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07월03일 제 164호 한겨레21

켈로부대의 숨겨진 전쟁

(사진/켈로부대 출신들은 서로 신분을 알 수 없었기에 숨진 동료들도 제대로 봉안하지 못했다. 국립묘지의 유격부대 전적위령비에조차 이들의 활동은 나타나 있지 않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2년 1월. 홍성원(64)씨는 동료 대원 5명과 함께 인 민군복을 입고 있었다. 중국군의 병력규모와 이동상황 따위을 파악하라는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는 중국군 기지를 배회하며 일주일 동안 의 공작을 마쳤다. 이제 귀대라는 마지막 임무가 남았다. 철원군 아이스 크림 고지. 미군 기지가 지척에 다가왔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기분좋은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동료 대원 4명이 굉음 과 함께 고꾸라지며 그자리에서 숨졌다. 지뢰를 밟은 거였다. 홍씨와 다 른 동료 한명도 파편을 맞고 의식을 잃었다.


인민군으로 위장 북한지역에 침투

홍씨와 그의 동료들은 켈로(KLO·Korea Liaison Office·주한미군 연락사 무소)부대원이었다. 당시 한국전쟁의 지휘권을 갖고 있던 미군은 인민군 과 중국군에 대해 별다른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항공정찰만으로 군사 시설이나 군대의 이동상황, 규모 따위를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 든 시설과 무기가 위장되고 은폐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직접 북한지 역에 침투시키는 것이 첩보를 얻는 가장 확실했다. 그런 특수 공작임무를 맡고 있던 부대가 바로 켈로부대였다. 그들은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채 육상과 해상, 공중에서 북한지역에 침투해 미군이 원하는 정보를 수집했 다.

홍씨는 다음날 미군 제2사단 수색대에 발견돼 급히 의무대로 후송됐다. 파편에 맞은 허벅지가 작은 분화구처럼 움푹 패 있었다. 등허리는 한뼘이 나 잘려져 나갔다. 대수술을 거쳤지만, 부상의 후유증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40년이 넘게 불현듯 찾아드는 따끔따끔한 통증에 시달렸다. 3년 전, 할 수 없이 대학병원에서 재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그의 몸에서 40여년 동안 웅크리고 있던 3개의 파편을 꺼내 보여줬다. 그는 지금도 일 주일에 두차례 한의원을 찾아 치료를 받는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그는 몸의 통증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심하다고 한다 . 지뢰를 밟고 숨진 4명의 동료 대원들이 늘 눈 앞에 아른거린다는 것이 다. 지난 5월26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거행된 한국전쟁 전사자에 대한 위패봉안식에 참가하고 나서는 마음이 더욱 착잡해졌다. “대원들의 이름 도, 주소도 제대로 모릅니다. 첩보부대였던 만큼 포로가 될 경우를 대비 해 이름과 주소까지도 극비에 부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숨진 대원들을 위해 위패조차 봉안해 줄 수가 없지요.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 줄 방법이 하나도 없어요.”

켈로부대는 모든 군대 편제로부터 독립돼 있었다. 오직 맥아더가 사령관 으로 있던 미군 극동기지사령부의 지휘와 명령만을 받을 뿐이었다. 첩보 부대의 성격상 극비리에 특수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에 한국군과의 연계도 불가능했다. 철저한 비밀 속에 북한지역에 침투돼 ‘간첩임무’를 수행했 다. 적을 기습하고 무력을 행사하는 유격대가 아니라 적정파악과 정보수 집만을 담당하는 신경조직이었던 셈이다.

켈로부대는 북한이 고향인 월남자들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적지’에 투 입되는 만큼 그곳의 지리에 밝아야 했고, 말투나 행동에도 어색함이 없어 야 했다. 게다가 월남자들은 지주, 교사, 목사, 경찰 등 북한 정권 아래 서 이른바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감이 뼛속 깊었 으니 미군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다. 투항할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 은 태생적으로 첩보원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미군이 지휘·통제… 남한 출신도 자원입대

그러나 전황이 깊어지면서 부대원들 가운데 사상자와 실종자가 늘어났다. 결국, 미군은 남한 출신자들까지 켈로부대원으로 모집하게 된다. 서울의 영등포, 대구, 부산 등지에서 미군 첩보부대(CIC)가 ‘일할 사람’을 찾 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은 풍요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미군에 들어가면 최소한 ‘먹는 것’은 보장됐다. 깡패에서 아기 업은 아낙네에 이르기까 지 별별 사람이 ‘자원입대’하려고 모여들었다. 남한 출신의 한 켈로대 원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당시는 꿀꿀이죽도 배불리 먹지 못 하던 시절이었으니 먹여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지. 나도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도 모르고 자원입대했어. 미군들이 지원자들 가운데서 젊고 건장한 청년들만 추리더구만.”

