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박형준/ 동아대 교수·사회학
1997년01월16일 제 141호 한겨레21

한국의 절망/ 새로운 리더십 절실하다

우리 국민은 낙관주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우 리나라의 미래에 대해 “잘될 것이다”라고 보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다. 독일에서 공부한 한 교수가 이런 독일 유머 를 소개한 적이 있다. 20층에서 자살을 기도한 사람이 2층 정도까지 떨어 졌을 때 한 기자가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지금까 지는 잘 나가고 있습니다” 했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도 수십년간의 이른바 압축비약형 고도성장 속에서 “발전의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경제상황 등이 좋지 않을 때 입으로는 위기를 외치면서도 내 심으로는 얼마 안 가 다시 고도성장의 궤도에 올라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 다.


선진국 되려면 시스템 바꿔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위기를 엄밀히 진단해보면 다시 잘될 것이 라는 낙관주의 또는 경기불황에 대한 호들갑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 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3중의 복합과제가 우리 앞에 버겁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선진화의 과제다. 근대화를 통해 후발국에서 중진국으로 발돋움하 는 과정이 지난 30여년의 발전이었다면, 이제는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제를 국가 차원에서 설정하고 나가야 하는 길목에 들어선 것 이다. 이 길목에서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고 진입장벽에 걸려 고통을 겪 고 있는 것이 현재의 복합위기 국면이라 할 수 있다. 기계적으로 말할 수 는 없지만 중진국까지는 양적인 발전으로도 가능하지만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의 시스템과 구조, 그리고 제도와 의식을 질적으로 전환시키지 않고 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진국에 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가 일본을 비롯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점에서도 이 진입장벽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신문명화의 과제다. 과거 경제발전과정처럼 단선적인 ‘따라잡기 ’(catch up) 전략으로 성취할 수 있는 선진국 진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계(또는 세계체계)가 커다란 전환기적 격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 세계화 정보화 친환경화로 흔히 표현되는 변화는 선진국들에게도 기존 의 발전모델을 버리고 새로운 발전모델을 추구하라는 압력이 되고 있다. 근대에 뿌리를 두면서도 탈근대적인 지향을 갖는 이러한 변화를 문명사적 전환이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아닐 듯싶다. 문명사적 전환에 대한 대응은 선진국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모든 나라들 이 마주하고 있는 도전이다. 이런 전환기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국 가간 지역간 경쟁의 지도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셋째는 평화와 통일의 과제다. 세계 어떤 나라도 갖지 않는 우리만의 특 수한 문제, 즉 통일이라는 미답의 길이 성큼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한반 도에 전쟁이 일어날 개연성에 대해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점, 그리 고 급격한 통일이 가져올 수 있는 혼란이 가공할 만하다는 데 대한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은 매우 취약하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 국내외의 여러 기 관과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한반도 정세와 관련하여 핵심적인 중 요성을 갖는 두 가지 사항이 있다. 하나는 북한체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 는 향후 2∼3년 내에 판가름될 것이라는 점이다. 스스로 가라앉는 붕괴인 가, 벼랑 끝에서의 전쟁도발이냐, 아니면 안정 속의 점진적 변화인가가 2 ∼3년 내에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배수진을 친 변화기 에 북한의 급격한 붕괴나 전쟁도발의 길을 억지하면서 안정 속의 점진적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가능한 최선의 길이라는 점이다. 물론 안정 속의 점진적 변화 역시 장기적으로 북한체제의 생존을 보장해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지만, 어쨌든 당장에 붕괴나 전쟁과 같은 급격 한 변화의 시나리오보다는 국제협력에 의한 한반도 평화유지와 북한의 점 진적 개혁 개방의 시나리오가 합리적 선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맥 락에서 통일보다는 평화유지 및 관리가 주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데 대한 국민적 합의가 대단히 긴요해지고 있다.


