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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코트에 엄마 영웅들이 돌아왔다

피론코바·윌리엄스·아자란카 출산 뒤 US오픈 8강·4강·결승 진출 ‘맹활약’
등록 2020-09-26 04:28 수정 2020-10-02 00:40
2020년 9월9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대회 여자 단식 8강 경기에 출전한 츠베타나 피론코바(33·불가리아). EPA 연합뉴스

2020년 9월9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대회 여자 단식 8강 경기에 출전한 츠베타나 피론코바(33·불가리아). EPA 연합뉴스

2020년 세계 테니스를 달구는 열쇳말은 ‘엄마 선수’다. 9월13일 끝난 US오픈 여자단식에 출전한 128명 중 9명이 엄마 선수였다. 그중 츠베타나 피론코바(33·불가리아·세계랭킹 157위), 서리나 윌리엄스(39·미국·9위), 빅토리야 아자란카(31·벨라루스·14위) 등 3명은 8강에 오르며 엄마 선수 돌풍을 일으켰다. 피론코바는 8강전에서 윌리엄스와 대결해 탈락했고, 윌리엄스는 준결승전에서 아자란카에게 졌다. 끝까지 살아남은 아자란카는 결승전에서 ‘차세대 테니스 여제’로 꼽히는 20대 젊은 선수 오사카 나오미(23·일본·3위)에게 세트 스코어 1-2로 패해 준우승을 기록했다. 피론코바, 윌리엄스, 아자란카는 9월27일 개막하는 프랑스오픈에도 출전한다. US오픈에서 보여준 엄마 파워는 아직 식지 않았다.

출산 뒤 찾아오는 근력 약화 등 신체 변화

기자도 올해 12월 출산을 앞두고 있다. 무릎이 좋지 않아 임신 전, 1년 동안 수영장을 다니면서 하체 근력을 꽤 탄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임신과 동시에 심한 입덧으로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체중이 쑥쑥 빠지면서 근력도 같이 사라졌다. 배가 부르면서 3층 높이의 계단을 오르는 것도 헉헉거린다. 지금도 이런데 출산 뒤 내 몸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두렵다. 한강 수영도 즐기던 한 친구는 출산 이후 “매일 수영장에 가서 1시간씩 물살을 가르지만, 이제 한강 수영은 엄두가 안 난다”고 하소연했다.

어릴 때 운동을 시작해 스포츠를 직업으로 삼는 선수들은 사정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은퇴한 펜싱선수 남현희(39)는 2013년 딸을 낳고 4개월 만에 복귀했는데 “아기를 낳고 나서 악력이 떨어져 한동안 검을 잡기 힘들었다”고 했다. 여자프로배구 한국도로공사 센터 정대영(39)은 2010년 2월 딸을 낳고 돌아왔는데, 계속 배구를 하고 싶어서 만삭에도 체중이 불지 않을 정도로 자기관리를 했다. 그는 “그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남현희와 정대영처럼 출산 뒤 복귀하는 선수는 많지 않다. 스포츠 선수가 직업인 여성의 경우 일반 직장을 다니는 여성보다 ‘경단녀’(출산과 육아로 퇴사해 직장 경력이 단절된 여성)가 될 가능성이 크다. 신체를 고도로 단련해 경쟁에서 이기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 스포츠 선수는 정규직이 아닌 개인사업자다. 경쟁력이 떨어지면 계약이 해지되고 외면받는다. 그런데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신체에는 여러 변화가 나타난다. ‘뼈가 시리다’ ‘관절에서 소리가 난다’ ‘머리카락이 마구 빠진다’ 등 부정적 사례가 많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인증 스포츠 전문의인 이상훈 CM병원장은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체형이 변화하면서 몸이 약해지는 일이 많다. 그래서 여자 선수에겐 임신과 출산이 큰 장벽이다”라고 전했다.

