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1997년01월16일 제 141호
|
|---|
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남다른 창의력을 발현한 이들이 있다. 역사는 이들 에 의해 움직인다. 그들은 어디에서 샘물을 퍼냈을까?
서태지(25), 이찬진(32), 박재동(45) 등 각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 축한 20~40대의 성장과정을 통해 한번 들여다보자(미국에 머물고 있는 서 태지의 경우 직접 연락이 어려워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했다).
서태지(가수)
상상과 음악에 묻혀…
어린시절 그는 모형비행기에 흠뻑 빠진 평범한 아이였다. 음악에 매료된 건 중학교 때였다. 베이스기타를 사서 혼자 익혔고 컴퓨터 음악장비로 매 일 두들기고 곡을 만들어보고 지우는 것이 하루일과였다. 기계에 관심이 많았던 근원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인 것 같다. 충무로에서 인쇄업을 하 시는 아버지께선 간단한 인쇄기계를 직접 만드시곤 해 ‘발명가’라고 불 리기도 했다. 부모님들은 그때까지 그가 하는 일에 별 반대가 없었지만 “기계를 좋아하니까 공고를 가겠다”고 했을 땐 기타 여러 대가 부숴졌 다. 하지만 결국 부모님들은 그를 믿어주셨다. 고교 1년을 마칠 즈음 신 중현씨가 운영하는 ‘우드스탁’에 매일 들러 김종서형의 기타 치는 모습 을 몇 시간씩 지켜보곤 하다 형의 권유로 시나위 멤버가 됐다. 그리고 음 악을 하는 데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학교를 그만뒀다(나중에 검정고 시로 고교 졸업을 하긴 했다).
그의 창의력을 키웠던 건 무한한 상상과 음악이었고 말살시켰던 건 학교 교육이었다. 학교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은 <교실이데아>에 담겨 있다.
이찬진(한글과 컴퓨터 사장)
“불편을 감수하기 싫었다”
고등학교시절까지 나는 그저 공부를 조금 잘하는 것 외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고교 때 책을 통해 컴퓨터를 처음 알게 돼 대학 시험에 합격(서울대 기계공학과)하자마자 부모님께 컴퓨터를 사달라고 했 다. 그리고 8비트 컴퓨터로 컴퓨터 인생을 시작했다. 호기심으로 접근했 던 컴퓨터였지만 나중엔 학과공부가 뒷전으로 밀릴 정도로 몰두했다. 당 시만 해도 컴퓨터 서적이 전무해 삼각지의 외국서적을 뒤져 컴퓨터를 공 부했다. 그러면서 불편한 소프트웨어가 너무 많은 점을 발견했고 더 편리 한 워드프로세서를 만들고 싶어 한글1.0을 개발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 한 뒤 한글과컴퓨터사(국내 최초 소프트개발전문업체)를 설립했다.
내게 있어 창의성은 불편을 감수하기보단 그 불편을 개선해야겠다는 좀더 깊은 관심과 연관된 것 같다. 그 이전까진 교육환경이 창의력과는 거리가 멀어 남들과 똑같은 목표로 똑같은 공부를 해야만 했다.
박재동(만화영화 <오돌또기> 감독, 한겨레 화백)
“만화가게가 날 키웠다”
6살 때, 부모님이 외출한 사이 송곳으로 장판에 구멍을 뚫어 파도치는 그 림을 그렸을 때, 돌아온 아버지로부터 “잘 그렸다”고 오히려 칭찬을 받 았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나의 창의력은 어린시절부터 그림, 만화에서 비롯됐다. 부모님이 만화가게를 하셔서 만화를 무진장 봤다. 초등학교 때 부터 스토리 있는 만화를 그렸다. 중학교 땐 학급 오락시간을 휘어잡았고 만화, 콩트 등이 담긴 내 오락노트는 친구들뿐 아니라 선생님들도 서로 보려고 했다. 중학교 3학년 땐 영화에 빠져 매일 극장만 들락거리다 고교 입시에 낙방했다. 재수 끝에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검은 교복을 입고 교 실에 앉아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때 미술반은 해방구였다. 미술 실에서 ‘땡땡이’치면서 만화도 그리고 담배도 피고 기타 치고 노는 게 낙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교 꼴찌를 한 적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로 대학을 갈 수 없다는 뼈아픈 현실을 깨닫고 고교 2 학년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서울대 미대)에도 합격했다. 이후 88 년 <한겨레신문> 시사만평가로 등용되기 전까지 나의 만화훈련은 거의 20 년 가까이 중단됐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도 안타깝다. 지금의 나를 키운 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만화가게였지, 학교가 아니었다.
교실에서 만화 그리기, 소설 쓰기, 영화 만들기 등의 창작수업이 이뤄질 때만이 창의력이 길러질 수 있다.
세 사람의 인생이야기엔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걸 했고, 부 모님이 이들의 여린 뜻을 꺾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이 제도교육 과 동떨어졌을 때에야 그 창의력이 만개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우리 시대 의 비극인 것이다.
권태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