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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1997년01월16일 제 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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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삼성의 기흥반도체 공장. 취약한 기술구조는 반도체업계를 96년 메모리값 폭락 한방에 휘청이게 했다.)
경상수지는 한 나라의 상품과 서비스 무역의 결산이자, 그 나라 산업경쟁 력의 판단지표라 할 수 있다. 이런 경상수지가 96년에 11월까지 2백16억 달러의 적자를 냈다. 12월치까지 더하면 연간 적자규모가 2백30억달러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교역규모는 세계 10위권 문턱도 넘지 못했는데, 경 상수지 적자규모는 미국에 이어 세계 2∼3위를 달리고 있다. 국내총생산( GDP) 규모에 비교한 경상수지 적자 비율도 4%를 넘어, 국제통화기금(IMF) 이 위험선으로 보는 5%에 거의 근접했다.
가구당 8백만원 외채 진 셈
경상수지 적자 확대와 동시에 금융시장 개방으로 기업들의 해외차입이 크 게 늘어나면서 외채도 계속 쌓이고 있다. 총외채는 96년중 2백억달러 이 상 늘어나 잔액이 1천억달러를 넘어섰다. 4인 가족 기준으로 가구당 8백 만원 이상의 빚을 외국에 지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97년에는 적어도 연간 60억달러 이상의 외채 이자가 고스란히 경상수지 적자요인으로 더해 지게 된다.
경상수지 적자와 외채로 본 이같은 96년도 한국 경제 성적표는 국민 모두 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외국과의 거래에서 적자가 커지면서 빚이 늘어만 가니 위기감을 갖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러다가 한국 경제 가 파산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할 만하다.
무엇보다 경상수지 적자가 늘어나는 속도가 너무 가파르다. 94년 45억달 러, 95년 90억달러, 96년 2백30억달러.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적자가 불어나고 있다. 97년에는 적자폭이 96년보다는 좀 줄어들 것이라고 정부 는 설명한다. 그러나 누가 장담하겠나. 95년 말에도 정부는 96년의 연간 경상수지 적자가 95년보다 적은 60억달러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적자의 내용을 뜯어봐도, 그동안 수없이 거론돼온 한국 경제의 고질병들 이 그대로 온존돼 있어, 개선의 전망을 갖기 어렵게 한다. 메모리 반도체 에 이어 세계시장에 내놓을 차세대 대표상품이 부각되지 않고 있다. 수출 이 안 되는 만큼 수입을 줄이려 해도 외국, 특히 일본에 대한 중간재와 자본재의 의존도가 매우 높아 수입을 획기적으로 줄일 방법이 없다.
또 80년대 이래 재벌들이 주도해온 현재 수출 주종품목들의 수출전망이 그리 좋지 않다. 반도체의 경우 96년에 가격폭락으로 인해 11월까지의 수 출이 1백64억달러로 95년 같은 기간에 비해 17.7%나 줄어들었다. 97년에 도 95년 수출실적의 80%를 넘기면 다행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석유화학과 철강의 올 수출전망도 낙관적이지 않다. 자동차가 96년에 연 간 수출실적 1백만대를 돌파했다고는 하나, 수출증가율은 95년 41%, 96년 13%, 97년에는 10% 이하로 계속 낮아지는 추세다.
