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1월16일 제 141호 한겨레21

한국의절망/ 미국으로부터 외교독립하라

(사진/`주체적인 외교정책'의 첫걸음은 미국과의 종속적 외교관계를 탈피하는 것이다. 지난해 12월24일 필리핀 마닐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악수하는 두 정상.)

21세기를 코앞에 둔 현재 동북아시아는 ‘외교전쟁’중이다. 새로운 세력 균형점을 찾는 이 ‘전쟁’의 주요 참전국은 중국·일본·러시아 그리고 미국이다. 물론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이들은 저마다 좀더 높은 국제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때론 경제력을, 때론 군사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현 상태대로라면 한국은 이 ‘전쟁’에서 승자이기보다는 패자가 될 가능 성이 크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왜 그럴까.


매달리고 추종하고 모방하고…

우선 전황을 살펴보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지역패권’을 노리는 중국 이 ‘세계 경찰’ 미국의 권위에 도전하며 형성한 대립축이다. 국내총생 산 기준 세계 3위(일본·4조5천9백10억달러), 8위(중국·5천82억달러), 1 1위(한국·3천7백96억달러·이상 94년 기준) 국가가 밀집해 있는 동북아 에서도 중국의 경제성장 속도는 주변국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얼마전 일본 자민당은 “중국이 2001년이면 일본의 경제규모를 능가할 것”이라 는 예측을 내놓은 바 있다. 아니 홍콩-대만-싱가포르와 동남아를 연결하 는 ‘중화경제권’을 고려한다면 지금도 일본을 능가한다는 지적도 제기 되고 있다. 미국은 이런 중국이 ‘지역패권’을 바탕으로 ‘세계패권’에 도전할 수 있다며 이의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중국은 지난해만 해도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 등 국경을 접한 북방 5개국과 국경협정을 맺고, 인도·파키스탄·필리핀과 ‘우호협력관계’를 맺는 등 지역기반 다지기를 늦추지 않고 있다. 보수우익이 세를 늘려가는 일본도 막강한 경제력으로 아시아에 ‘엔 블록’을 형성하고, 미-중-일 3국 정상 회담의 상설화를 연구하는 등 ‘외교전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후의 승자는 물론 군사·경제력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패자는 누구일까. 아마도 얽히고 설킨 세력관계를 적절히 이용 하지 못한 채 주변국의 힘의 논리에 끌려다니는 나라, 곧 자기 나름의 ‘ 외교정책’이 없는 나라일 것이다. 이에 국회 외무통일위 김근태 의원(국 민회의)은 21세기 한국의 장래전망을 “한국에 외교라고 할 만한 외교가 없다”는 말로 대신한다.

“지금까지 정치군사적으로는 미국에 매달려 있었고, 경제는 미국·일본 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또 사회문화적으로는 서구를 모방하는 데 치중해왔습니다.”

요약하면 한국은 지금까지 자기 목소리 없이 ‘매달리고, 추종하고, 모방 하는 데’ 그쳤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간 한국은 미국의 그늘에 가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11월 열렸던 마닐라 아펙(APEC)회담 때도 한국은 아세안으로부터 미국이 밀어붙인 기술정보협정(TIA)의 적극적인 동조자라는 비판을 받았 다. 2000년까지 정보통신제품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자는 이 협정은 아세 안 등 아펙 개도국이 격렬히 반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등의 동조에 힘입어 미국이 밀어붙이기식으로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동국대 이철기 교수(국제관계학과)도 한국 외교의 최대 문제가 대미 종속 성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한국의 과도한 대미 의존성은 한국 외교의 유연성 부족을 낳은 한 요인 입니다. 현재 동북아는 일대 혼란기입니다. 21세기를 앞두고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각각 주도권을 향해 바삐 움직이는 데 우리는 미국의 대중국 정책·대일정책에 묶여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마 디로 우리 나름의 장기전망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라면 ‘한국의 21세기’는 자신의 목소리를 상실하고 미 국이나 새로운 패권국가에 변함없는 종속성을 보일 우려가 높다는 것이다 .