테니스는 많이 뛰어야 하는 격렬한 스포츠다. 허리·무릎·발목·손목 등에 각종 부상을 달고 산다. 고질병이 있는 여자 선수들이 출산까지 하고 나면 코트는 더 멀게 느껴진다. 윌리엄스의 경우, 2017년 9월 딸 올림피아를 출산할 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 딸을 제왕절개로 분만했는데 그 과정에서 동맥 중 한두 군데가 혈전으로 막혀 윌리엄스의 생사가 불확실했다고 한다. 출산 뒤 네 번의 수술을 받았다. 윌리엄스는 “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출산 뒤 6주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윌리엄스가 2018년 3월 복귀한 뒤 여전히 톱클래스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메이저대회 단식 결승에 네 번이나 진출했다. 지난 1월에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ASB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복귀 뒤 처음으로 투어대회 정상에 올랐다. 윌리엄스가 이번 프랑스오픈에서 한 번 더 우승할 경우 은퇴한 마거릿 코트(78·오스트레일리아)가 보유한 메이저대회 단식 최다 우승 기록(24회)과 동률을 이룬다. 기록 경신에 큰 의미를 뒀던 윌리엄스는 이제 엄마로서 테니스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아이를 낳은 뒤 모든 여성은 슈퍼히어로가 된다. 이제 내 영웅은 세상의 모든 엄마다”라고 강조했다.

서리나 윌리엄스(39·미국)가 1월12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ASB 클래식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한 뒤 딸과 함께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서리나 윌리엄스(39·미국)가 1월12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ASB 클래식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한 뒤 딸과 함께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아이 낳은 뒤 다시 선수로 뛰려는 ‘꿈과 열정’

2012년 세계랭킹 1위에 올랐던 아자란카는 2016년 12월 아들을 낳았다. 이듬해 6월 복귀했지만 출산의 여파인지 세계랭킹이 900위대까지 떨어졌다. 2018~2019년은 50위권을 맴돌았다. 아자란카는 출산 직후 아이 아빠와 양육권 소송을 하면서 심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아들을 양육하면서 싱글맘이 됐다. 가족의 도움 없이 육아와 테니스를 병행하는 건 힘들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2020년 8월 웨스턴&서던오픈에서 우승했고, US오픈에서 준우승을 거두면서 상승세를 탔다. 아자란카는 “엄마와 테니스 선수, 두 역할의 균형을 잘 맞추는 게 쉽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엄마일 뿐만 아니라 꿈과 목표를 가진 열정적인 사람이다. 계속 삶을 나아갈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윌리엄스와 아자란카는 출산 뒤 몸을 추스르고 바로 코트에 복귀했다. 그러나 피론코바는 출산 뒤 2년 넘게 코트를 떠났다. 2017년 윔블던대회를 끝으로 어깨 부상 때문에 선수 활동을 멈췄는데, 2018년 4월 아들을 낳으면서 코트 복귀를 포기했다. 2010년 9월 개인 최고 31위에 오르면서 주목받았던 피론코바는 아이를 키우면서 스포츠 의류 브랜드 사업에 집중했다. 그러다 올해 US오픈을 통해 코트에 돌아왔고, 복귀 첫 메이저대회에서 8강에 올랐다. 피론코바는 “엄마가 되면 경기하는 능력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아니다. 엄마들도 계속 뛸 수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랭킹 1위인 킴 클레이스터르스(37·벨기에·1016위)는 7년 공백기를 뚫고 돌아왔다. 2남1녀를 둔 클레이스터르스는 2007년 은퇴했다가 딸을 낳고 2009년 복귀했다. 이후 2009년과 2010년 US오픈, 2011년 오스트레일리아오픈 등 메이저대회에서 세 차례 우승하며 엄마 선수로서 전설을 썼다. 2012년 9월 다시 은퇴해서는 코트를 완전히 떠난 것처럼 보였다. 두 아이를 더 낳은 뒤 자신의 이름을 딴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그러다 2019년 9월 두 번째 복귀를 선언했고, 2020년 US오픈에 나와 1회전에서 탈락했다.

