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1997년01월16일 제 141호 한겨레21

도약의 전선에 선 대중음악

해가 바뀌었으니 사회 각 분야에서 한해를 결산하고 새해를 전망하는 일 은 언론에 기고하는 이의 책임이다. 그렇지만 그런 결산과 전망이 의례적 이고 상징적인 의미 이상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다. 해가 바 뀐다는 사실이 불확실한 시간의 흐름의 명징한 경계를 이루는 것이 아닌 바에야…. 어쨌든 유용하든, 무용하든 뒤를 돌아보고 앞을 짚어보는 일은 우리의 오랜 습속이다(하긴 우리가 하는 일 중 유용한 일이 얼마나 될까? ).

이런 빈축성 발언으로 글을 시작한 것은 대중음악계의 현 상황이 여러 가 지 골치아픈 문제들로 복잡하게 꼬여 있다는 주관적 판단 때문이다. 조금 만 그 바닥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대중음악을 둘러싼 조건들이 얼마나 ‘음악’과는 무관한 일들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알고 쉬 절망하게 마련이 다. 그래서 많은 ‘생각있는’ 이들은 곧잘 비관적이 된다.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진정 희망이 없나

가장 위력적인 매체인 TV와 라디오 등의 공중파 방송은 점점 더 시청률 혹은 청취율이라는 불문율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아가동산 사건에서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음반 유통구조의 복마전 같은 상황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수준에 와 있다. 클럽 등 공연장의 활성화는 아직까 지 관련 법규의 족쇄에 묶여 불법을 무릅쓰는 각오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음악인이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은 극히 협소하다. 외지에서 ‘행운의 도약’(lucky break)이라고 표현하는 길, 그러니까 중간단계의 수련없이 외부의 힘에 의존해 곧장 ‘스타’가 되는 길 말고는 어떤 다른 길도 실질적으로 봉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대중음악의 장르가 획일화되어 있는 현상은 이런 사회적 조건과 무관 하지 않다.

물론 이런 문제점들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까 하루아침에 개선될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어쩌면 문제점들을 지적하 는 말을 하고, 또 듣는 일도 지루해지는 단계에 접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경멸’이 최선의 윤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멸은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어도 해결하지는 못한다. 또한 대중 음악을 경멸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반면 다수는 이런 난맥상 속에 만들어 진 음악을 즐겨 들어왔고, 앞으로도 들을 것이다. 이를 ‘강요된 것’이 라는 식으로 몰아붙이기도 힘들다. 대중음악이 상업적 동기에 의해 제조 되었다는 점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이 사실이 특정한 음악이 ‘좋다’라 는 주관적 가치판단까지도 불필요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런 미 학적 가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대중음악의 비판가들, 그러니까 순수음악의 옹호자들은 대중음악이 사회 적 세력관계에 의해 규정받기 때문에 “가치없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세력관계를 초월하는 음악만이, 간단히 말해서 상업적 동기가 결정하지 않는 음악만이 가치있는 예술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견해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따 라서 여기서 시비를 걸 필요도 이유도 없다. 순수음악이 과연 사회적 관 계로부터 자유로운가라는 사실에 도전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대중음 악의 가치는 순수음악과는 다른 미학적 기준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지 적하고 싶을 뿐이다.


“상업적 연예도 예술적일 수 있다”

대중음악의 가치는 순수하게 음악적으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그 가치는 음악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회적 관계와의 긴장 속에서 가치가 부여된다 (혹은 박탈당한다). 따라서 ‘가치있는’ 대중음악인은 순수음악인(혹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인)과는 다른 옵션을 갖는다. 그들은 예술을 상업 적 연예로 만들고, 또한 그럼으로써 연예도 예술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인물들이다. 기성의 취향을 부정하지도 않고, 또 추종하지도 않는 일.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대중예술인은 예술인임을 부정함으로써 만 예술인이 ‘된다’.

