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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1997년04월17일 제 1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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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고의 임금과 복지를 내세운 삼성그룹의 무노조 신화가 흔들리고 있다. 민주노총은 올해 상반기 안에 삼성그룹에 노조를 세우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모든 건전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발전하는 것에 나는 찬성합니다. 우 리는 세계에서도 가장 훌륭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난 87년 8월, 울산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울려퍼지던 이 연설의 주인공 은 불과 두달 전까지만 해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동조합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던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당시 회장)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97년, 현대그룹 산하 노조를 주력으로 해 성장해온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위원장 권영길)이 이번에는 자산총액 기준 국내 2위의 기업집단인 삼성을 상대로 노조설립 싸움을 걸고 나서 관심을 끌고 있다.
민주노총,‘삼성 노조건설 전담팀’가동
민주노총은 지난 3월 노동법 재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마자 “무노조 정책(삼성쪽에서는 이를 비노조정책이라 부른다)을 채택하고 있는 삼성 등 재벌그룹의 노조 설립을 올해 핵심사업 가운데 하나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선전포고다.
삼성쪽은 민주노총의 이런 방침과 관련해 “아직 노동자들 사이에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는 만큼 그룹 차원에서 특별히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성 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룹 전략홍보팀의 한 간부는 “삼성 노동자들은 노조가 없는 쪽이 복지 증진을 위해 오히려 낫다는 데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민주노총이 선전포고를 했다고 해서 무노조방침을 바꿀 생각은 없다는 얘 기다.
그러나 삼성쪽의 숨가쁜 움직임은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민주노총 의 한 간부는 “삼성쪽에서 여러 인맥을 통해 만나자는 요청을 여러 차례 해왔다”고 전했다. 생산라인을 시험가동중인 삼성자동차 임원들은 지난 3월 말 노조설립이 추진될 경우에 대비한 대책회의를 이틀 동안 갖기도 했다.
몇몇 계열사 소속 노동자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그동안 물밑에서 조 용히 움직여오던 ‘요주의 인물들’이 공공연히 몰려 다니는 모습이 요즘 은 자주 눈에 띈다고 한다. 삼성그룹의 한 고위관계자는 “삼성의 노사문 제가 언론에서 언급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곤혹스런 표 정이 역력하다.
민주노총은 이미 예고한대로 삼성그룹계열사가 있는 지역본부, 그리고 삼 성계열사와 같은 업종의 노조간부들로 `‘삼성 노조건설 전담팀’을 사업 장별로 꾸려, 최근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민주노총 이상현 조직국장은 “노동계의 총파업이 벌어지던 지난 1월 삼 성중공업 등 삼성계열사 5~6개 사업장 노동자 1백여명이 비밀리에 모여 사업장별로 민주노조를 결성하기로 결의했다”며 삼성 계열사 안에서 노 조결성을 위한 기초작업이 이미 상당히 진척돼 있음을 내비쳤다.
올 상반기중 삼성에 노조깃발 뜬다
그는 “이들은 조만간 실체를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것”이 라며 “이르면 상반기에 한두개 사업장에 노조를 결성할 수 있을 것”이 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삼성쪽의 대응도 결코 만만치 않다.
삼성은 그동안 “노조가 필요없을 만큼 회사쪽에서 알아서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며 무노조 원칙을 밀어부쳤다. 또 동종업계의 다른 기업보다 상 대적으로 더 많은 임금으로 노조설립 의지를 희석시키는 데 일단 성공했 다.
삼성은 올해도 사원들의 상여금 가운데 100%를 월급여로 전환시키는 방법 으로 그룹 산하 전자·화학 사업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간부 3.4%, 사원 6 .4%까지 인상해 3월부터 적용했다. 사원들의 경우는 지난해의 6.1%보다 높은 인상률이다.
지난 2월 재벌그룹 중 맨 처음으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고통분담 차 원에서 과장급 이상 간부의 임금을 동결하고 사원 임금인상률도 3% 이내 로 억제한다”고 선언했던 삼성이 변칙적으로 임금을 인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형적인 ‘당근작전’이 앞으로도 계속 삼성노동자들에게 먹혀들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많다.
우선 삼성그룹의 주력인 삼성전자가 국제 반도체가격의 급락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의 주된 요구가 최근에는 임금인상 보다 고용안정쪽으로 크게 기울고 있는 것도 노동자들에게 노조 건설의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노동계는 주장한다. 국제증권 시절 90%에 이 르는 가입률을 보이다 삼성에 인수되면서 지금은 가입률이 10%로 떨어진 삼성증권 노조 박형기(35) 위원장은 “자긍심을 위해서라도 노조는 필요 하다”고 강조한다.
아무튼 민주노총의 장담대로, 비록 소수의 조합원으로 출발할지라도 삼성 계열사의 노조 설립 움직임이 조만간 가시화될 경우 문제는 한층 복잡해 진다.
그동안 삼성이 무노조신화를 이어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근정책 못지 않게 ‘유령노조’와 ‘노조건설 추진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탄압’이라는 채찍이 수반돼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판 대회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삼성 계열사들이 단위사업장의 복수노조를 여전히 금 지하고 있는 개정 노동조합법 규정을 이용해 회사쪽에 우호적인 노조를 먼저 설립하고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조심스레 점친다.
그러나 그런 편법이 생각처럼 쉽게 통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지난해 8월 삼성중공업의 유령노조를 “적법한 노조라고 볼 수 없다”고 한 대법원 판결이 삼성쪽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얘기다.
당시 대법원 형사4부는 제3자 개입금지와 관련된 사건의 판결에서 “삼성 중공업 노조는 당국에 노조설립신고만 마쳤을 뿐, 조합원 수도 불분명하 고 조합비 징수나 총회개최·단체교섭 등 노조활동을 한 실적이 없으며, 근로자의 자유로운 가입도 방해해왔다”며 “이는 노조라 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재계, “무노조는 한갖 꿈일 뿐” 자평
이미 다른 재벌그룹 대부분이 노조를 허용하고 있는 마당에 유독 삼성이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노조설립을 가로막으려 한다면 그룹전체의 이미지가 크게 나빠질 수 있다는 점도 삼성의 행동반경을 제 약하는 요소다.
삼성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지난 87년 이후 노조와의 싸움에서 그동안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결국은 공존의 길을 모색해온 재계 관계자들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라는 협박조의 소망은 “역시 한갓 꿈에 불과했다”며 “삼성은 단지 늦게 시작하는 것일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남구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