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획-연 |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
|---|
(사진/연 날릴 준비를 하는 노유상 옹. 철책 너머 고향땅에서 연을 날리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바람이 꽤 매웠던 지난 1월30일 ‘연 할아버지’ 노유상(93·서울시 무형 문화재 제4호) 옹은 아침 일찍 한강 고수부지로 나가 오래간만에 연을 띄 웠다. 처음 세찬 바람에 비틀거리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던 연은 옹의 손 길이 얼레를 몇번 감았다 풀자 야생마가 길들여지듯 옹의 지시를 따르며 높이 솟구쳐 넘실넘실 춤을 췄다. 옹의 얼굴엔 검버섯이 짙게 피어 있었 지만 하늘을 나는 연을 바라보며 벙긋 웃는 얼굴은 어느새 아이처럼 변했 다. ‘평화통일’이라는 선명한 글씨와 연두색 모자 위에 그려진 태극 무 늬가 맥을 같이하며 연과 옹이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
8살 때부터 시작된 연과의 인연
‘한국민속연보존회’ 회장으로 평생을 연과 함께 살아온 옹은 아흔이 넘 은 나이지만 지금도 누가 부탁만 하면 손수 연을 만들어주고 연날리기 대 회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찾아간다. 요즘도 설날 행사를 위해 집에 서 연을 만든다. 기력이 예전 같진 않지만 연을 만들기 위해 한복을 차려 입고 머리를 빗은 채 자리에 앉으면 빠른 손놀림으로 금새 방패연 하나를 마술처럼 빚어낸다.
1904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옹의 손이 연줄에 처음 닿은 때는 8살 때 였다. 2남2녀의 둘째였던 옹은 형에게 “내 연 하나 만들어달라”고 며칠 을 조른 끝에 가오리연 하나를 얻었다. 그날 옹의 기분이야 설명해 무엇 하랴.
“얼음지치기, 팽이치기 등 다른 놀이는 다 땅을 쳐다봐야 했는데, 하늘 쳐다보는 건 연뿐이었지. 실을 길게 뽑으면 연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이 산 저 산을 오르내리는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 유년시절을 이 야기하는 옹은 절로 신이 났고 목소리에 힘이 더해갔다. 옹은 장연보통학 교에 입학해 연을 잘 만들던 담임 박건석 선생을 만나 연 만드는 법과 날 리는 법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내 연이 떴다 하면 다른 연들이 마구 달아났지. 동네 형들도 부리나케 실을 감아야 했지” 옹은 점점 신이 났다. 때론 멀리 이웃동네에서 떠오 른 연까지 끊어먹은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며 천진하게 웃었다.
평남 진남포상공학교를 졸업한 옹은 장연군청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나 193 0년대 중반 일제가 징용을 강화하자 1935년 31살 되던 해 중국 베이징으 로 가 그곳에서 해방되던 해까지 베이징상공회에 근무했다. 그때도 옹은 틈틈이 연을 만들었고 이국의 하늘에서 쓸쓸히 연을 띄우면서 고향 하늘 을 그렸다.
해방 직전 옹은 서안에 광복군이 설립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베이징에 있 던 조선청년 10여명을 그곳으로 보냈는데 이 사실이 나중에 베이징에 들 어온 일본군들에게 알려져 온갖 고초를 다 겪어야 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감옥에서 총살형을 기다리던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어서도 조선사 람들을 고국으로 보내는 일을 담당했던 그는 해방 이듬해 5월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1950년 46살의 나이에 육군사관학교(9기) 에 들어가 한국전쟁 때는 경기도 연천 최전선에 배치돼 대대장으로 북한 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그의 손 엔 연과 얼레가 떠나지 않았다. 가끔 전투가 멎는 날이면 진중에서 혼자 연을 띄웠고 그의 연이 뜨면 북한군들도 ‘노 대위가 연 띄운다’고 말했 을 정도였다.
그의 연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제대 직전인 55년이었다. 연을 유달리 좋아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연날리기 대회를 열 것을 지시했지만 일제시대 때 일본이 서울에서의 연날리기를 금지해 연을 제대로 띄우는 사람이 거의 사라졌던 때였다.
외국을 돌며 한국 연 맵씨 자랑
당시 신문로 옛 러시아공사관 빈터에서 연을 띄웠던 옹을 발견한 경무대 직원들이 대회 참가를 권유했고 물론 옹은 거뜬히 1등상을 차지했다. 이 것이 인연이 돼 이후 본격적으로 연을 만들어 보급하는 일을 맡았다. 전 국을 돌아다니며 연날리기 대회를 창설하고 초·중·고교, 대학을 돌아다 니며 우리 연에 대해 강의를 했다. 75년 이후엔 일본, 미국, 대만, 싱가 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홍콩 등을 초청방문해 외국인들 앞에서 우리 연날리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수많은 상과 감사패를 받은 옹은 9 2년 9월 서울시 인간문화재 4호로 지정됐다. 그리고 93년 ‘한국민속연보 존회’를 만들어 우리 연 보급에 마지막 생을 바치고 있다. 슬하의 자식 중 셋째 아들 노규성(43)씨가 옹의 뒤를 이어 연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 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연날리기에 대한 옹의 바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옹의 마지막 소원은 죽기 전에 고향땅에서 연을 날리는 것이다. 고향 황해도 장연은 임진각에서 40분 거리여서 옹은 명절 때만 되면 임진각을 찾아 철책 앞에 서 하염없이 북쪽을 쳐다보다 힘없이 돌아오곤 했다.
“정월이면 논밭과 야산, 들녘에 동네사람들이 죄다 나와 연을 띄워 파란 하늘이 보~옜었지. 고향땅 그 언덕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거기에 올라가 그때처럼 연 한번 띄워봤으면”
옹의 슬픈 눈은 어느새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심한 연은 연신 춤을 춰댔다.
권태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