보다도 진실하고 강건하다고 굳게 믿었다.

엘리노어는 정력적으로 일했다. 아버지의 사상을 미숙련 노동자들에게 가 르치고 아버지의 사상으로 그들을 단결케 하는 것이 엘리노어의 꿈이었다 . 그때 영국 노동운동은 숙련노동자들의 대규모 노동조합 중심으로 이루 어져 미숙련노동자들은 소외당하고 있었다. 1889년 결성된 ‘가스 및 일 반 노동조합’은 이런 엘리노어의 노력이 거둔 열매였다. 조합지도자 윌 손은 엘리노어에게서 읽기와 쓰기를 배운 사람이었다. 엘리노어는 가스 노동조합 집행위원이 되어 끝까지 조합을 위해 일했다.

엘리노어는 번역가, 통역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 어를 모국어처럼 말할 수 있었던 그는 훌륭한 번역가요 통역가였다. 당시 영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노르웨이 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을 영 어로 맨처음 번역한 사람이 바로 엘리노어다. 입센을 좋아한 그는 <인형 의 집> 속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엘리노어는 갑자기 죽었다. 1898년 43세의 나이였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 독. 검시관은 자살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몇달 뒤, 엘리노어의 죽음에 의 문을 제기하면서 그를 죽게 한 건 바로 에이블링이라는 주장이 일기 시작 했다. 놀라운 사실은 에이블링의 별거중인 아내가 벌써 6년 전에 죽었고, 그 뒤 에이블링이 에바 프라이어라는 24세의 여배우와 몰래 정식결혼을 했다는 거였다. 그러고도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와 한집에 살면서 같이 일 하고 같이 여행을 다녔던 것이다. 엘리노어의 갑작스런 죽음이 이런 남편 의 부정과 관련이 있지는 않았을까?

엘리노어는 죽어서도 외로웠다. 화장한 그의 유골을 에이블링은 거두지 않았다. 작은 항아리에 담겨 이곳저곳을 떠돌던 그의 유골은, 30여년 뒤 마르크스 일가의 무덤이 새로 만들어질 때 비로소 안식처를 얻었다.

엘리노어 마르크스는 영국 사회주의를 말할 때 반드시 꼽아야 할 사람이 다. 미숙련노동자들의 신조합주의운동 한복판에 그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 게다가 그의 죽음은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죽음이라고 할 만하다. 엘리노어 이후 영국에선 마르크스주의가 사실상 빛을 보지 못했다.

에이블링은 어찌 되었을까? 그는 엘리노어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새 아 내와 살림을 시작했지만 몇달 못살고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