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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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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시민들은 닭고기가 더 궁금하다”

미국 침공 격퇴 60주년 맞춰 라울 카스트로 물러나…
새 지도부의 당면과제는 생활용품의 안정적 공급
등록 2021-04-23 17:37 수정 2021-04-24 04:29
2021년 4월19일 쿠바 공산당 제8차 전당대회에서 혁명 1세대 지도자인 라울 카스트로(오른쪽)가 자신의 후임으로 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직에 선출된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의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21년 4월19일 쿠바 공산당 제8차 전당대회에서 혁명 1세대 지도자인 라울 카스트로(오른쪽)가 자신의 후임으로 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직에 선출된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의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AFP 연합뉴스

쿠바에서 한 시대가 저물었다. 피델 카스트로(1926~2016), 체 게바라(1928~1967)와 함께 쿠바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한 라울 카스트로(90)가 2021년 4월19일 공산당 제1서기직을 끝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라울은 피델의 친동생이다.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는 “제8차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 19일 대의원들이 미겔 디아스카넬(61) 대통령을 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선출했다”고 보도했다. 세계 언론매체들도 일제히 이 소식을 주요 뉴스로 전했다. ‘카스트로 형제 치세’가 막을 내린 건 1959년 혁명 이후 62년 만이다.

<그란마>는 “라울 카스트로 육군 사령관은 신임 5명을 포함해 모두 14명의 정치국원 명단을 보고한 뒤 자신의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고 전했다. 호세 라몬 마차도 벤투라(90) 공산당 제2서기, 라미로 발데스(88) 부총리 등 혁명 1세대의 다른 원로들도 대부분 당 최고 의결기구인 정치국에서 빠지고 2선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쿠바는 혁명 이후 처음으로 ‘카스트로’가 아닌 지도자가 당과 정부의 최고위직을 겸임하고 혁명 2세대가 전면에 포진한 ‘포스트 카스트로’ 시대를 맞았다.

62년 만에 혁명 1세대 2선으로

이번 세대교체는 5년 전부터 예고된 절차였다. 2016년 제7차 전당대회에서 라울은 차기 전당대회 때 다음 세대에 자리를 물려줄 것을 공언했다. 2018년에는 국가원수 자리인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당시 부의장인 디아스카넬에게 양도했고, 2019년에는 개헌을 통해 당-정 권력을 분리하고 대통령직을 신설했다. 디아스카넬은 국가평의회 의장이 된 지 1년 만에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며, 다시 2년 만인 이번에 공산당 제1서기까지 오르면서 쿠바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굳혔다. 디아스카넬은 4월20일 61살 생일을 맞은 혁명 이후 세대다. 국립 아바나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했고, 영국 팝그룹 비틀스의 음악을 즐기며 청바지와 자전거 여행을 좋아하는 신세대 정치인이다.

라울은 77살에 피델에게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물려받고, 80살에 공산당 최고 지도자까지 맡았다가 90살에 모든 공직을 내려놨다. 라울은 재임 기간에 밖으로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고, 안으로는 권력의 매끄러운 차세대 이양 작업에 힘을 쏟았다. 자신이 앞장서 혁명 1세대 퇴진의 첫 단추를 끼웠다. 2015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물밑 중재에 힘입어, 50여년 만에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민주당)과 양국 관계 정상화를 실현했다. 21세기 들어서도 카리브해에 ‘냉전의 섬’으로 고립됐던 쿠바는 새 변화를 예감하며 희망에 부풀었다. 이런 기대감은 불과 2년 뒤인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공화당)이 국교 정상화 합의를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전방위 제재를 다시 강화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2021년 1월 출범한 미국의 조 바이든 정부(민주당)는 쿠바의 이번 지도부 세대교체에 대해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미국 공격 물리친 역사 떠올리게 하는 시점

쿠바 현대사는 냉전체제의 짙은 그늘과 미국과의 날카로운 대립으로 얼룩졌다. 미국은 쿠바혁명 직후부터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려 수없이 공작을 펼쳤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폭발물 시가, 독극물 우유, 옛 애인, 폭탄 조개, 고압 전기 등 온갖 기발한 수단을 동원해 피델을 암살하려 했다. 피델은 생전에 무려 638차례나 암살 위기를 넘겼다며 “올림픽 경기 종목에 ‘암살 모면하기’가 있다면 내가 금메달일 것”이란 농담을 한 적도 있다.

이번 제8차 전당대회가 열린 날짜(4월16~19일)는 두 나라의 질긴 악연이 시작된 역사를 반영한다. 2021년은 미국이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려 쿠바를 침공했다가 격퇴당한 피그스만 침공 60주년이다. 쿠바에는 항미 승전 기념일인 셈이다. 앞서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쿠바는 ‘카리브해의 매춘굴’이란 오명을 얻고 있었다. 주말이면 미국인들이 건너와 도박과 술과 노골적인 라이브 공연을 즐기고 성매매 여성들과 흥청거리는 놀이터였다. 이런 풍경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끈 1959년 혁명으로 갑자기 사라졌다. 미국에는 사회주의 섬나라 쿠바가 손톱 밑 가시였다. 하지만 미국이 쿠바혁명 직후 국교를 끊은 건 아니었다. “역겨운,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일”(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을 실행하는 CIA가 극비리에 뒤집기 한판을 추진하고 있었다.

