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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1997년01월16일 제 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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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은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로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국민들은 향후 5년 동안의 정치적인 결정권을 위임할 대통령을 직 접 뽑아야 한다. 국운을 좌우할 중요한 정치행위인 것이다. 새로운 선택 은 새로운 ‘가능성의 희망’을 갖게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이러한 상식 에 비추어 보면 이번 대선은 국민에게 신바람나는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 과연 그럴까?
대통령 새해인사의 허구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해 12월27일 <신한국당보>를 통해 새해인사를 했다. 대선이 있는 해의 정치전망과 관련한 첫 언급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 다.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제적 도약과 튼튼한 국가안보는 정치적 안정없이는 이룰 수 없다. 분 열과 갈등, 반목과 투쟁의 낡은 정치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야 하며 깨끗하고 생산적 정치로 국민들이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국민생활의 안정을 확보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민생정치, 생활 정치가 보편화돼야 한다. 국민에게 다가가는 정치,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비전있는 정당, 국가발전을 위해 국민을 통합하는 정치가 돼야 한다.” 국가의 최고통치권자가 한 이 말을 들은 국민들은 과연 희망을 가졌을까? 역사의 시계를 멀리도 갈 필요없이 24시간만 뒤로 돌려보자. 김 대통령이 총재로 있는 신한국당은 지난 12월26일 오전 6시 단독으로 본회의를 열어 안기부법 개정안과 노동관계법 개정안 등 11개 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엔테베 기습작전’에 버금가는 신속한 날치기 처리였다. 분노한 야당은 강력한 대여투쟁을 선언했다.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3당합당 이후 24번째인 오늘 새벽 날치기 처리는 문민쿠데타로서 현 정부가 문민에서 독재로 U턴하는 분기점이라고 규정한다”며 “이번 날치기 처리는 원천무 효이므로 자민련과 연대, 강력한 무효화 투쟁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분 통을 터뜨렸다. 여야가 ‘전면전’에 돌입한 것이다.
김 대통령이 강조한 “정치적 안정없이는 경제적 도약과 튼튼한 국가안보 는 있을 수 없다”는 ‘국가운영 철학’은 이미 하루 전에 깨져 있었던 것이다. “분열과 갈등, 반목과 투쟁의 낡은 정치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 라져야 한다”는 김 대통령의 주장이 ‘날치기’가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여당의 날치기 처리로 노동계는 ‘총파 업’으로 맞섰다. 국민생활은 일대 혼란으로 빠졌다. ‘삶의 질을 향상시 키는 민생정치 생활정치’, ‘국민에게 다가가는 정치’, ‘국가발전을 위해 국민을 통합하는 정치’라는 비전제시도 하루 전에 이미 의미를 상 실해버린 상태였다. 12월27일자 <한겨레> 경제기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
“26일 정부의 노동관계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따른 정국불안으로 종합주가지수가 93년 2월25일 문민정부 출범일 주가(655.61)에 바짝 근접 하는 증시대폭락이 발생했다. 특히 이날 끝장 무렵인 오후 3시께에는 655 .54까지 떨어져 ‘문민정부 주가’가 한때 무너지기도 했다. 이날 증시에 서는 신한국당의 기습처리에 항의해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총파업에 돌입 하고 야당이 강력 반발하는 등 정국불안이 야기되자 투자심리가 꽁꽁 얼 어붙어 주가지수가 18.75포인트 하락한 659.01을 기록하며 또다시 연중최 저치를 기록했다. 이는 문민정부 출범일 주가보다 불과 3.40포인트 높은 수치다.”
소신 없는 대선 예비주자들
기존의 안기부법은 김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개혁의 상징처럼 ‘극찬’ 을 아끼지 않고 고친 법이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개혁의 결과물을 ‘ 날치기’라는 비민주적인 수단을 통해 자신의 손으로 과거로 ‘원위치’ 시켜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정치현실을 지켜봐야 하는 국민들이 과연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12월28일로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치러야 하는 국민들이 ‘ 중대한 정치적 행위’를 앞두고 희망보다는 좌절을 더욱 강하게 맛봐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이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들쭉날쭉 정치행위’가 대선을 겨냥 한 전술에서 비롯됐다면 국민들의 좌절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국 민의 선택’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 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치권은 대선을 앞두고 국민들을 ‘내편 네편’으 로 편가름을 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날치기 다음날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는 “민주노총 지지자들이 내년 대선에서 우리 당을 찍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선전략에 비추어 날치기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는 판단을 이미 한 것이다.
