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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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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의 삶을 ‘찬미’한 소설가 이문열씨의 새 소설 <선택>이 문단 안팎에서 많은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와 함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의 한 사람인 공지영씨는 3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착한 여자>를 통해 이전의 소설에서 보기 어려웠던 모성과 여 성성에 대한 작가의 ‘새로운’ 인식을 드러내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한겨레21>은 이에 따라 두 ‘유명 작가’의 작품에 관한 논란을 계기로 페미니즘 문학이 처한 현실과 방향을 모색하는 좌담을 마련했다. 이 자리 에는 문학평론가 김경수(35)씨, 페미니즘 문화 계간지 ^<IF> 편집위원이자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의 저자 김신명숙(36)씨, 문화평론가 이성욱(37) 씨가 참가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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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명숙: 이문열씨의 <선택>은 공지영, 이경자 등 여성작가들이 여성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대한 이씨의 위기의식의 연장선에서 가부장적 권위
와 부권회복을 외치고 있다. 또 이전과는 달리 생활 속에서 복종·희생의
전통적 여성상과는 다른 여성상을 접하는 남자들의 일반적 ‘불쾌감’이
명퇴바람 등 남성의 위기상황과 맞물려 <선택>이 은근한 공감을 받고 있
는 것 같다. 하지만 <선택>은 2가지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제목이 <
선택>이라는 것, 즉 성·신분차별이 강고한 중세봉건사회에서 여성이 자
신의 삶을 선택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이냐 이고, 두번째는 남성의 입
장에서 ‘여성의 삶은 이러해야 한다’고 훈계하고 있는 점이다. 지금까
지 여성의 삶을 규정해 온 게 남성들이라면 ‘우리 삶은 우리가 결정하겠
다’는 게 페미니즘이다. <선택>은 소설이라기보단 보수적 남성의 입장을
대변한 정치적 선전책자다.
김경수: 이런 소설에 대해 문화·여성계에서 톤을 높이는 건 오히려 말려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선택>은 개인의 글쓰기 차원이지, 부권사회 위기에 대한 사회 일각의 진단이라고까진 보지 않는다. 반대로 공지영은 <착한 여자>에서 공동탁아를 대안삼아 제시했는데, 여자들도 페 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될 경우 이문열씨와 같은 우를 범할 수 있다.
균형잡힌 가족에서 여성문제 진단해야
김신: 페미니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뭔가? 이문열씨도 ‘오도된 페미니 즘’이라는 말을 썼는데 도대체 ‘오도된 페미니즘’이란 무엇을 말하는 가.
김: <착한 여자> 이전의 공지영이나 이경자 소설에 등장하는, ‘남편에게 밥상만 차려준 것은 절반의 실패’라는 입장은 작가로서도 절반의 실패다 . 이문열씨 옹호처럼 비쳐질진 모르겠지만 며느리라는 강제된 위치를 재 고해 보자는 인식은 왜곡된 것도, 오도된 것도 아닌 건강한 사고방식이지 만 일부 문학에서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시어머니는 폭군, 남편은 폭군의 종자 등 거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이 시대 여성의 문제를 짚고 싶다 면 균형잡힌 남편과 시어머니의 테두리에서 이야기를 끌어나가야지, 병적 인 남편, 폭군 시어머니 형태에선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다.
김신: 며느리 입장에서 보자면 시어머니에게 부당함을 느끼는 게 다수일 것이다. 문학에서 시어머니, 남편이 가해자로 묘사되는 것에 대해 호응하 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그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이를 오도 됐다고 한다면 ‘우리도 당신들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성욱: 우리 현대사회에서 성이든 계급이든 타자에 대한 이해노력이 많
지 않았다. 당위적 차원을 떠나 현실에서 그것을 이해한다는 게 어려워서
일 수도 있다. 특히 남녀처럼 고정된 포지션은 더욱 그렇다. 사실 <선택>
에서 비난하는 ‘오도된 페미니즘’이라는 건 존재한다. 그러나 <선택>의
가장 큰 약점은 페미니즘이라는 막대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아주 약한 상
대만을 골라서 공략한다는 점이다. 현재 페미니즘의 주된 흐름은 그런 공
격이 사정권으로 삼는 오도된 페미니즘 밖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지영
씨나 이경자씨의 이전 소설에서는 그 의도가 어찌되었건 소설에 나타난
방법론은 그런 비판을 받을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노동문학 초기를 보면
사장을 언제나 악인화시킨다. 현실의 복잡함이 빠진 도식화의 결과다. 공
지영씨나 이경자씨의 이전 작품이 그런 점을 닮았다.
