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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1997년05월29일 제 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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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영화평론가
감독 데이비드 린치 출연 빌 폴먼, 패트리샤 아퀘트, 발타자 게티
움직일수록 더 깊이 빨려들어가는 늪처럼, 장면들의 전후 문맥과 의미를 따져 들면 들수록 영화는 점점 더 혼란스럽게만 보인다. 이성복 시인의 시구를 빌려 말한다면,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시공에 따른 온갖 합리성의 원칙을 거침없이 파괴하고 세상의 혼돈과 변 신의 욕망을 극한으로 몰고가는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는 무엇보다도 소유의 개념에 대해 도발적 사색을 제안한다. 무료한 낮, 열정의(그러나 어쩐지 고요한 느낌을 주는) 밤. 재즈 색소폰 연주자 프레드의 고여 있는 일상을 흔드는 두개의 의문이 있다. 먼저, 내가 없는 사이 아내는 어디에 있었나. 다음, 우리의 침실을 엿보는 자 누구인가. 공통점은 이것이 정체 성에 관한 물음(나의 아내는 누구인가)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물음(언 제 어디서 이런 짓을 하는가)으로 혹은 그 반대의 순으로 연결된다는 것 이다. 그리고 타자인 그와 그녀에 대한 의문은 슬그머니 자신의 자기 동 일성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지금 이 감옥 안에 갇혀 있는 나 는 도대체 누구인가.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프레드가 젊은 정비공 피트로 바뀐 것이다.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지만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시간 내내 출 구는 보이지 않는다. 보는 것은 아는 것이고 앎은 곧 소유로 통하는 근대 인식론의 프로젝트에 맞서, 우리가 보고 느낀 모든 것, 인식의 호주머니 에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이 경천동지할 만한 의문의 자계( 磁界)에 관객을 초대하기 위해서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아주 각별한 배려 를 기울였다. 나는 크게 세 가지 주제적 모티브에 눈이 끌렸다. 심야의 고속도로와 지속되는 텅 빈 화면 공간, 신비의 사나이가 그것이다. 오프 닝 장면은 범상치 않다. 캄캄한 밤, 길바닥을 비추는 두개의 불빛에 노란 중앙선들이 휙휙 지나간다. 누군가 빠르게, 그리고 하염없이 고속도로를 주행하고 있다. 즉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혹시 이 건 정지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달리면서 멈춰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 공간 말이다. 거기 누가 타고 있는가. 프레드? 피트? 주관적 시점 쇼트이 므로 이는 당연히 관객의 것이기도 하다. 자 이제 우리는 정신의 외출, 아니면 기행에 나섰다.
한데 앞이, 아니 옆이, 또 뒤가 보이지 않는다. 객석 주위와 똑같은 질감 의 어둠이 스크린에 사정없이 풀린 것인데, 차츰 엷어지면, 거기 있는 건 지나치게 단출한 공간이다. 너무 비어 있는 심리극과 누아르의 공간, 텅 빈 화면, 아무 단서도 주지 않은 간결한 희박화(Rarefaction)의 프레임. 린치는 힌트도 주지 않고 답을 알길 없는 괴로운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는 악랄한 교사같다. 물론 이건 심술이 아니다. 우린 그 안에서 이성의 좌표 를 잃게 하는 어려운 질문의 시간, 그 곤혹스런 분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집이 불에 타들어가는 장면, 마치 큰 숨을 들이마시듯 집이 연기와 불기 둥을 빨아들이는 그 장면에서처럼 관객은 서서히 시공이 뒤집어지는 체험 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도와주는 이가 신비의 남자다.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자기가 있지 않은 곳에도 있는 사람. 그는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그러니까 아내 살해범으로, 아무도 모르는 사람으로 변신하게 된 과정을 암시해 주 는 존재다. 부조리하고 때로 신비롭고 모호한 그런 세계의 기이한 면을 상징하는 존재…,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자꾸 헛웃음이 나오는 바람에 약간 애를 먹었다. 말도 안 될 천변만화의 변신을 듣고 자라온 동양인이 라서 그런 거였을까. 린치의 술래잡기 놀음이 그 순간 부터 어쩐지 싱겁 게 느껴지는 이유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