역사의 시계를 조금만 뒤로 더 돌려보자. 지난 12월19일 최각규 강원도 지사와 유종수 의원(춘천을), 황학수 의원(강릉갑)이 자민련을 탈당했다. 유, 황 의원은 24일 곧바로 ‘신한국당행’을 선택했다. 자민련 이재창 의원(경기 파주)도 25일 신한국당 의원으로 변신했다. 이들 가운데 대부 분은 야당 당적을 갖고는 정치하기가 힘들었다는 해명을 곁들였다. 이러 한 변신은 ‘국민의 선택’을 왜곡시켰다는 점에서 정치적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이들은 지난해 4·11총선 당시 그토록 격렬하게 비난했던 신 한국당 의원으로 간단히 변신한 뒤 ‘날치기’에 동참함으로써 스스로 자 기모순에 빠져버렸다. 여당을 견제하기 위해 야당을 선택한 국민들을 좌 절케 만드는 두번째 이유다. 이런 정치인은 이런 정치인이라 치자.
이른바 대선 예비후보들의 ‘무소신 행태’도 ‘대선의 희망’을 깎아내 리고 있다. 의회정치를 무시한 ‘날치기’ 행위에 대한 그들의 침묵을 국 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날치기’의 주역으로서 신한국당 대 표를 맡고 있는 이홍구 의원을 제외하고는 이회창, 박찬종, 이한동, 최형 우, 김윤환 고문과 김덕룡 의원 등은 정치권을 혼란속에 빠뜨린 ‘날치기 ’에 대해 자신있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들도 김 대통령 의 지시에 따라 날치기 처리를 위해 찬성표를 던졌을 뿐이다. 이회창 고 문만이 국민들의 반발에 곤혹스러워하며 자신의 입장표명을 우회적으로 했다. 그러나 ‘양비론’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그대로 드러 낸다.
이처럼 중대한 정치현안에 대한 입장표명을 자신있게 하지 못하는 ‘후보 ’들을 어떻게 ‘선택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까.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 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철학이나 현안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밝 혀 국민으로부터 정치적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상식에도 못 미 치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갖지 못하는 세번째 이유다.
비전 안 밝히는 ‘DJP 연합’
야당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야당에서는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연합 ’이 화제다. 정치적 이념과 노선이 다른 두 정치인이 정권교체를 위해 후보단일화에 나서겠다는 얘기다.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권교체’라는 화두 이외에는 다른 정치적 비전이 담겨 있지 않기 때 문이다. 국민들이 현 집권세력의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분명 한 정치철학과 노선이 보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누가 후보로 나설 것인가와 내각제 개헌론만이 두당 사이에서 은밀히 논의되고 있다는 얘기 만 들린다. 무슨 정치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나오는 얘기가 없다. 주권자인 국민들은 선거를 앞두고 ‘깜짝 놀랄 준비’만 하고 있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자칫 잘못하면 또다시 정권쟁탈을 위한 정쟁만이 판칠 수도 있다는 우려 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대선이 고도의 정치예술이 아니라 어 쩔 수 없이 여당이나 야당을 ‘찍을 수밖에 없는’ 유권자들의 숫자놀음 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지역감정이 커다란 몫을 할 것 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곁들여지고 있다. 국민들로 하여금 대선을 즐겁게 기다리지 못하게 만드는 또다른 이유다.
이처럼 새로운 전망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대선은 국민들의 희망을 실은 ‘선택의 장’이 될 수 없다. 국민들은 권력다툼만이 판을 치는 ‘대권전 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정치’를 선택하기를 원하기 때문 이다.
비전 없는 대선은 희망이 없다는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정치권은 변화 로 응답해야 할 때다.
김용성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