남성 아우르는 페미니즘 문학의 출발점
김신: 여성들도 그런 형태의 문제해결 방식에 대해선 불만을 표시하는 사 람들이 많다. 우리 페미니즘은 이제 싹이 나는 시기다. 싹이 나니까 옆에 잡초도 나고 그런 것 아니냐? 초기단계에서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이라고 본다. 공지영씨가 <착한여자>에서 이제 모성을 내세우는 것도 그런 해석 이 가능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이른바 페미니즘 여성작가들의 소설이 남 성들이 읽기에도 완성도 있는 작품이 나오는 전조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
김: 페미니즘의 초기단계라는 표현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여성문제를 바 라보는 남성작가와 여성작가 모두의 극단적이고 편협한 시각은 페미니즘 과 무관한 작가들의 상식 문제다. 드라마 <애인>에서 여자 주인공의 남편 에게만 문제가 있었던 설정이 그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오히려 거꾸로 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김신: 그것이 여성차별의 상징이다. 가정생활이 원만한 여자가 혼외연애 를 한다는 건 우리 상식으론 엄청난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다. 드라마에 서 남자완 달리 가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여자가 바람을 피우는 걸 그릴 수 없는 건 사회적 지배가치의 암묵적 압력 때문이다.
김: 그건 지배가치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인생을 이해하는 힘의 문제다. 남편, 아이, 시어머니와 아무런 갈등요인이 없는 여자가 내부 드라이브에 의해 집 밖으로 나가는 심증에 대한 이해력이 작가에게 없기 때문이다. 김신: 아니다. 작가가 여론에 제한받기 때문이지, 작가 내부의 문제는 아 니다. 여성에게 가해진 우리 사회의 성적 족쇄를 푼다면 작가는 얼마든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가부장제도가 워낙 강고해 여성 다수가 가부장 의 식에 지배돼 왔기 때문에 남자나 여자나 아직 가부장제 가치관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
김: 가부장제가 존속됐을 때 여자는 피해자고 남자는 향유자였느냐? 남성 도 똑같은 희생자였다. 여성들도 몇몇 갈등 국면을 진단하려할 때 여성과 남성문제를 함께 재고해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
김신: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아직은 약하지만 민주주의가 신장되는 것처럼 앞으로 페미니즘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 그걸 어떻게 단언하느냐? 그것은 마치 자본주의적 적대 구조에 의해 역사는 당연히 발전할 것이라는 선형적 발전모델을 그대로 반복하는 듯하 다. 여성의 시민권 확보나 인권이 어떻게 될지 등등,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 낙관보다는 오히려 한국사회의 구체적인 조건에서 가능한 페미니즘 방법론 혹은 일상에 잠복되어 있는 문제들을 발굴하고 해결하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나 정책계발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적 형태’로 드러나는 문화적 억압에 대한 정확한 이해다.
김신: 여성들은 소수로 분산돼 있다. 그래서 페미니즘 운동은 정말 어렵 다. 이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예측, 믿음이 있어야 운동의 에너지가 나올 수 있다. 페미니즘이 결정론을 갖는 게 아니다.
김: 페미니즘 문학을 말하자면 이전 공지영의 문학세계와 비교할 때 <착 한 여자>에서 등장하는 모성에 대한 믿음, 포용력 등은 1차적으론 긍정적 으로 본다. 그러나 ‘모성이 더 안전하고, 여성이 모성을 더 잘 안다’는 환상은 모성신화에 빠질 수 있다. 공동육아도 똑같은 우를 범할 수 있다.
이: 그러면 지금 시기의 모성 형태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나.