이같은 회색빛 수출전망에 따라 내년도 경제성장률 전망도 어둡다. 한국 개발연구원(KDI)과 민간연구소들은 경제성장률이 95년 9%, 96년 7% 전후 에 이어, 97년에는 5.9∼6.7%로 한 단계 더 내려앉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97년의 세계경기는 96년보다는 적어도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 다. 96년에 한국 경제를 괴롭힌 엔저현상도 97년에는 완화될 가능성이 크 다. 대외여건이 이처럼 호전될 전망인데도, 왜 유독 한국 경제만 불안한 전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반도체값 폭락의 뼈아픈 교훈
지난 봄 반도체 쇼크 이후 계속 심화하고 있는 수출부진과 경상수지 적자 확대가 단순한 경기순환상의 불황현상이 아니라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밖 에 없다. 호황에 묻혀 있던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이번에 겉으로 한꺼번에 드러난 것이다. 한국의 산업은 아직 제대로 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게 틀림없다. 80년대 후반의 3저호황과 90년대 초반의 반도체 특수가 그동안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시각을 갖고 대책을 강구하는 모습을 보여주 었다. 그러나 정부는 산업경쟁력의 여러 측면 가운데 당장 눈에 보이는 가격경쟁력을 개선하는 데 대책의 초점을 맞추는 한계를 드러냈다. 나웅 배 부총리의 뒤를 이어 경제정책의 지휘봉을 잡은 한승수 부총리는 이른 바 ‘10% 경쟁력 제고대책’을 내놓았다. 골격만 요약하면 정부가 공장용 지값, 물류비, 금리 등을 낮출 테니 기업은 과감하게 임금억제에 나서 수 출상품의 해외시장 판매가격을 낮추자는 것이었다. 재계는 이에 화답하듯 가을부터 총액임금 동결이니 명예퇴직 확대실시니 하며 인건비 절감노력 을 과시했다.
그러나 은행금리를 낮춰도 시중 실세금리는 오른 데서 보듯 체질화된 고 비용구조의 해소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수출상품값 낮추기만으로 수출이 촉진되고 경상수지 적자가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설득력을 더 해가고 있다. 임금을 아무리 억제해 봐야 베트남이나 중국만큼 낮출 수는 없는 노릇이고, 금리를 아무리 성공적으로 떨어뜨린다 해도 자본잉여국인 일본만큼의 저금리를 실현시키긴 어렵다.
그렇다고 가격이 아닌 기술력을 높이고 수출상품의 고부가가치화를 이뤄 야 한다고 말해봐야, 학교교실에선 정답일지 몰라도 현실에선 이 역시 지 난한 일이다. 무엇보다 이런 질적 경쟁력을 기를 수 있는 연구개발투자가 미약하고, 주요 산업부문들을 재벌들이 독과점하고 있는 경제구조로는 기 술혁신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 따르면 삼성전자 등 한국 10대 기업의 95년도 연 구개발투자 총액은 39억7백만달러로 94년 일본 히타치제작소 1개사의 36 억7천5백만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미국 제너럴모터스의 70억 3천6백만달러에 비해서는 56%에 지나지 않는다.
투자자금 규모가 작다면 뭔가 민첩한 기술개발의 기획능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미덥지 않다. 반도체업계의 경우 이미 수년 전부터 메모 리 반도체만으로는 국제 반도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지적을 받아 왔으나, 메모리 호황에 취해 비메모리 기술개발에 소홀했다. 그 결과 국 내 반도체업계의 메모리 대 비메모리 사업비중은 9 대 1 정도로 메모리쪽 에 편중돼 있다. 96년 메모리값 폭락 한번에 반도체업계가 휘청거린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일본의 반도체업계는 이 비중이 4 대 6 정도의 균형을 이미 이루어, 이번 반도체쇼크 때도 안정적인 수익을 유지했다. 대만은 우리보다 10년 정도 늦게 반도체 투자에 나섰지만 주문형반도체(ASIC) 등 비메모리 분야 기술력에서 우리보다 앞서 달리고 있다.
‘문민정부’도 흐지부지 넘긴 재벌개편
국내 산업기술 자체의 취약한 경쟁력은 기술무역의 적자가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 95년에 우리나라가 기술을 수출하고 벌어들인 로열티 수입액 은 1억1천2백만달러, 기술 수입에 따른 로열티 지급액은 19억4천7백만달 러로, 기술무역 적자가 18억3천5백만달러에 달했다. 그나마 수출된 기술 들은 동남아에 저급기술을 판 게 대부분이다.
