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
|---|
“진실로 걱정스러운 일은 요즘 들어 부쩍 높아진 목소리로 너희를 충동 하고 유혹하는 수상스런 외침들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 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 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이문열, <선택>)
“나 예전에는 왜 그렇게 내가 여자인 거 싫었나 몰라. 하지만 이젠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부드럽고 따뜻하고 조용조용하고 그런 거, 그건 너무 나 소중한 거야.”(공지영, <착한 여자>)
감정적 언사에 대한 문학적 대꾸
이문열(49)씨의 소설 <선택>이 유명해진 데에는 그 전체적인 주제에 못지 않게 위에 인용한 구절의 선정성이 큰몫을 했다. 소설의 초입에 나오는 이 구절은 마치 이문열씨가 <선택>을 쓰는 이유가 동료이자 후배 여성작 가인 이경자(49)씨와 공지영(34)씨를 공격하는 데 있는 것처럼 읽힌다. 이경자씨가 <절반의 실패>와 <황홀한 반란>을 쓰고 공지영씨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쓴 까닭이 이문열씨를 해코지하려는 것이 아니었 던 만큼 이문열씨의 감정적 언사는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자칫 문학의 범주를 넘어 사법적 심판의 대상으로 비화할 수도 있었을 `‘인신공격성’발언에 대해 이경자씨와 공지영씨가 자제력을 발 휘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아 마도 일찍이 작가 이문열씨의 `‘악명’을 높여준 바 있는 ‘`악령’시리 즈에 대해 당사자들이 침묵을 지킨 것과 마찬가지로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간접적일망정, 이경자씨와 공지영씨는 각각 새로운 장편소설 로 이문열씨의 공격에 응수를 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경자씨는 야심의 장 편 <사랑과 상처>를 계간 <실천문학>에 지난 겨울호부터 연재하고 있고, 공지영씨는 지난해 1년 동안 <한겨레>에 연재했던 장편 <착한 여자>를 두 권짜리 단행본으로 묶어낸 것이다.
이문열씨가 자신의 먼 조상 할머니의 삶을 소설화한 것과 비슷하게 이경 자씨의 새 소설은 작가의 친어머니의 생애를 소재로 삼고 있다. <선택>의 작가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사실임을 자처하는 기록)에 작가 자신 의 판단과 논평을 과도하게 덧붙이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사랑과 상처> 의 작가는 20세기 초중반에 한 여인이 부닥쳐야 했던 봉건적 성차별과 억 압의 실체를 차분하게 재현한다. 아직 연재중인 작품에 대해 섣부른 평가 는 금물일 테지만, 이 작품은 이경자씨의 페미니즘 문학의 한 절정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선택>에서 문제의 구절을 의식한 것은 아니겠거니와, <착한 여자>는 여 러모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비교된다. 우선, <무소의…>가 대 학을 졸업한 중산층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던 데 반해, <착한 여 자>는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평범한 여성 오정인의 삶을 소재로 삼 고 있다. <무소의…>가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을 뿐만 아니라 연극과 영화 로도 만들어지는 등 대중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한편에서는 이 작품의 `‘보편성’을 회의하는 시선이 없지 않았음을 상기한다면, <착한 여자>의 오정인은 여성억압의 현실과 그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몸부림이 단순히 `‘배운 여자들’만의 몫이 아님을 보여준 셈이다.
다음으로, <무소의…>의 결말이 한 여자의 자살과 다른 한 여자의 이혼이 라는 ‘`극단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幣� 여자>는 거기서 한 단계 나아간 결론을 내놓는다. 그렇다는 것은 주인공 정인의 삶이 <무 소의…>에서 제시된 이혼과 자살의 방식을 지나쳐서- 그것들을 넘어서- 계속 진행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무소의…>의 주인공들이 성적 억압의 현실을 고발하고, 차라리 이혼 또는 자살로써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반면, <착한 여자>의 정인은 어디까지나 그 현실에 몸담고 그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인 개인의 차원을 놓고 보더라도 이혼은 끝이 아니다. 소설은, 비록 명백하게는 아니지만, 정인과 그의 ‘평생의 연인이자 `보호자’인 명수와의 결합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끝을 맺는다. 여성문제 소설로서 <착한 여자>� 진정한 성취는 이혼과 자살기도 이후 정인이 새롭게 개척해나가는 삶의 내용에 있다. 밥 짓고 빨래 하며 아이 를 돌보는 등, 보통 여자로서의 능력말고는 다른 지적이고 전문적인 능력 을 지니지 못한 정인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실현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가. 그는 바로 자신의 여성적인 너무나 여성적인 품성과 능력을 통해 그 렇게 한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이름의, 탁아 및 취사 공동체가 정인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다. 따로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아이를 돌 보고 음식을 해먹을 시간이 없는 여성(과 남성)들을 위해 정인은 그들의 아이를 돌보고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따뜻 한 식탁을 차리고 싶다”는 정인의 반생에 걸친 꿈은, 비록 본래의 의도 에서는 조금 벗어났지만 제대로 실현된 것이다. 이혼과 자살기도라는 가 혹한 수업료를 치른 정인에게 있어 이제 `‘사랑하는 사람’의 범위는 세 상 모든 이를 포괄할 정도로 확대된다. 그러니, 그가 차리는 식탁은 역시 사랑하는 이를 위한 식탁이 되는 셈이다.
<착한 여자>의 이같은 결말은 어쩌면 <선택>의 작가의 `‘기대’에서는 벗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맨 앞의 인용문으로 돌아가 보자. <선택> 의 작가가 두 여성 작가에게 돌린 혐의의 내용은 남성 일반에 대한 끝없 는 적대감, 그리고 여성성 또는 모성의 포기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 데 <착한 여자>에서 공지영씨는 저 위대한 모성의 힘으로 남성들을 포함 한 세상 전체를 감싸안으려 하는 것이다. 앞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이 어진다. `‘사람이 사는 집’의 첫번째 고객이자 동지인 변호사 인혜가 정인을 향해 하는 이 말에는 <착한 여자>의 주제의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 다.
“언젠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도다, 하는 그 말… 예전엔 남자들이 강하고 날카롭고 떠들썩한 걸 로 여자를 지배해놓고 미안하니까 그냥 폼 잡고 하는 말인 줄만 알았는데 , 이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괴테가 정말 천재긴 천재인가 보다… 정 인씨, 어때요? 우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한번 다른 사람들하고 나누 어 보지 않을래요?”
여성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는가
후세를 생산하고 양육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보호하는 위대한 여성성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그 여성성과 모성의 사회화야말로 여성소설로서 <착 한 여자> 열어젖힌 새로운 차원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로 서, 그리고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공지영씨가 오랜 방황 끝에 이른 결론 이기도 하다. <착한 여자>의 출간에 즈음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공지영씨 는 이렇게 말했다.
“남녀 사이의 대립구도가 아닌, 남녀가 각기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두었다. 정인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전에는 여성적 부 드러움이 남성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괴테의 말마따나 여성적 부드러움의 힘만이 우 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문화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