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미얀마 민중 앞에, 무기력에 허우적댈 순 없다

냉소주의자 뺨을 후려치는 미얀마 민중의 삶의 의지

제1357호
등록 : 2021-04-04 15:50 수정 : 2021-04-07 10:24

크게 작게

‘자유버마레인저스’가 2021년 3월28일 배포한 사진. 미얀마 동쪽 카렌주 데푸노 주인들이 3월27일 공습을 피해 동굴에 숨어 있다. 연합뉴스

미얀마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상황을 우려하는 분들이 끊임없이 현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글과 사진을 올리며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미얀마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올라오는 소식을 ‘보고’ ‘읽고’ ‘듣는’ 것밖에 없다. 보고, 듣고, 읽는 것이 무슨 힘이 될까? 이 힘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며 무기력해지지 않을 수 없다.

‘듣는 몸뚱이’로 살라는 미얀마 군부
권력은 보게 하는 것으로 힘을 유지했다. 무엇을 보여줄지는 그 권력의 속성을 통해 결정된다. ‘생명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중세까지는 권력이 ‘죽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힘을 과시한다. 내가 이렇게 너를 죽일 수도 있으니 찍소리 말고 넙죽 엎드리라는 것이다. 반면 근대 권력은 죽이는 것을 감추고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너를 살리는 권력인 나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따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권력은 말하는 것이 곧 힘이었다. 아주 어릴 적 땡볕 아래 운동장에 줄 맞춰 서서 교장의 훈화 말씀을 들을 때 학생들은 권력이 무엇인지를 실감한다. 권력은 말하는 힘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듣게 하는 힘이다. 상대가 듣거나 말거나 사실 신경 쓰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말하지 않고 듣는 ‘몸뚱이’로 존재하게 하는 것, 이는 권력의 효과로 일어난다.

미얀마 군부는 완전히 야만적인 권력으로 돌아갔다. 죽이고 죽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주검 탈취 역시 감추지 않는다. 죽은 이의 몸을 파헤치고 탈취하는 것까지 ‘보여주고’ 있다. 공공연하게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학살한다. 저항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그냥 총을 쏜다. 이를 통해 권력의 잔인함을 유감없이 민중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냥’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 않고 듣는 몸뚱이로 살 것을 명령한다. ‘미얀마군의 날’(3월27일) 행사 전날 최고 독재자가 텔레비전에 나와 한 말이 단적인 증거다. 머리와 등에 총알을 맞을 수도 있다고 했다. 감추는 게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건 입 다물고 듣고 따르기만 하라는 명령이다.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부터 인터넷 그리고 통신망까지 다 차단했다. 말하려면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민중은 말하고 있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목숨 걸고 사진을 찍고 상황을 글로 써서 바깥에 알린다. 그 소식들은 난파해 무인도로 떠내려간 사람들이 외부와 연결하려고 전달하는 병에 든 쪽지처럼 하나둘 우리가 있는 갯가로 밀려온다. 그 쪽지를 든 바깥의 사람들은 그곳 상황에 전율하지만 동시에 무력감을 느낀다. 저 대놓고 무시하는 권력에 대해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 군 최고사령관이 3월27일 ‘미얀마군의 날’ 기념 파티에서 해외 초청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날 미얀마 시위대에서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민 아웅 누리집 갈무리

민주주의에 대한 형식적 합의조차 끝나고
사람들이 느끼는 이 무력감의 이유 중에는 무기력해진 국제정치가 있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해 연일 강력한 경고와 비판이 제기되지만, 학살 권력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들을 향해 전세계가 일치해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안다. 실제 미얀마군의 날 퍼레이드에 중국과 러시아는 대표단을 파견했다. 노골적으로 학살 정권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국제정치가 언제 ‘수사’(레토릭) 수준을 벗어나 직접 행동해 실력을 보여준 적이 있었냐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국제정치는 대부분 수사의 정치였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도 늘 말싸움만 할 뿐이다. 급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문구’ 하나를 가지고 시간을 다 잡아먹으며 한심한 말장난이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국제정치였다. 유엔 안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문구 하나를 둘러싼 ‘말싸움’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무엇이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인지를 둘러싼 치열한 다툼이었다. 그리고 최소한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인류는 정치적 입장과 이념적 차이를 떠나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에 ‘최소한’의 합의를 가진 듯했다. 그 수준과 내용이 어떻든 간에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였다. 수사 측면에서 볼 때 적어도 지구상 어느 나라도 자기들이 인권과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주장을 대놓고 하는 시대는 간 것처럼 보였다. 그 상징적 결과물이 인권을 다루는 유엔의 기관이 위원회(Commission)에서 이사회(Council)로 격상된 것이었다.

