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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국회의원이 한 거대 재벌그룹과 그 총수의 끝없는 욕망을 소재로 한 ‘소설’ <이씨춘추>(李氏春秋)를 펴냈다.
오성그룹 파워플랜은 실재하는가
지은이는 기아 출신의 이신행 신한국당 의원(서울 구로을)이고 정경유착 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대권(大權)을 거머쥐려고 정경일체를 기도하 는 주인공은 거대재벌 오성(五星)그룹과 그 총수 이근수 회장이다. 오성 그룹이나 이근수 회장은 가공의 이름이다. 그러나 소설은 첫 페이지부터 오성그룹은 삼성, 이근수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연상케 한다. 이근수 회 장의 상하이 발언과 New-First Program(NFP), 승용차사업 신규진출은 이 건희 회장의 94년 베이징 발언, 93년 신경영 선언, 삼성의 94년 승용차사 업 신규진출의 복사판이다. 인명과 지명, 사건내용 일부와 사건의 전후 맥락을 약간씩 바꿨을 뿐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연상시키는 대목은 그 밖 에도 부지기수다. 실제로 이 의원은 삼성을 염두에 두고 썼느냐는 질문에 대해 “부도덕한 재벌이 엉뚱한 야심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과 그 위험성 을 그렸을 뿐”이라고 확답을 피하면서도 “우리 현실에선 그런 기도를 한 재벌그룹이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다시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것 아니냐”고 여운을 남겼다.
관심을 끄는 내용은 오성그룹과 이근수 회장의 대권프로그램을 담은 이른 바 ‘파워플랜’. 대권장악 방법은 대권에의 직접 도전, 내각제에 의한 간접 도전, 상왕(上王)프로젝트를 통한 간접 집권 등 다양하다. 이근수 회장과 그의 최측근 4명으로 짜여진 비선조직 ‘신5인위원회’(new five) 는 끊임없이 파워플랜 현실화를 위해 그룹의 엄청난 자금과 조직을 가동 한다. 이 묘사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실명으로 나오는가 하면 실존하 는 인물과 사건이 연상되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렇다면 이 파워플랜은 현실 속에 실재하는 것일까. 이 의원은 이에 대 해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라며 넘어갔다. 그러나 그의 한 측근은 “전체적으로 픽션과 넌픽션이 3 대 7 정도 될 것”이라면서 “물증을 요 구하는 것은 처녀에게 민감한 부분을 보여달라는 것과 같다”고 얼버무렸 다.
이 의원이 기아자동차 부사장과 기산 부회장을 역임한 기아맨 출신이라는 점에서 소설 <이씨춘추>는 기아자동차 인수 음모를 주요하게 다룬다. 오 성그룹의 가야자동차(기아자동차) 인수 음모가 93년 새 정부 출범 이전부 터 추진돼온 것으로 묘사하며 그 전개과정에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저자는 특히 오성의 음모에 의해 마구 흔들리는 가야차의 운명을 이근수 회장의 대권장악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 다룸으로써 오성 이 회장의 부도덕성을 극적으로 강조한다.
현역 국회의원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특정기업의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책을 펴낸 데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이 많다. 잘못이 있다면 의정활동을 통해 드러내고 바로잡아야지 3류 소설 형식으로 법적 혹은 도 덕적 책임을 피하려 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이 의원은 이 부분에 대해 “우리 현대사는 일제와 독재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이어 이제 금융과 언론과 조직을 장악한 세번째 부당한 지배세력과 맞서야 하 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부도덕하고 야심에 가득 찬 거대재벌이 경제는 물 론 정치와 국민까지 지배하겠다는 엉뚱한 욕망을 가질 때 빚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이 <이씨춘추>를 쓰게 된 배경에는 삼성과의 깊은 악연이 깔려 있 다. 93년까지 기아자동차 부사장으로 잘 나가던 이 의원이 기산 사장으로 밀려난 데는 삼성의 기아차 주식 매집사건이 결정적으로 작용을 했다. 당 시 기아 안에서는 “영남 출신인 이 부사장이 삼성의 주식매집을 사전에 알고서도 묵인했다”는 말이 돌았다. 이 의원은 당시의 억울한 심정을 김 선홍 회장에게 “자살하고 싶다”는 말로 표현했을 정도라고 한다. 지난 95년 초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비판한 소설 <바벨탑의 제왕>을 쓴 사람도 이 의원이다. 그는 이번 책 발간 전에 기아 고위층에게 “의원직을 걸고 기아를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의원은 또 삼성에 대한 승용차사업 인가와 기아차 위기 등 국내 자동 차산업 전반의 문제를 다룰 이른바 ‘삼성 청문회’까지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신행 의원과 삼성의 깊은 악연
‘이건희 회장판(版) X파일’이라 할 수 있는 <이씨춘추>는 제2, 제3탄까 지 나올 예정이다. 이미 탈고를 끝낸 <이씨춘추> 2권은 이근수 오성그룹 회장 일가와 계열 금융사인 오성생명을 통한 위성재벌의 형성과정을 그리 고, 3권은 재벌문제와 경제민주화에 대한 종합판으로 예정돼 있다.
당사자인 삼성그룹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그룹과 총수의 이미지에 큰 상처를 받게 됐지만 섣불리 대응하면 도리어 <이씨춘추>가 노리는 ‘오성 =삼성’이라는 연상을 기정사실화할 뿐 아니라 “책 같지 않은 책”을 베 스트셀러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는 그러 나 “기아가 회생작전의 일환으로 경영부실의 책임을 호도하고 삼성에 떠 넘기기 위해 이건희 회장의 이미지 훼손에 나선 것”이라며 “내부적으로 이미 법적 검토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2일 제 1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