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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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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만보] ‘일대일로’ 기차 여행, ‘중국몽’을 엿보다

‘중국몽’ 여정의 시작, 베이징 기차역
등록 2020-08-31 07:30 수정 2020-09-05 01:04
베이징역에서 기차를 타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중국 웨이보 화면 갈무리

베이징역에서 기차를 타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중국 웨이보 화면 갈무리

“5분 뒤 기차는 종착역인 카슈가르(이하 카스) 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짐을 챙겨 내릴 준비를 하십시오.” 안내방송이 나오자, 선반 위에서 가방을 꺼내려고 일어섰다. “그냥 있어요. 내가 들어줄게요.” 맞은편 침대칸에 탔던 인민해방군 장교가 일어나 가방을 내려줬다. 그와 나는 24시간을 같은 침대칸에서 ‘동고동락’한 사이다. 전날 오후, 신장웨이우얼(위구르) 투루판에서 출발한 기차는 꼬박 24시간을 달려 중국 실크로드 여행길의 종착역인 카스에 도착했다.

“우리 친구 해요”

카스는 중국 내 위구르족의 문화와 정서가 가장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위구르인이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는 곳이다. 이곳은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통하는 고대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이기도 하다.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실크와 차, 도자기 등 여러 상품이 중앙아시아와 유럽 등지로 흘러갔고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가 교류됐다. 2001년 여름, 나는 베이징 기차역을 출발해서 둔황과 우루무치, 투루판 등을 거쳐 종착지인 카스에 도착하는, 멀고도 긴 실크로드를 여행 중이었다.

그 길의 마지막 여정인 카스행 기차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장교를 만났다. 그는 처음부터 나에게 강한 호감을 내비쳤다. 당시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외국인 여성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남자는 가는 내내 쉴 새 없이 나에게 말을 걸며 중국과 자신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는 예전 카스에서 오랫동안 복무했어요. 카스는 우리나라에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변경 지역이죠. 하지만 직업이 군인인 우리에겐 그리 좋은 근무환경이 아니랍니다. 여기는 고도가 높고 자외선이 강해서 눈과 피부가 상하기 쉬워요. 하지만 몇 년 잘 버티면 승진하기도 쉽죠. 변경에서 근무하면 가산점이 있거든요. 저도 카스에서 몇 년 이를 악물고 잘 버틴 덕분에 지금은 장교로 승진해서 청두로 전속 배치됐어요. 나중에 쓰촨 지역에 여행 오면 꼭 청두에 들러서 나를 찾아요. 훌륭한 안내자가 돼줄게요.”

종착지 카스역에 내려 헤어질 때 우리는 전화번호를 서로 교환했다. “카스에 있는 동안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연락해요. 저는 당분간 일 때문에 이곳에 머물러야 하거든요. 나중에 무사히 베이징으로 돌아가면 안부 전화 한 통 부탁해도 될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구 해요.” 나에게 가방을 건네준 그는 색깔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카스의 혼잡한 거리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광장 사이로 언뜻 보니, 베이징에서도 보지 못한 마오쩌둥의 초대형 동상이 카스의 쪽빛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2013년 카자흐스탄의 대학에서 연설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뉴스

2013년 카자흐스탄의 대학에서 연설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뉴스


정화, 시진핑 ‘중국몽’의 화신

1276년, 두 남자도 베이징에서 출발해 실크로드를 통과하는 길고도 먼 여행길에 올랐다. 그들은 각각 라반 싸오마와 마커라고 불린, 경교(景教·중국에 처음 들어온 기독교의 한 분파)를 믿는 수사였다. 당시 베이징은 몽골족이 지배하던 원나라의 수도였으며, 그들은 베이징 교외의 산속에 틀어박혀서 종교 수행을 하고 있었다. 산속에 은거하며 수행하던 이들은 어느 날, 그들의 신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성지순례를 떠난다. 2009년 중국에 처음 번역된 작자 미상의 책 <라반 싸오마와 마커의 서행기>는 이들의 성지순례기다. 기차와 자동차가 없던 시절, 가난한 두 수사는 베이징에서 출발해 이란·이라크·터키 등을 거쳐 프랑스·이탈리아·영국 등 유럽까지 갔다. 이들이 베이징에서 유럽까지 걸어갔던 육로는 같은 시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출발해 실크로드를 따라 베이징까지 왔던 상인 마르코 폴로의 여정과 정반대 방향이다.

라반 싸오마 일행이 육상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에 간 때로부터 25년쯤 지나, 원나라 말기 1330년에 당시 스무 살의 왕다위안이 지금의 푸젠성 취안저우에서 상선을 타고 말라카해협과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인도, 이집트 등을 거쳐 지중해를 가로질러 모로코까지 가는, 약 5년간의 긴 바닷길 여행을 했다.

왕다위안은 두 번 바닷길로 실크로드 여행을 했다. 이후 약 75년이 지난 명나라 영락제 시대에, 그 유명한 ‘정화의 대원정’이 시작됐다. 왕다위안이 민간인 자격으로 항해 여행을 했다면, 정화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특수한 목적을 띠고 항해길에 오른 ‘정치적 여행’을 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라반 싸오마와 마찬가지로 정화도 몽골족을 따라 남하한 색목인(중국 원나라 때 유럽, 서아시아, 중부 아시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을 통틀어 이르던 말)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이슬람교도였고, 그가 꾸린 원정단에도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 출신 선원이 많았다. 당시 색목인은 지리에 밝고 항해술에도 능했다. 정화는 조상이 이슬람교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독실한 불교도였다.