지금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이 공공연한 학살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전 지구적 ‘합의’가 그 형식마저 끝났다는 사망선고와 다름없다. 아니 미얀마의 군사독재는 이미 그 사망선고에 대한 부고를 받았을 것이다. ‘소프트’하긴 하지만 이웃 나라 타이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해 전세계는 ‘잠깐’ 우려했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중국이든 미국이든 잘 지내고 있다. 홍콩의 민주주의 압살에 대해 서구가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역시 아무 문제 없이 중국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있다. 서구에서도 극우 인종주의와 혐오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이렇게 민주주의와 인권이 사망했다면 더는 민주주의의 외피를 불편하게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 더구나 미얀마 군부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절대적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연패한 선거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넘어 굴욕스러운 것이다. 누구 말처럼 그들은 ‘정치’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실상 권력을 가진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지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정부 내에서의 정치도 아니고 민주정부와의 정치조차 끝내버리고 전면에 나섰다. 말싸움에서조차 무기력해진 국제정치가 아무것도 못할 것은 자명하고, 그래서 아무 일도 없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뭔가 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끔찍한 부조리극
다시 강조하지만, 국제정치에는 더 이상 실제적인 것은 고사하고 수사 차원에서도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에 대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국제정치가 뭔가 미얀마에서 들려오는 절규를 열심히 듣고 근심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되는 게 없으리라는 점을 모두가 안다. 국제정치는 아무것도 못하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뭔가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뭔가 하는 끔찍한 부조리극에 불과하다.

이 부조리극을 부조리하다고 말만 하고 무기력하게 돌아설 수는 없다. 바깥의 우리보다 백만 배는 더 무력할 수밖에 없는 미얀마 민중은 오늘도 부모와 사랑하는 이의 배웅을 받으며 ‘그냥’ 죽을 수 있는 거리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죽을 수 있는 거리에 ‘그냥’ 나서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의 땅(Country)을 다시 자기들의 나라(Nation)로 되찾아 지키고 향유하고 싶은 ‘가치’를 위해 나서고 있다. 바깥의 잘난 힙스터 지식인들이 비웃는 인간의 존엄과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말이다.

가장 무기력할 것 같은 그들이 사실은 세기말적인 무기력에 빠진 대다수 인류와 달리 존엄의 전선 맨 앞에 나서고 있다. “인간이 존엄하긴 뭐가 존엄해?” “어차피 세상은 망한 것 아냐?”라며 모든 가치에 대해 냉소하는 퇴폐적 허무주의자들의 뺨을 후려갈기며 ‘그냥’ 살/죽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이와 매일, 매 순간 작별하며 거리로 나선다. 오늘 병에 담겨 겨우 우리에게 닿은, 온 가족과 작별하고 길거리로 나온 미얀마 민중의 사진이 말해주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무력하지만 무기력하지 않다. 무력하지 않으면서도 무기력하기만 한 ‘우리’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심지어 하는 일이라고는 그들이 보내온 사진을 공유하는 것밖에 없는 우리에게 ‘감사하다’는 말까지 하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연대를 요청한다.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말이다. 그게 아무리 무력해 보이더라도 말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기력해지지 말라고 마지막일지 모르는 두 눈을 부릅뜨며 말한다. 너의 무기력이야말로 사치라고. 이 세기말적 무기력에 젖어 한없이 냉소적 허무주의로 후퇴하는 퇴행적 사회의 무기력한 우리에게 저 무력한 이들이 말이다.

20년 전 여전히 미얀마가 군부독재에 시달리던 때, 내가 몸담은 단체와 연대하는 타이의 밀림에서 만난 카렌(미얀마 소수부족) 해방운동을 하던 노‘전사’는 약간의 술을 마시고 이렇게 말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나는 종교는 버릴 수 있어도 카렌은 버릴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진정으로 내 ‘나라’(Nation·이 말은 정말 우리말로 옮기기가 힘들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정치사회학을 하는 친구에게도 물어봤지만, 개념적 의미보다 이 말을 할 때 그 노병의 감정을 살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를 가지고 싶고 그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머뭇거리며 “가장 좋은 것은 카렌이 독립하는 것이겠지만 독립하지 않더라도 ‘네이션’으로 살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 말했다.

전 지구적 무력한 자들의 연대를 위하여
노병과 그의 동료들은 미얀마에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 여전히 카렌 ‘네이션’에 대한 꿈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미얀마를 카렌 네이션이 살아갈 수 있는 연방국가가 되게 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밀림으로 달려와 나를 반갑게 맞아주던 그의 웃음을 잊지 못한다. 그가 무사할 때까지, 그로부터 소식을 들을 때까지 무기력에 허우적거릴 권리 따위는 내게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하면 된다. 그들이 쓰기를 원하면 쓰면 되고, 전하기를 원하면 전하면 된다. 그들이 요청하는 것에 충실히 응답하면 된다. 그것이 아무리 무력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지금 필요한 것은 이 무기력하고(동시에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여 지배하는) 무도한 국제 패권 정치에 맞서는 전 지구적인 무력한 자들의 연대 아니겠는가.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