수용자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그냥 들어서 좋으 면 그만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좋은’ 음악은 자연발생적으로 ‘그냥’ 들려오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존재한다. TV채널을 바꾸는 행위, 라디오의 사이클을 돌리는 행위, CD플레이어에 디스크를 거는 행위 , 나아가 ‘라이브’ 음악을 듣기 위해 공연장과 클럽을 찾는 행위는 좋 은 음악을 듣기 위한 의식적 행위이다. 거창하게 말한다면 ‘즐거움과 재 미를 위한 투쟁’이다. 가치있는 대중음악인은 이런 투쟁과 맞서서 승리 를 거둔 인물들이다.

그렇게 본다면 90년대 중반 한국대중음악의 상황은 특정한 취향, 특정한 세력이 승리한 잠정적 결과이다. ‘표절’과 ‘립싱크’에 대한 공격으로 상징되었던 이 경멸이 침묵하는 다수의 ‘관용’과 버겁게 겨루어야 했던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 특정한 세력, 즉 다수가 얼마나 ‘올바른가’라는 문제는 음악평론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소수의 강도높은 반발이 있다는 사실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징후이다. 만약 경멸이 문제를 해 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나쁜 음악에 대해 경멸을 퍼붓지 말고 저주를 퍼부어라”고 말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저주는 조금 다른 옵션을 요구한다.

첫번째 옵션은 현재의 조건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조건을 인정 하는 일로 시작하여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을 한 이 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나가서 화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립싱크를 하는 일이다. 이런 굴욕을 감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 ‘가요톱 10’으로 상징되는 히트 가요의 세계 및 그들의 성공의 윤리 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내가 그동안 뜬금없이 얼터너티브(혹은 인디펜던트)라는 수입 용어를 화 두로 삼았던 일은 이런 길을 우회적으로 찾아보려는 동기였다. 많은 이들 이 오해하고 있지만, 얼터너티브란 음악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태도나 신념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팝 스타(혹은 록 스타)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 그래서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 팬들과 비슷한 생활수준으 로 살아가겠다는 태도이다. 모순된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얼터너티브 음악 의 시장은 ‘비상업적’이다.

이런 태도가 지금도 타당한지, 그리고 여기의 상황에서 얼마나 가능한지 는 숙고해 볼 문제이다. 그렇지만 그런 조짐이 보인 것도 사실이다. 원종 우(배드 테이스트의 리더)는 평론가들의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 도의 첫 걸음을 내디딘 바 있다. 드럭이라는 ‘불법 공연장’도 유령회사 같은 인디 레이블의 이름이 되어 ‘그들만의 국가’를 선포했다. 황신혜 밴드를 주축으로 하여 ‘도시락’이라는 인디 레이블이 만들어질 거라는 소식도 들린다. 몇몇 대기업들도 별도의 레이블을 만드는 선심을 아직 완 전히 거두어 들이지는 않았다.


성공의 윤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물론 이들의 성과는 아직 초라하다. 댄스음악의 스타들에게는 우스워 보 이는 1만장이라는 판매고는 이들에게는 달성하기 힘든 수치이다. 이 정도 를 가지고는 팬들과 ‘비슷한’ 생활을 유지하기도 곤란하다. 이런 ‘비 상업적’ 시장이 얼마나 확대될 수 있을지가 올해의 대중음악의 발전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일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1997년은 정치게임이 계속될 전망이라고 한다. 나 는 그 전망이 들어맞지 않기를 바란다. 그 게임의 규칙은 몇십년 전부터 변경된 적이 없고, 따라서 게임은 성의없는 ‘리메이크 송’처럼 정말 하 나도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중음악의 경우에도 현재의 각개전 투가 전개될지는 몰라도 현재의 경기 규칙을 뒤집을 만한 획기적 사건이 도래하리라고 전망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전망도 들어맞지 않기를 바란다. 어쨌든 ‘즐거움과 재미를 위한 투쟁’은 지속될 것이니 까….

신현준/ 대중음악평론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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