재벌들을 내세워 기술·부품·기계를 사와 국내에서 조립·가공만 해서 수출하고 여기서 가공임 정도만 받아 재벌들 재산도 불리고 노동자들 임 금도 지급하는 식의 경제로는 더이상 버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같은 단순조립형 산업구조의 실상은 국내 제조업의 중간재 수입의존도 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업계의 한 통계에 따르면 기술도입료와 부품수입 을 더한 금액이 총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자동차는 30%, 노트북은 7 5%에 이른다. 반도체업계의 핵심장비는 80% 이상, 핵심재료는 65%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산업구조로 인해 경기가 활성화되고 수출이 늘면 수입도 따라 늘어 수출증가에 의한 경상수지 개선효과가 잠식돼 버린다. 뿐만 아니라 중소 기업이 담당해야 할 국내 자본재 및 중간재 산업의 성장토양이 갈수록 척 박해진다. 게다가 수출산업의 해외시장 의존도가 높아, 임금은 내수로 되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조립생산 단계의 비용에 그치게 된다. 최종 조립단계에서 수출상품을 만드는 재벌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임금이 오른 다는 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70년대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처음 거론될 때 그 명분 가운데 하나는 수입 에 의존하던 자본재와 부품, 중간원료의 수입대체를 통해 국제수지 개선 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70년대 말 오일쇼크 이후 80년대 들어서 부실기업을 재벌에 인수시키고, 외화대부를 비롯한 정책자금을 여신한도 관리대상에서 제외해주는 등 재벌에 기대는 식의 경제대책이 남발되면서 중화학공업 육성의 본래 뜻이 바래고 말았다. 대신 재벌들은 이를 몸집 불리기의 도약대로 삼았다.
재벌들은 86∼89년의 이른바 3저 호황기에 막대한 투자수익을 올렸으나 기술개발은 등한시한 채 부동산투기에 몰두했고, 사업구조 조정과 기술력 배양의 시기를 놓쳤다. 재벌들은 상호 주식보유, 계열사간 내부거래 등을 통해 경쟁력이 없는 한계사업 부문까지도 온존시킴으로써 경제전반의 효 율적인 산업구조 조정을 저해하는 장벽이 되고 있다.
김영삼 정부도 출범 초기에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재벌체제를 개별 기업단위의 전문화쪽으로 개편해나갈 것을 천명했으나, 결국 흐지부지되 고 말았다. 재벌들의 힘이 벌써 막강해져 신재벌정책 등 자신들에게 불리 한 정책방향이 제시되면 고의적인 투자기피 등 이른바 ‘자본파업’과 고 용불안 조성 등 갖은 방법으로 이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경쟁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96년에 심화한 이번 불황기의 전개과정에서는 이처럼 ‘기술 없는 재벌경 제의 성장한계’가 부각되고, 어떤 형태든 이에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는 데 대해 상당폭의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는 재벌 계열사간 채무보증 완전해소 방안을 포기하고 재벌에 대한 연결재무 제표 작성 의무화 방안을 거두어들이는 등, 이와 반대방향으로만 치닫고 있다.
지금 단기적인 불황 탈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장기적인 성장능력 배양 이 필요한 시점이며, 우리에게 내세울 만한 경쟁력의 원천이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자문할 때이다. 일본은 살인적인 엔고를 별다른 고용불안 조성 없이 경영합리화를 통해 극복하고, 우리보다 3배 가량 더 높은 고임금 속 에서도 세계적인 산업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고비용 구조가 부분적으로 불가피하다면 이를 받아들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찾아봐야 한다. 적극적인 기술개발, 기계·부품산업 등 중소기업 기반의 확충, 재벌구조 의 효율적 개편 없이 임금이나 깎자고 하고, 환율 타령만 하고 있어서는 한국 경제의 미래는 계속 암담할 수밖에 없다.
이주명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