9월17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이탈리아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 단식 경기에서 빅토리야 아자란카(31·벨라루스)가 백핸드를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9월17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이탈리아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 단식 경기에서 빅토리야 아자란카(31·벨라루스)가 백핸드를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18년 WTA “출산 전 랭킹 보장” 규정 바꿔

최근 유독 엄마 선수가 늘어난 건, 여자프로테니스(WTA) 규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2018년 말 WTA는 “선수가 임신과 출산으로 대회에 나오지 못할 경우, 출산 이전 랭킹을 보장받고 3년간 12개 투어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2019년부터 이 규정이 적용되자 엄마 선수들이 속속 복귀를 선언했다. 수개월 훈련으로 몸을 만들고 2020년 본격적으로 실력 발휘를 하고 있다. 피론코바는 “WTA 규정이 변하지 않았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규정이 바뀌고 예전 랭킹으로 투어를 뛸 수 있다는 게 정말 큰 기회임을 깨닫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랭킹 포인트를 쌓으려면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열리는 투어대회를 다니면서 이기는 경기를 많이 해야 한다. 대회를 치른 지 1년이 지나면 해당 대회의 랭킹 포인트가 빠지기에, 계속 대회에 나가지 않으면 랭킹은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임신과 출산을 하면 1년 이상은 대회에 나가지 못한다. 그렇게 랭킹이 떨어지면 100위 이내 선수들이 대결하는 투어대회에 나가지 못한다. 메이저대회 본선에 바로 가지 못하고 예선을 치러야 한다. 투어대회보다 아래 단계인 챌린저대회에서 랭킹 포인트를 모아야 한다. 챌린저대회는 경기장도 숙소도 투어대회보다 열악하다. 그러다보니 여자 선수들은 임신과 출산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더라도 임신과 출산을 은퇴 이후로 미뤘다.

그런데 ‘테니스 여제’ 윌리엄스가 2017년 출산하면서 이런 관습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세계 1위였던 윌리엄스가 임신과 출산 이후 1년 만에 복귀했을 때, 랭킹 포인트가 소멸해 491위로 추락했다. 메이저대회에서 23번이나 우승한 현재 최고의 여자 테니스 선수로 꼽히는 윌리엄스가 갓 프로에 데뷔한 선수보다 낮은 순위가 된 것이다. WTA 규정대로라면 윌리엄스는 랭킹에 따라 아주 낮은 등급의 대회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윌리엄스는 엄마가 되는 바람에 벌을 받았다. 부상으로 인한 공백과 출산으로 인한 공백은 명백히 다르다. WTA는 출산하는 선수를 위해 새로운 랭킹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세계 1위였던 시모나 할레프(29·루마니아·2위)는 “윌리엄스는 코트를 떠나기 전 랭킹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엄마 선수들이 0에서 경력을 다시 시작하는 건 부당하다. 만약 윌리엄스가 계속 대회에 출전했다면 1위를 지켰을 것”이라고 했다. 본인의 1위 자리를 내놓아야 할 수도 있었지만, 할레프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모든 여자 선수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결국 WTA는 불이익 없는 출산·육아 휴가를 보장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관중석에서 엄마가 뛰는 경기 보는 아이들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39·스위스·4위), 세계 1위 노바크 조코비치(33·세르비아) 등 남자 선수들은 항상 관중석에서 아이들의 응원을 받았다. 페더러는 딸 쌍둥이, 아들 쌍둥이를 데리고 투어를 다닌다. 조코비치도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낳았는데, 그가 출전한 대회에서 중계 카메라는 관중석에 있는 조코비치 자녀를 비추기 바쁘다. 조코비치는 “아이들이 내가 경기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함께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고 했다.

아이들이 경기장에 오는 것은 아빠 선수만 경험할 수 있는 특권으로 여겨졌다. WTA 규정이 바뀌면서 이제 엄마 선수들도 가능하다. 윌리엄스는 2020년 US오픈에 딸과 함께 참가했다. 남편 알렉시스 오하이언이 관중석에서 딸을 챙겼다. 윌리엄스는 승리할 때마다 딸에게 손을 흔들었다. 윌리엄스는 “아직 딸이 어려서 이 대회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나중에 딸이 기억하든 기억하지 않든, 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해줄 수 있어서 벅차오른다”고 말했다.

박소영 <중앙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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