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1
1997년01월16일 제 141호 한겨레21

당리당략이 국민을 버렸다

(사진/날치기 처리에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김염삼 쿠데타'라면 연대 농성을 벌였지만 보수표를 의식한 이 농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의 날치기 처리로 얼어붙은 정국은 새해 들어서 도 해빙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사회는 노동계의 총파업으로 온통 들끓고 있다. 정부의 도덕성과 개혁의지에 실낱 같은 기대를 건 상당수 국민들도 배신감에 등을 돌리고 돌아앉았다.

이처럼 극심한 후유증을 남긴 날치기 처리를 강행한 배경과 정치적 의도 는 무엇인가. 특히 여권 내부에서도 논란을 빚은 복수노조 상급단체 3년 유예는 누구의 작품인가.

복수노조 3년 유예는 친위 쿠데타?

날치기 처리의 총연출자 겸 지휘자는 두말할 나위 없이 김영삼 대통령이 다. 김 대통령이 두 법안의 동시 강행처리를 결심했다는 것은 이미 정기 국회가 폐회되면서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청와대 안에서는 “올해를 결 코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들이 나돌았고, “여론의 비난도 어차피 제 야의 종소리와 함께 묻히는 법”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 말마저 나왔다. 날치기 드라마의 총감독은 김 대통령이지만, 여기에는 조감독과 주연, 조 연들도 다수 등장한다. 또 등장 인물들끼리의 입장이 서로 달라 갈등을 겪는 등 그 속내는 다소 복잡하다. 신한국당과 청와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본 날치기 처리의 그림은 대략 다음과 같다.

김 대통령은 정기국회 막판 안기부법 처리 문제로 여야가 첨예하게 대치 하고 있을 무렵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에게 ‘특별 주문’을 한다. 즉 유 약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때로는 강단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정치인으로 서의 ‘장래’를 위해 좋다는 충고였다. 이때부터 이 대표의 행보는 눈에 띄게 ‘과격성’을 띠기 시작했다. 여권의 최대 난제는 안기부법 통과였 다. 사실 노동관계법의 경우 야권도 노사 양쪽의 눈치를 보느라 뚜렷한 대안을 내놓기 힘든 상태여서 합의처리가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 나 안기부법에 관한 한 국민회의의 입장은 완강했다. 신한국당도 애초에 는 안기부법 처리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당무회의에서 안기부법 개정안을 일찌감치 의결해 놓고서도 법안을 곧바로 국회에 제출하지 않고 , 서청원 총무에게 일임해 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신한국당의 소 극적인 태도에 대한 안기부 등 공안세력의 반발은 거셌다. “도대체 법안 을 제출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는 강한 불만이 여러 경로를 통해 신한국 당에 전달됐다.

정기국회에서 안기부법 통과가 무산된 뒤 서청원 총무와 박상천 국민회의 총무는 물밑접촉을 가졌다. 국민회의쪽은 1월 말까지는 노동법을 합의처 리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공청회도 세번쯤 치르기로 하고 대략적인 일 정까지도 잡아놓았다. 물론 그 전제는 안기부법 처리를 일단 뒤로 미뤄놓 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의 결심은 두 법안의 연내 강행처리쪽으로 이미 확고히 기운 상태였다. 때맞춰 신한국당은 자민련의 유종수 황학수 이재창 의원 과 무소속의 권정달 의원을 입당시킴으로써 ‘`거사’를 위한 ‘병력’도 충분히 확보했다.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을 96년이 저물기 전에 처리하겠다는 김 대통령의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지만, 복수노조 3년 유예 등 세부적인 사안까지 신 경을 쓴 것 같지는 않다. 청와대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관측도 “김 대통 령이 복수노조 3년 유예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몰랐던 것 같다. 당에서 그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하니까 그냥 추인한 것 아니냐”는 쪽이다. 이 런 점에서 복수노조 3년 유예를 ‘친위 쿠데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 즉 신한국당 내 보수적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드라이브하고, 청와대 안 의 복수노조 불가론자들이 ‘내응’해 전격적으로 해치운 것이라는 이야 기다.

복수노조 3년 유예 청와대 수석에까지 보안

신한국당쪽은 복수노조 설립문제를 매우 정치적으로 접근한 인상이 짙다. 즉 민주노총을 합법화한다고 해도 ‘여권표’가 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조강지처’인 한국노총이라도 건지는 편이 득이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또 복수노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온 재계의 치열한 로비도 주 효했을 것으로 보인다. 내부 여론조사 결과 새 노동법에서 국민들이 가장 불안하게 여기는 대목이 정리해고제로 나타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한국당이 정리해고의 사유와 절차를 다소 강화하면서 복수노조 3년 유예를 끼워넣은 것은 이런 여론조사를 감안한 결과로 보인다. 복수 노조의 경우 한 차례 푸닥거리만 하고 지나가면 그만이라는 것이 신한국 당 내부 판단이었다.

복수노조 3년 유예 문제를 놓고 이홍구 대표와 이수성 총리간에는 한차례 의견교환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이 총리는 “일년 정도는 모르지만 3년은 말도 되지 않는다”며 강한 반대 의견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한국당쪽은 청와대 주무수석으로 노동법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박세일 사회복지수석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박 수석은 복수노조 3년 유예 움직임을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귀띔받고 2 5일 아침 이홍구 대표에게 사실 여부를 물었으나, 이 대표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민 것으로 전해졌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박 수석은 26일 김 대통령을 만나 이 문제를 설득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26일 잠에서 깨어 보니 이미 `만사휴의였다. 국회 날치기 처리에 대해서 는 청와대 안에서도 이원종 정무수석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까마득히 몰랐다. 심지어 김광일 비서실장도 당일 새벽 전화로 통보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통령도 본질 몰랐다

그러면 김 대통령은 왜 이처럼 무리를 하면서까지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을 강행처리했는가.

먼저 안기부법의 경우 김 대통령도 이 법의 개정이 국가안보를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고 여기지는 않은 것 같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측근 인사는 “주변에서 필요하다고들 말하니까 따라간 정도 아닌가 생각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안기부 법 개정 경위를 보면 국가안보라는 거창한 목적보다는 오히려 안기부 다 독거리기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온다. 김 대통령으로서는 안기부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선거를 앞둔 중요한 시기에 안기부의 충성심을 확보하려 했 을 수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이번 날치기 처리는 내년 대선을 보혁구도로 이끌어가기 위한 포석으로도 해석된다. 안보와 경제에 대한 보수층의 불안심리를 달 래고 이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껴안으려는 전략이다. 여기에 대야 강공드 라이브를 통해 여야 긴장국면을 조성함으로써 당내 결속을 다지고 권력누 수를 막으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청와대와 신한국당 관계자들은 날치기 처리 직후에는 희색이 만면했다. 그러나 날치기 처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예상외로 높고, 노동계의 반발강도도 매우 거세자 당혹해하는 모습이 역 력했다. 청와대 관계자들 중 일부는 “파업 대책도 당이 한번 세워보라고 하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정부 일각에서도 이번 날치기 처리가 돌이킬 수 없는 ‘악수’였다고 ‘ 자아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정부로서도 노동계의 파업은 어차피 한번은 넘어야 할 고비라고 보지만 문제는 파업 이 진정된다고 모든 게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며 “근로자들의 노동 의욕이 저하된 상태에서 과연 경제가 좋아지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김종구 기자/ 한겨레 정치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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