‘문민정부’가 제기한 개혁의제

현재 한국 사회를 위기로 규정한다면 이러한 3중의 복합과제, 즉 선진화 신문명화 통일이라는 복합 과제의 무게를 우리 사회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한다. 요컨대 단순한 경기불황의 문제가 아 니라 “이미 진행된 미래”의 발목을 잡는 현실이 문제인 것이다. 이 발 목을 잡고 있는 현실에는 정부 정당 기업 시민사회의 시스템 및 행위자의 문제가 모두 포함된다.

돌이켜 보면 변해야 산다는 것은 최근 몇년 동안 지속적으로 선전된 구호 였다. 심지어 “마누라와 자식 빼놓고 다 바꾸어야 한다”는 어느 기업의 구호가 있었는가 하면, 문민정부의 일관된 담론도 ‘변화와 개혁’이었다 . 하지만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유익하고 미래를 선취하는 변화가 얼마 나 실천되었는가는 여전히 의문부호를 달고 있다.

사실 문민정부가 제기한 개혁의제들은 가능한 거의 모든 문제들을 망라했 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개발독재시대의 부정적 유산을 청산하고 민주 주의와 시장경제를 정상화하는 의제들은 선진화의 초석을 닦는 데 필요한 의제들이었다. 공직자 재산공개, 군사조직 정리,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 제, 통합선거법 제정, 역사바로세우기 등은 이에 관련된다. 세계화 정보 화 친환경화를 국가경영 담론으로 제기한 것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교육개혁, 정부조직 개편, 사법개혁, 환경공동체 구상 제시, 정보화 추진 , OECD 가입, 노동법 개정 등은 여기에 해당된다. 남북정상회담추진(김일 성 사망 이전), 북한 핵 타결과 경수로 지원, 쌀지원, 4자회담 추진 등은 평화관리와 통일을 위한 정책수단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개혁과 정책이 문제제기 수준을 넘어서 문제해결수단 으로 착근되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혁의 효 과가 나타나기에는 시간이 짧다든지, 비전과 정책방향이 잘 설계되지 못 했다든지, 분출하는 다원적 이익과 욕구를 잘 조율하지 못했다든지, 수십 년간 굳어져온 기득권의 저항에 봉착했다든지, 또는 새로운 변화를 수용 할 만한 의식과 문화가 뒷받침되지 못했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개혁의제들에서도 나타나지만 문민정부에게 요구되었던 역사적 위상은 과 거와 미래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하는 정부였다. 과거를 교정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을 통해 3중적 복합과제 실현의 길을 닦는 것이었다. 이런 전 환기적 국가경영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가는 사후에 평가를 받아야 할 것 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 정부가 문제를 제기하는 정부였다면, 차기 정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정부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차기 정부에서 신국가경영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차기 정부는 문제를 ‘해결’해야

다음 대통령의 임기 기간은 “국가와 민족의 진로를 결정하는 기간”이라 고 불러도 좋을 만큼 우리나라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기간이다. 3중적 복 합과제의 판도가 거의 가름되는 시기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 경영의 조건이 썩 좋은 것은 아니다. 국가의 힘은 경향적으로 약해지고 있다. 개방화의 흐름 속에서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축소되고, 정 부가 좋은 정책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힘도 갖지 못한 다. 더구나 사회는 안팎으로 더욱 복잡하게 얽히고, 민주화 지방화와 비 례해서 지역적 계층적 집단적으로 다른 욕구와 이익들이 분출하고 있다. 이런 조건 아래서 사회통합을 기하고 국가목표를 향해 사회적 자원을 효 율적으로 동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경제문제에서나 통 일문제에서나 안정성보다는 불확실성이 도처에 잠복해 있다.

요컨대 복합중층적인 국가 목표 및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신국가경영의 리더십은 고난도의 함수풀이를 능숙하게 해나갈 수 있는 리더십이어야 한 다. 단기적인 이익에 매몰되기보다는 중장기적인 국가이익을 중시하고, 그러면서도 다원복합적인 이익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정치적 ‘운전’능 력을 가지며, 필요한 때에는 과감한 결단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리더십을 우리가 만나는 행운을 가진다면, 한국인의 낙관주의는 결 코 흠이 될 수 없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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