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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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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게, 하지만 분명하게 앞으로

등록 2021-09-02 10:11 수정 2021-09-03 02:21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연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마음이 무겁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아프간을 급속도로 장악한 탈레반 세력은 말로는 변화를 약속했지만 벌써 자국민을 대상으로 야만적인 보복과 살육을 벌이는 중이다. 여성을 포함한 수많은 아프간 국민은 매우 위태롭고 끔찍한 상황에 놓였다.

2018년 ‘강 건너’에서 도착한 예멘인들

외교부는 2021년 8월24일 우리 군 수송기 3대를 보내 한국 정부 및 관련 기관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탈레반의 표적이 된 아프간 현지인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 중이라고 밝혔고, 26일 아프간인 391명이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 이는 한국 정부로부터 이들이 응당히 받아야 할 보호이기도 하지만, 한국에는 굉장히 이례적인 조처이기에 아주 뜻깊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피란민 수용에 적대적인 여론도 여전히 거세다. 이제는 난민 관련 기사에 어떤 댓글로 도배됐을지 안 봐도 뻔할 정도다. 아프간 피란민 수용 발언을 한 국회의원은 의원실로 걸려오는 욕설 전화에 시달려 제발 ‘폭력을 멈춰달라’고 호소할 지경이다. 한 칼럼니스트는 난민에 대한 한국인 일부의 극심한 편견과 적대감을 ‘아프간 난민, 한국 오지 마라’고 반어법으로 날카롭게 풍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도 느껴진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초기부터 한국 정부 책임론이 연일 언론과 시민단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퍼졌다. 정부는 치밀한 구출 작전을 극적으로 성공시켰다. 2020년 12월 유엔난민기구(UNHCR)와 한국리서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난민 수용에 찬성하는 응답자가 33%로, 2018년(24%)보다 많이 늘었다.

우리가 나라 밖 피란민에 대한 책임에 이만큼 진지했던 전례는 드물다. 2021년 2월부터 이어지는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는 매우 적극적으로 연대한다. 이는 우리가 공동체의식을 느끼는 테두리가 과거보다 넓어지고 세계시민으로서 연대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지표가 아닐까? 여전히 난민에게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임에도 희망을 발견하는 이유다.

2018년 여름, 본국의 전쟁을 피해 제주도를 찾은 예멘인 500여 명을 보면서 한국 사회는 그동안 강 건너 불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우리와 동떨어진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당시 여론은 난민에 대해 험악했고, 정치권도 예멘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예멘인들과 연대하는 많은 시민과 단체, 종교기관이 있었다. 예멘 난민이 한국에 온 사건은 우리 사회를 성찰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 계기가 됐다.

험악한 여론의 이면에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면 신음이 들린다. 근거 없는 공포를 느끼고 혐오를 쏟아내는 방어기제의 이면에는 ‘나 너무 힘들다’라는 절규가 있다. 장기전으로 치닫는 코로나19 대유행에도 시민들은 지쳤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겉으로 두려워할지언정 속으로는 먼 곳의 형제자매에게 인류애적 책임을 분명 느끼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연대의 목소리가 나오고, 시민사회 또한 이전보다 한 걸음 나아간 움직임이 감지된다.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세상

우리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세상을 살고 있다. 환경문제와 코로나19 대유행 등이 일깨워주는 사실은 지구 반대편 타인의 문제가 곧 현재 내 삶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세계시민으로서 연대정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멀고 험난하다. 우리는 더디게, 그러나 분명히 올바른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다.

김종대 리제너레이션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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