‘거짓말 외교’로 신뢰도 잃어

외교에서 자기 비전과 정책을 갖추지 못한 것이 현재 한국 외교의 가장 큰 문제점이지만, 한국 외교는 이 밖에도 많은 것이 부족한 상태다. 아마 도 현재 한국 외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외교는 국제사회에서 장기적인 전망·정책의 부재와 함께 국제사 회의 신뢰도 없고, 민간단체와 공조도 없다. 다만 있다면 단기적인 이익 추구와 전시효과를 노린 과시외교 정도다.”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인 외교정책과 버금가는 중요성을 갖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뢰이다. 아무리 ‘계획’이 좋아도 주변국들을 움직일 수 없다 면 헛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신뢰감도 심어주 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지난 92년 7월30일 당시 손주환 공보장관의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그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는 명백히 말하건대 인권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현재 수감중인 사람들은 여야 합의로 만든 화염병방지특별법을 위반해 법의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며, 공산권 국가에서 있어온 정치적 소신에 의한 양심범은 명백 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답변은 당시 한국의 인권단체들의 ‘양심수 석방’ 요구 농성이 국내 뿐 아니라 미국과 독일, 캐나다 등지의 동포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등 해외언론로부터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을 때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한 국 양심수’는 우리나라가 지난 90년 7월 세계에 한 약속과 어긋나기 때 문이다. 한국은 이때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 유엔의 ‘시민적·정치 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 제18·19조에는 사상 ·양심의 자유와 의견의 주장, 발표의 자유를 갖는다고 규정돼 있다. 인 권변호사인 조용환 변호사는 “위로는 대통령부터 아래로는 말단 외교관 까지 국제무대에서 이런 거짓말을 서슴없이 한다”면서 “외국에 나가 보 면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이미 폐지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김 영삼 대통령이 야당시절부터 여러 차례 약속했기 때문이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한국 정부는 노동탄압문제가 불거지면 노동법 개정을 약속하고, 국가보안법의 인권탄압이 비판대에 오르면 이의 개선도 얼른 약속한다. 그러나 그 ‘위기상황’만 넘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약속을 저버리고 만 다. 조 변호사는 이렇게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말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한국 외교는 또 이런 큰 문제 말고도 ‘외교력’을 떨어뜨리는 많은 문제 를 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술’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다양성 부족은 민간기구와의 연대 부족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일반적 으로 선진국들은 정부와 민간기구가 상황에 따라 일정한 역할분담을 한다 . 이렇게 함으로써 훨씬 높은 외교적 성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중 남미에 진출한 미국 기업체에 사고가 생겼을 때 미국의 대응을 살펴보자. 미국에서는 정부의 직접 대응보다는 우선 민간기구나 하원의원 등이 진상 조사에 나선다. 그리고 그 결과를 놓고 정부에서 외교적으로 공식대응할 것인지 판단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 수준에서 외교문제에 접근함에 따라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탄력성있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 만 우리 정부는 민간기구에 대한 경직된 사고 탓에 이들의 ‘활용’이 지 극히 저조한 상태다.


일선 외교관들의 능력도 문제

민간기구가 꼭 친정부적일 필요는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캐나다의 동티 모르 정책이 참고할 만하다. 캐나다는 지난해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국제 사회의 초점이 되기 이전부터 민간기구의 동티모르 연계사업을 지원했다. 국가 차원에서 동티모르를 지원하기에는 인도네시아의 큰 반발이 예상됐 기 때문에 민간기구를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다양 한 채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변화가 많은 국제사회에서 다양한 채널 을 못 갖추고 있다는 것은 바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또 있다. 외교력에서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일선 외교관들의 능력이다. 그 런데 한국은 이 부문에서도 경쟁력이 약하다는 지적이 높다.

“한국 외교관들은 국제회의에서 외국 외교관과 잘 섞이지 못합니다. 국 제회의가 자주 열리는 제네바 유엔 인권센터 로비 등지에서 이런 현상이 잘 드러납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담소하는 회의 막간 커피시간 때, 한국 외교관들은 자기네들끼리만 모여 있거든요.”

국회 법제사법위 천정배 의원(국민회의)은 국제 인권회의 등에 참석했을 때 한국 외교관들의 인상을 이렇게 전한다. 국내에서 ‘세계화’구호가 춤을 추는 상황에서 정작 국제무대에서는 세계화가 덜 돼 있는 것이다. 조용환 변호사도 각종 국제대회에 나오는 한국 외교관들이 회의에 관련된 기본 주제를 모르는 채 참석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한다.

“특히 인권과 관련된 국제회의에서는 외교관들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거나, 엉뚱한 말을 해 빈축을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외교관은 그 나라 정부의 훈령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 외교관들의 더딘 ‘세계화’는 바로 우리나라 외교정책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한국 외교는 그러면서도 외형에는 상당히 신경을 쓴다. 한마디로 ‘과시 외교’인 셈이다. 지난 95년 3월 코펜하겐 사회개발정상회담 때 일이다. 당시 코펜하겐의 언론은 김영삼 대통령이 지나치게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 고 나타난 사실에 주목했다. 또 김 대통령이 공항에서 지나치게 과도한 영접을 요구한 것도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직원이 고작 4명밖에 안 되는 코펜하겐 한국대사관은 김 대통령의 대규모 수행원을 영접하느라 인근 스 웨덴 등지의 유학생들에게까지 도움을 호소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한 외교전문가는 이를 두고 “한마디로 빈깡통이 요란하다는 비판을 듣기 알 맞다”고 일침을 놓았다.


외교적 약점 심각하게 돌아보자

이런 과시외교와 맥을 잇고 있는 부분이 외교정책의 단기적 이익에 매몰 돼 있다는 점이다. 외교를 장기적 국익차원에서 보지 않고 정권의 단기이 익으로 재단한다는 말이다. 김근태 의원은 현 정부가 독도문제를 풀어가 는 것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난 총선 직전 독도문제가 초점이 됐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재빨리 함 정을 파견하고, 비행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일본 참의원에서 독도 관련 국회 결의를 추진하는 등 상황이 더욱 긴박하게 됐는데도 대통령은 한 마디 말도 않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총선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 기 위해 독도문제를 이용했다는 의심을 받을 만한 것입니다.”

과연 동북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교전쟁’에서 한국은 패자의 길을 피 할 수 없는 것일까.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외교적 약점을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김보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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