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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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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우한과 ‘닮은 꼴’인 1942년 허난성

언론 자유와 목소리를 낼 권리에 대하여… 2021년 전시 상태가 된 베이징에서
1942년 최소 300만 명이 죽은 허난성 대기근을 돌아보다
등록 2021-01-17 10:58 수정 2021-01-21 01:17
중국 허난성의 비참한 기근을 다룬 영화 <1942>. 영화 제작사 제공

중국 허난성의 비참한 기근을 다룬 영화 <1942>. 영화 제작사 제공

“2020년 12월31일부터 후베이성과 우한시에서는 새로운 방역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베이징 일부 지역과 허베이성 스자좡시를 중심으로 다시 코로나19가 확산돼, 이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도착 즉시 집중격리 시설에 가서 14일간 집중격리 관찰과 핵산 검사를 받은 뒤 음성으로 판정돼야지만 이동이 허가됩니다.”

1월 초, 우한에 갈 일이 있어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매하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한시 질병통제관리본부에 전화했더니 “14일간의 집중격리 관찰을 감수하고 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이제 코로나19에서 거의 ‘해방’된 줄 알았지만, 2020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베이징 순이와 허베이 스좌장 지역에서 확진자가 나오면서 다시 ‘전시상태’가 되었다. 1월12일 정오를 기점으로 베이징으로 통하는 주변의 모든 고속도로가 봉쇄되고, 인근 지역 주민들의 베이징 진출입이 금지됐다.

2020년 1월23일 기습적으로 내려진 봉쇄

자다가 날벼락 같은 통보를 받은 사람들도 있다. 1월11일 새벽, 허베이 스자좡시 가오청구 쩡춘진 12개 마을에 일제히 방송이 울려퍼졌다. “모든 주민은 지금 즉시 짐을 꾸려서 마을 입구에 모여 등록해주십시오. 정부 지시로 모든 주민은 준비된 차를 타고 지정된 다른 지역으로 가서 일주일간 집중격리 관찰을 해야 합니다.”

주민 2만여 명은 불평 한마디 할 틈도 없이 비몽사몽 상태에서 서둘러 짐을 챙겨 버스를 타고 집을 떠났다. 1월10일까지 허베이성에서 나온 확진자 256명 중 대다수가 이 일대 마을에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1월12일 정오를 기점으로 사전에 아무런 통보 없이 기습적인 봉쇄와 베이징으로의 진·출입 금지가 결정된 허베이 일대 주민들도 ‘멘붕’에 빠졌다. 오전에 베이징으로 출근했던 허베이 지역 거주자들은 졸지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난민’이 되었다.

1년 전, 2020년 1월23일 오전 10시. 우한 시민들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기습적인 ‘봉쇄’를 당했다. 중국에서 가장 시끄럽고 활력이 넘치던 우한 거리가, 그날 오전 10시를 기점으로 삽시간에 ‘죽은 도시’로 변했다. 사람들과 소음이 사라진 우한 거리에는 온갖 구호만 나부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역병을 물리칩시다!” 하지만 그날 이후 우한에는 죽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이 넘쳐났다. 봉쇄가 이뤄진 1월23일 이전에 ‘역병이 돌고 있다’는 통보나 방송은 없었고, ‘유언비어를 퍼뜨린 사람들은 엄벌에 처해진다’는 뉴스만 나왔다.

1942년, 중국 허난성 황허강 일대에도 죽은 사람이 넘쳐났다. 우한처럼 역병이 돈 게 아니었다. 대략 300만~500만 명이 대책 없이 굶어 죽었다. 그해 허난 지역에는 유례없는 가뭄이 들었고, 갈라지고 타들어간 땅에선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았다. 굶주린 사람들은 마을의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진흙을 파먹다가 배가 터져 죽는가 하면, 기러기 똥에 든 곡식 한 알이라도 먹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녔다. 주워 먹을 기러기 똥도 사라지자, 사람들은 어린 자식을 잡아먹고 아내와 딸을 인간시장에 내다 팔았다. ‘매물’ 인간이 너무 많아지자 ‘사람값’은 고물값보다 더 쌌다. 굶주린 사람들은 ‘배추를 팔듯’ 자식을 팔았고 그렇게 팔아도 고작 밀 한 근도 못 받았다. 시장에선 굶어 죽은 사람과 어린아이를 잡아서 만든 인육만두도 팔려나갔다.

일본군 막기 위한 방류가 가뭄 불러와

1942년 허난은 삶과 죽음이 더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인간 지옥이었다. 그해 여름부터 다음해 겨울까지 먹을 것을 찾아서 인근 시안 등 다른 지역으로 탈출하는 굶주린 난민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피난을 떠난 사람들도 부지기수는 중간에 굶어 죽었지만, 고향에서 자식과 아내까지 팔고도 끝내는 굶어 죽은 사람들보다는 생존한 확률이 높았다.

1942년은 국민당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이 중국을 통치하던 시절이고, 1937년부터 시작된 중일전쟁으로 허난성의 절반이 일본군에 점령된 상태였다. 점령지가 아니었던 허난성 주민들도 나라가 구제해주지는 않았다. 구제해주기는커녕, 전쟁물자를 징발하기 위해 집 안에 꼭꼭 숨겨둔 나락 한 톨까지 징수했다.

1938년 6월9일, 일본군의 서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장제스는 정저우 부근 화위안커우 제방을 기습적으로 방류해 황허강을 범람시켰다. 잠자다 일순간 수몰되고, 수장된 마을과 주민 수는 통계조차 낼 수 없었다. 당시 황허강 기습 방류의 영향으로 그 일대 생태계가 교란되면서 일어난 대기근이었다. 인재(人災)였지만 장제스는 오히려 “기근이 들었다고 말하는 자는 정부에 맞서는 행위”라며 엄벌에 처한다고 공표했다.