김신: <착한 여자>에서 모성은 따뜻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묘사돼 있지만 모성에는 그런 성향 외에 강하고 투쟁적인 부분도 있다. 암캐가 새끼를 지킬 때를 생각해 보라. 하지만 여성에게 개인적 모성을 강조하면 전통과 연결돼 여성 개인을 부정하는 덫이 될 수 있다. 공지영 씨는 <착한 여자>에서 어머니로서의 모성만이 아닌 ‘사회적 모성’을 이 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경쟁적·파괴적·문화적 가치에 대한 대안 가치 로 소외된 사람에 대한 배려, 다양한 의견에 대한 존중 등이 바로 그것이 다. 부성적 가치가 파괴한 것들에 대한 치유의 한 방편으로 모성 가치를 주장할 때 그건 개인적 모성이 아닌 사회적 모성이 될 수 있다.
김: 그런 측면은 부성에도 있다.
김신: 모성, 부성을 가르는 건 잘못이다. 처음 애를 낳으면서 모성이 생 기느냐, 아니다. 아기를 키우면서 모성이 생긴다. 여성이 생래적으로 여 성성이 있는 게 아니다.
이: 그런데 모성 혹은 여성성을 자꾸 포용, 따뜻함, 착함 등의 은유로 강 조하는 것은 모성을 자칫 성본질주의나 개인의 퍼스낼리티 차원으로 국한 시킬 수도 있는 우려를 자아낸다. 모성이 만약 한 사회의 공동가치의 지 향점이 될 수 있으려면 모성의 특질이 은유적 차원만이 아니라 이론적으 로 그리고 사회조직의 형태로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논의가 모아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될 때 모성은 한 성, 다시 말해 여성의 특 징만으로서가 아니라 남녀 공히 지향해야 할 가치로 설정될 수 있다.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 지향해야
김신: 공지영의 페미니즘적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면 <착한 여자>에서 말 하는 그 모성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지영씨의 입 장이다. 공지영씨가 자기 생각을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제 모성부분 에 도달한 것이고, 그것을 페미니즘의 후퇴라고 보지 않는다.
김: 여성작가들도 여성답게 사는 게 뭐냐, 엄마되었다는 게 뭐냐에 대해 계속 논의해야 한다. 남녀간의 감정적 대립이 문학에서 그대로 표출되는 건 곤란하다.
김신: 그런 부분에서 이문열씨가 공헌한 부분도 있다고 본다. 이문열씨는 이 사회에서 여성스럽게 사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져줬다.
김: 서로가 다른 성에 대해 잘 알려는 자세를 갖고 선입관 없는 이해와 공존으로 나가야 한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최 근의 <아버지>, <선택> 등 계몽주의적인 톤으로 나가는 것은 문제다. 자 신의 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상대방 성을 이해하려 들 경우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삶에 성의 잣대를 들이대면 살아 남을 게 뭐가 있느냐?
김신: 페미니즘은 정치에서 성생활까지 인간 삶의 전 분야에 걸쳐 있다. 페미니즘이 ‘남자들 전부 잘못됐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공지영씨가 전에는 남성을 적대대상, 가해자, 기득권자로 보다가 <착한 여자>를 통해 모성적 가치관을 갖게 됐다면 그건 남성도 같은 피해자라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차별은 남성도 피해자로 만든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이 공유되기 힘든 우리 사회의 조건에서 그런 문 제의식을 가장 수월하게 이슈화하고 논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데는 역 시 문화예술 영역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퍅한 선전론의 수단으로 머물면 곤란하다. 물론 문화예술은 공동선의 대중적 환기를 위해 자신을 선전의 매체로 기꺼이 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때도 중요한 것은 주장이 아니라 설득력이다. <선택>이 불량품인 것은 반페미니즘 선전 방법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특별한 케이스를 내세워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강변 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꼭 페미니즘적인 틀로서만이 아니라 상식으로 보더라도 얼마든지 공분을 사는 남성인물을 등장시켜 그 것을 여성 억압이나 페미니즘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상징으로 삼는 것은 단순한 일반화의 오류에 가까운 것이다. 일상의 깊숙한 곳에 은폐되어 외 관으로는 여성 옹호적이지만 실상은 여성 억압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 그래서 사실은 인간 일반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하고 있는 대목 등을 포착하고 문제 삼는 것 등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아마 저같은 평균 적인 한국 남성은 그런 것에서 급소 찔려 아파하고 그런 것에서 성찰의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리 권태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