1961년 4월15일 아침, 미군 B26 폭격기 8대가 쿠바 영공을 침입해 공군 비행장을 폭격했다. 몇 시간 뒤, 쿠바 침공 부대가 쿠바 서부의 한적한 피그스만 해안에 상륙했다. CIA가 군사훈련을 시키고 무기를 지원한 쿠바 반체제 망명객 1500여 명으로 이뤄진 반군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넉 달 만에 CIA 군사작전 실행을 승인했다. 쿠바 침공군이 공습 지원을 받으며 육해군 합동작전으로 쿠바 해안에 거점을 확보한 뒤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면, 미국과 친미 중남미 국가들이 곧바로 쿠바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작전은 시작부터 꼬였다. 쿠바는 미국의 극비 작전에 대한 첩보를 이미 입수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항공 휘발유와 탄약을 가득 실은 CIA의 화물선이 쿠바 공군기의 로켓탄에 맞아 폭발하면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치솟았다. 쿠바 해안에선 침공군이 쿠바군과 60시간 동안 전투를 벌이며 CIA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눈을 의식한 미국은 끝내 외면했다. 쿠바 침공 작전은 반군 114명이 사살되고 1189명이 사로잡힌 끝에 4월19일 실패로 끝났다.

해빙 분위기 깬 트럼프… 조 바이든은?

케네디 대통령은 격분하며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하고 CIA 폐지까지 검토했다고 한다. 다섯 달 뒤, CIA의 최장수 국장(재임 1953~1961)이자 ‘CIA의 아버지’로 불린 앨런 덜레스가 책임지고 사임했다. 케네디는 친동생 로버트에게 후임 국장을 맡기려 했다. 그러나 로버트는 형의 ‘정치적 바람막이’를 자임하며 CIA를 막후에서 지휘했다. CIA가 로버트의 명령으로 대쿠바 보복 행동을 검토한 목록에는 △쿠바의 반체제 지하세력 적극 활용 △카스트로 정권의 내부 잠식 △쿠바 경제 파괴 △생화학무기로 쿠바 농작물 파괴 △쿠바의 차기 총선 이전에 정권 교체 등이 포함됐다.

1961년 8월 우루과이에서 북·남미 국가 협력기구인 미주기구(OAS) 회의가 열렸다. 미국은 이 자리에서 회원국들을 압박해 쿠바를 제명해버렸다. 미국이 쿠바 봉쇄와 제재를 강화한 것도 이 시기다. 체 게바라는 미주기구 회의에서 만난 미국 대표단에 캐네디 대통령에게 보내는 ‘감사’ 편지를 건넸다. 편지 내용은 이랬다. “플라야히론(피그스만) 일은 고맙소. 침공 전에는 혁명이 불안정했지만, 이제 혁명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소.”

피그스만 침공은 냉전체제 이념 대결이 군사충돌이라는 열전으로 비화한 사건일 뿐 아니라, 쿠바가 소련과 더욱 밀착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소련은 쿠바를 경제·군사적으로 적극 지원했다. 이듬해인 1962년 가을에는 소련이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중거리 지대공미사일 SS-4를 쿠바에 배치하다 미국에 들키면서 일촉즉발 핵전쟁 위기까지 치달았다. 미국은 초강경 대응과 아슬아슬한 담판을 벌인 끝에 소련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임기를 1년여 남겨둔 1963년 11월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범의 총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1960년대 초반에 벌어진 일련의 쿠바 사태는 케네디 형제의 체면과 미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쿠바는 이후 반세기 넘도록 미국의 고강도 제재와 압박에 따른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미국과 쿠바의 극한 대결은 쿠바에서 라울이 실권을 쥐고 미국에서 오바마 정부가 집권한 2010년대 들어서야 해빙 기운이 싹텄다. 2015년 7월 두 나라는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2016년 3월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해 라울 의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서로 상대국에 대사관을 다시 열었고, 미국 민항기와 크루즈선의 쿠바 운항이 재개됐으며, 경제제재도 일부 해제됐다. 이런 조처는 모두 오바마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이뤄졌다. 당시 공화당이 다수였던 의회가 비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부터 ‘오바마 지우기’에 나서면서 미국과 쿠바의 관계도 원점으로 되돌려버렸다. 4년 뒤 새로 출범한 조 바이든 정부에서도 아직 청신호는 나오지 않고 있다.

카스트로 시대와 달라질까

쿠바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또다시 헤쳐가야 한다. 가장 시급한 건 극심한 침체에 빠진 경제를 되살리는 것이다. 국민의 시민적 자유와 민주주의 확대 욕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인터넷 이용이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언론 통제와 검열은 여전히 심하다. 국경없는기자회가 매년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를 보면 2020년 쿠바는 조사 대상 180개국 중 171위였다.

4월19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아바나 시민들은 (지도부 교체보다) 닭고기를 확보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며 “라울의 퇴임으로 바뀌는 건 당분간 거의 없을 것”이란 현지의 회의적 분위기를 전했다. 같은 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쿠바가 ‘카스트로’ 없는 미지의 세계에 들어섰다”며 쿠바 국민의 세대 균열에 주목했다. 고령층 다수는 ‘카스트로 시대’ 이전의 빈곤과 불평등을 기억하며 수십 년의 고난에도 혁명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한다. 반면 교육과 보건의료 등 사회주의의 성취를 누리며 성장한 젊은 세대는 이제 그 한계에 짜증을 느끼며, 정부의 통제 축소와 경제적 자유 확대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카스트로 시대 종료로 냉전체제의 덫이 풀릴지, 새로 출범한 2세대 지도부가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낼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당면한 최우선 과제 중 하나가 식료품을 비롯해 기본 생활용품의 안정적 공급이란 현실은, 전 국민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이 보장된 쿠바의 서글픈 역설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참고 문헌
<잿더미의 유산>, 팀 와이너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2017
<체 게바라, 혁명적 인간>, 존 리 앤더슨 지음, 플래닛 펴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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