당시 허난의 참상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은 미국 잡지 <타임> 기자인 시어도어 H. 화이트가 사진기자 해리슨 포먼과 함께 허난성에 들어가 취재한 뒤 송고한 기사 덕분이었다. 이로 인해 장제스는 허난성에 구제정책을 지시하게 된다. 1943년 3월22일 <타임>에 화이트의 ‘특종’이 보도되기 전, 허난 지역 몇몇 언론에서 관련 보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화이트도 <대공보>에 실린 장가오펑의 기사를 본 뒤, 두 눈으로 실상과 진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허난으로 갔다.

1943년 2월1일치에 실린 ‘허난 재해 실록’이었다. <대공보>는 당시 중국에서 발행 부수가 가장 많고 영향력이 가장 큰 신문이었다. 전국지에서는 최초로 다룬 기사였다. 장가오펑 기자는 허난 지역 취재기자로 발령받고 허난성 정저우로 가던 길에,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참상을 목격하고 바로 실상을 취재해 본사로 송고했다. 당시 <대공보> 사장 왕윈성도 살벌한 ‘보도금지’ 명령을 어기고 그 기사를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중앙정부를 비판하는 사설도 썼다. 하지만 결과는 정간이었다. 격노한 장제스는 <대공보>를 3일 동안 정간 조치했고, 장가오펑 기자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가짜뉴스 및 유언비어 유포죄’로 체포돼 1년간 옥살이를 했다.

목숨 건 진실 보도만큼 험난한 기억의 복원

화이트 기자는 기사를 쓴 뒤 직접 장제스를 만나 ‘진실’을 전하려고 했다. 부패한 관료들이 장제스의 두 눈과 두 귀를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제스를 면담한 화이트는 훗날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중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길에서 죽은 사람을 먹는 개를 보았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포먼이 꺼낸 사진에 개가 길가에서 시체를 뜯어 먹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고 총사령관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허난의 대재앙> 중)

1949년 공산당이 중국을 ‘해방’한 뒤에도 1942년 허난에서 벌어진 비극은 생존자들 외에 기억하거나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992년 중국 소설가 류전윈이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벌어진 참상을 취재해 <1942년을 되돌아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더 대중적으로 각인된 것은 2012년, 중국 유명 영화감독 펑샤오강이 류전윈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1942>가 개봉하면서다. <대공보> 장가오펑 기자가 ‘진실을 보도한 죄’로 감옥에 간 지 거의 70년 만에 이뤄진 일이다. ‘기억의 복원’은 목숨을 건 진실 보도만큼이나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었다.

2020년 1월23일 우한이 전격 봉쇄된 뒤, 상하이에 살던 37살 여성 장잔은 2월 초 봉쇄를 뚫고 우한으로 가서 ‘시민기자’를 자처했다. 그는 혼자 카메라를 들고 봉쇄된 우한 거리를 누비며 ‘실상’을 알리려 했다. 당시 중국 언론에는 ‘허가된 내용 외에는’ 엄격한 보도 통제가 내려진 상태였다. 모든 언론 보도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 기관지이자 혀와 입인 <신화사>와 <인민일보>의 보도를 기준으로 삼아야 했다.

2월8일 장잔이 처음 올린 취재영상 제목은 ‘언론 자유와 목소리를 낼 권리에 대하여’다. 그 뒤 그는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권력이 더 중요한가’ ‘우한, 한밤중 화장터에서 울리는 통곡 소리’ 같은 독립 취재영상을 꾸준히 올리다가 그해 5월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다 2020년 12월28일 재판받는 모습이 보도됐다. 장잔은 이날 재판에서 ‘공중 소란죄’와 ‘유언비어 유포죄’ 등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다음날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산하의 <환구시보> 편집장 후시진이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서방세력은 그를 무정하게 소비했다. 그는 (서방세력에 이용당한) 비극이다. 서방세계는 장잔을 이용해 중국 국내 여론을 분열시키려 했고, 중국의 단결력을 파괴하려 했다. …장잔은 ‘언론 자유’와 ‘인권’을 빌미로 중국을 공격하는 서방세력의 최신 무기가 되었다. 서방세력은 장잔의 보도와 그를 ‘반항자’라는 이미지로 이용해서 중국 정부가 취한 방역 정책이 얼마나 ‘비인도적’인지를 비판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실 우한 봉쇄가 이뤄지던 시간에, 많은 기자가 그곳에서 진실을 보도하고 있었고 수많은 시민도 각자의 방식으로 진실을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잔이 저항하고 비판했던 중국 체제는 방역에 성공했고, 그를 지지했던 미국과 영국 같은 서방세계에서는 수십만 명이 죽어나갔다. 중국과 서방세계 중 누가 더 방역에 인도적이고 성공했는지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각자의 저울이 있을 것이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살아야지

화이트 기자가 국민당의 한 군관을 취재할 때 허난 지역의 참상을 거론하며 그들의 폭정과 무관심을 비판하자, 군관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민이 죽으면 그 땅은 여전히 중국인의 것이지만, 군인이 죽으면 일본인이 바로 이 나라를 접수하게 된다.” 하지만 똑같은 질문을 기아로 죽어가던 1942년 당시 허난 사람들에게 돌리면 답은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 한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중국 귀신으로 죽겠느냐, 아니면 망국노(나라를 잃은 백성)가 되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라고. “1942년을 되돌아보고 나서 얻은 마지막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1942년을 되돌아보라>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이다. 중국인들의 마음속에도 언론을 바라보는 ‘각자의 저울’과 ‘마지막 결론’이 있을 것이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참고 문헌
류전윈 <1942년을 되돌아보라>, 멍레이 등 <1942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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