처음 며칠 동안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단다. 먹을 것, 입을 것 어느 하 나 부족한 것이 없었고, 하는 일도 없이 자유롭게 내버려 뒀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짧았다. 얼마 뒤 죽음의 훈련이 시작됐다. 공수 낙하훈련은 그나마 편한 훈련축에 속했다. 철조망을 통과하는 훈련은 차라리 목숨을 내놓고 해야 했다. 땅 밑에 설치된 폭탄이 철조망을 통과하는 속도에 맞 춰 순차적으로 터졌다. 조금이라도 늦게 철조망을 통과하면 폭탄세례를 받는 거였다. 게다가 허리 높이에선 총알이 쏟아졌다. 몸을 일으키려야 일으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에 침투해 첩보활동을 하는 만큼, 모든 훈련은 철저하게 인민군식으 로 이뤄졌다. 인민군복을 입고, 항상 북한 말투를 사용했다. 군가도 인민 군가와 김일성 찬가를 불렀다. 제식훈련도 뻗정다리에 팔을 옆으로 흔드 는 인민군식으로 받았다. 훈련장에서 서로의 고향과 이름을 묻는 것은 절 대금기였다. 포로가 됐을 경우, 다른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훈련 이 어찌나 고된지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런 고된 훈련을 마치고 나야 북한에 침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백운학(71)씨도 이렇게 2개월간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서야 공작임무를 수 행하게 됐다. 51년 12월. 훈련에 지쳐 곤히 자고 있던 그의 어깨를 누가 툭툭 쳤다. 훈련을 담당했던 미군 대위였다. 미군 대위는 손짓으로 따라 나오라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어디론가 불려갔다. 거기에는 이미 40여명의 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낯익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2∼3일을 대기하고 있다가 어느 날 밤 6명씩 조가 편성됐다. 그리곤 미군에 의해 조장이 선정됐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훤했다. 육안으로 적합한 낙하지점 을 고르기 위해서는 노출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달빛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에게 낙하산과 인민화폐, 인민군 담배, 따발총 한자루, 인민군 계급 장, 그리고 위조한 인민군 신분증이 주어졌다. 각 조에 구두로 임무가 떨 어졌다. 백씨가 속한 조에는 “중국군의 보급로를 파악해 오라”는 임무 가 내려왔다. “당시 미군은 휴전선 근방으로 통하는 북한지역의 모든 다 리를 폭격했지. 하지만 여전히 보급이 이뤄지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항 공정찰만으로는 위장된 보급로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했거든.”


목숨 건 활동에도 ‘병역기피자’ 불명예

수송기를 통해 공작대원들이 투입됐다. 그가 속한 조는 낙하산을 타고 황 해도 홀동광산에 떨어졌다. 그곳에서 중국군이 주둔하는 곳을 걸어다니며 정보를 수집해 미군기지로 되돌아오는 거였다. 철원 월정리 부근에서 그 가 속한 조는 중국군의 보급로를 발견하게 된다. 강바닥에서부터 나무를 차근차근 쌓아올려 가교를 만들었는데, 수면 20cm 아래까지만 나무를 쌓 아놓았던 것이다. 그런 가교가 3군데나 보였다. “항공촬영을 하면 그런 가교는 그냥 강으로만 보이게 되지. 결국 보급로의 비밀을 알게 된 거야. 유엔군한테는 커다란 정보였지.”

철저하게 미군의 지휘를 받던 이들은 휴전이 성립되면서 미군과 충돌을 벌인다. 이미 침투해 있던 동료 대원들을 구출하자는 대원들의 움직임에 미군이 무전기를 압수하며 강한 거부감을 보인 것이다. 한정하(65)씨는 그때 막무가내로 미군에게 달려들었다. “미군이 아무리 우리나라를 위해 싸웠다고 하지만, 야속하더군요. 대원들이 끝까지 우기자 미군 당국도 한 발 물러섰습니다.”

결국 비공식적으로 공작반을 구성한 이들은 75일 동안 북한 장수산과 수 양산에 숨어 있던 무전통신반원들의 구출작전을 펼친다. 그러나 17명 가 운데 7명만 구출하고 10명의 부대원들은 북한 경비정에 발각돼 사살되고 말았다.

휴전협정으로 켈로부대는 해산됐다. 그러나 부대원들에게 안겨진 것은 ‘ 병역기피’라는 불명예였다. 모든 것이 비밀로 이뤄진 만큼 근무증명서가 있을 리 없었다. 첩보부대에는 군번과 계급도 없다. 모든 것을 미군이 주 관했으니 미군쪽이 자료를 갖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쪽이 ‘간 첩활동’을 공개할 리 없었다. 켈보부대원 중 상당수는 결국 군복무를 다 시 해야 했다.

아직도 이들의 가슴속에는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다. 지난 95년 6월부터 올해 5월26일까지 세차례에 걸쳐 모두 3천7백19기의 위패가 대전 국립묘 지에 봉안됐다. 한국전쟁 때 숨진 유격대원들의 위패를 봉안한 것이다. 그러나 켈로부대 특수공작대의 위패 봉안은 고작 24명에 그쳤다. 숨진 동 료 대원의 이름과 주소, 실종된 동료의 생사 여부를 알 길이 없기 때문이 다. 한정하씨는 그게 못내 안타깝다. “어찌나 비밀이 철저했든지, 최근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당시 같은 조로 투입됐던 대원이라는 사실 을 알게 됐어. 그러니 숨진 동료들을 위패로 봉안할 생각은 엄두도 못내 지.”


국가 무관심에 상처받은 노병의 자존심

최근 들어 이들 켈로부대 특수공작대 출신들이 베일에 쌓여 있던 자신들 의 활동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이들이 알음알음 수소문해 파악한 국내의 켈로부대원 생존자는 1백70여명. 대부분 고희를 바라보거나, 고희를 넘긴 노병들이다. 요즘 이들은 무공훈장을 받기 위해 관계당국에 협조를 부탁하러 다닌다. “우리의 활약이 뛰어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를 기억이라도 해달라는 노병들의 마 지막 자존심인 거죠. 음지에서 사지를 넘나들었던 대원들에게 국가가 해 도 너무 무관심합니다.” 켈로부대 출신 노병의 얼굴에 깊은 주름살이 잡 힌다.

이용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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