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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1997년05월29일 제 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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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모델 이승희의 금의환향을 두고 찬반론이 엇갈린다. ‘성 상품화의 첨병’이라는 비난이 있는가 하면 그를 ‘21세기형 전문적 여성’이라거 나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예찬도 있 다. 이승희 신드롬에 대한 찬반론을 보면서 이승희가 “벗는 일이 아닌 분야에서도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게 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전문성을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는 아이 기르 기와 몸 자체를 이용한 분야이다. 이 두 분야는 남성과의 경쟁이 필요하 지 않은 여성의 독점영역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육아는 출산이라는 생물학적인 조건과 성별분업이라는 구조 아래서 전형 적인 여성의 일로 남아 있는 분야로 ‘성공한 엄마’는 세계 어디서나 칭 송을 받는다. 몸을 이용한 분야는 아름다움의 대상물이 되거나 성적인 자 극 또는 쾌감을 주는 대상으로서 여성 전문성이 확보돼 있다. 자고로 예 쁜 여자들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여성 자신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누드모델로서 세계적인 성공에 대한 열광은 두번째 분야에서 여성의 전문 성을 인정해주는 남성중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예다. 이 승희의 성공을 개인적인 성공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 에 있다. 그의 개인적 자서전에 나타난 고난과 자신감, 절제력, 프로의식 , 재능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그는 분명히 훌륭한 자질을 가진 여성이 지만 성공한 누드모델이 제공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소비자가 누구인지 를 생각해보면 분명한 일이다.
더구나 한국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IPU 통계는 한국여성의 정치참여를 세 계 94위라고 보고하고 있으며 남아선호 사상으로 여아낙태의 관습이 성비 를 파괴한 지 오래이며, 얼마 전에는 ‘효부상’을 받은 여자가 남편에게 매맞아 죽었다. 이런 사회에서 할리우드에서 날아온 노랑나비가 던져줄 희망이란 그다지 신통치 않아보인다.
계몽주의가 사망신고를 낸 시대에 이승희를 반기든, 내치든 그것은 개인 의 자유일 뿐 논객이 관여할 일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이승희 신드롬을 논하는 담론에 포함된 이중성만은 가증스럽다. 실컷 탐닉하고 나서는 가 치가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는 이중성을 또다시 만나야 하는 일은 권태롭 다. 차라리 얄팍한 죄의식에서 나오는 사이비 경건주의의 탈을 벗고 범속 한 취향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가 훨씬 아름답다.
김효선/ 여성신문 편집부장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