일곱 차례의 ‘정화 대원정’은 당시엔 정치경제적 영향을 크게 끼치지 못했지만, 훗날 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부르짖은 ‘중국몽’의 화신이 되었다.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실현하자’고 목놓아 부르짖는 시 주석은 ‘정화 대원정’을 침 튀기게 강조하며 ‘일대일로’라는 21세기판 신실크로드 정책을 구상했다. 2013년 9월 시 주석은 카자흐스탄에서 한 연설을 통해, 육로와 해상을 연결해서 고대 실크로드 길을 부활하는, 새로운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이 프로젝트는 2014년부터 2049년까지 총 35년간 진행되는데, 육로와 해로를 합쳐 총 5개의 신실크로드 노선이 구축된다. 이 노선들이 모두 완성되면 우리는 옛날 라반 싸오마와 마르코 폴로, 정화가 힘들게 개척해서 갔던 길을 기차와 배를 타고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다.

베이징역에서 기차를 타면

베이징역에서 기차를 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전세계로 갈 수 있다. 베이징역에는 국제열차 노선이 있다. 그 유명한 시베리아행 열차다. 베이징에서 출발해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가는 노선과,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거쳐 모스크바까지 가는 노선이 운행된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유럽의 관문인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다. 또 베이징역에서 기차를 타고 윈난성 쿤밍으로 가면, 그곳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베트남과 미얀마, 타이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 닿는다. 쿤밍에는 동남아 각국으로 가는 국제 장거리 버스 정류장도 있다. 중국과 파키스탄을 연결하는 철로가 조만간 개통되면 카스에서 기차를 타고 곧바로 파키스탄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금도 카스에선 장거리 국제버스를 타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아시아까지 진입할 수 있다.

만일 지금 중국이 추진 중인 일대일로 노선이 완성되면 베이징역에서 기차를 타고 우루무치, 카스, 아프가니스탄 등을 거쳐 헝가리와 프랑스 파리까지 가게 된다. 다른 노선을 타면 베이징역을 출발해서 러시아와 독일을 거쳐 북유럽에 도착한다. 또 다른 북쪽 노선은 한반도와 일본을 통과해 옌지와 지린, 러시아 등을 지나 유럽에 닿는다. 실현만 된다면 우리도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유럽까지 갈 수 있게 된다. 라반 싸오마와 마커가 베이징에서 걸어 유럽까지 갔던 길을 서울역에서 그리고 베이징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러 갈래 길로 갈 수 있는 날이 이제 머지않았다. 21세기 중국의 신실크로드 선로에선 무엇이 교류될까. 일대일로가 깔리는 신실크로드 시대에 시 주석의 말대로 중국의 ‘평화적인 굴기’와 ‘공동 번영’이 전파될까. 아니면 강압과 복종을 요구하는 ‘제국 질서’와 ‘제국 화폐’가 강요될까.

카스에서 헤어진 인민해방군 장교와의 인연은 몇 달 뒤 청두에서 다시 이어졌다. 실크로드 여행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그에게서 밤마다 전화가 왔다. 그가 청두로 놀러 오라고 꼬셨다. 몇 차례 거절하다가, 마침 한국에서 후배가 중국 여행을 오자 못 이기는 척하며 그의 초청을 수락했다. 후배와 함께 베이징역에서 출발하는 청두행 기차를 타고 38시간을 달려서(그때는 고속철이 없었다), 이틀을 씻지 못한 채 꾀죄죄한 몰골로 청두 기차역에 내리자 저만치서 군용차 한 대가 다가왔다. 여전히 짙은 선글라스를 쓴 그는 운전병이 운전하는 군용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너무나 ‘장교스러운’ 그에게 하마터면 ‘뿅’ 갈 뻔했다.

그 돈가방은 잘 있나요

며칠 우리는 인민해방군 장교의 차를 타고 쓰촨 지역 곳곳을 ‘공짜로’ 유람했다. 여행 막바지에 그는 나에게 ‘구애’ 비슷한 고백을 했다. 자신의 꿈은 전역한 뒤 산 좋고 물 좋은 구이린에 가서 여행사를 차리는 것이라며, 자기와 함께 구이린에 가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지 않겠느냐”는 말을 슬쩍 내비쳤다. 만일 그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인민해방군 장교를 따라 구이린에서 여행사를 하며 한국 관광객 유치에 혈안이 돼 있을지도 모른다.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숙소 근처 식당에서 저녁으로 훠궈를 먹고 있었다. 갑자기 옆자리에서 ‘펑’ 하는 폭발음이 울렸다. 가스통이 폭발한 것이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밖으로 도망쳤고 우리는 잠시 충격으로 멍해졌다. 그런데 눈앞에서 그 남자가 황급히 옆구리에 돈가방을 꿰차더니 혼자 밖으로 줄행랑치는 게 아닌가. 입만 열면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자랑하던 중국 인민해방군 장교는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돈을 갖고’ 튀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에게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거둬들였다. 베이징에 돌아온 뒤 그와 연락을 두절했다. 베이징 근처로 출장 왔다며 “한 번만 만나자”고 전화한 그에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마지막으로 ‘애정 어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고마웠다. 잘 살아라. 안녕!”

조만간 일대일로 신실크로드가 완성되면, 베이징역에서 기차를 타고 죽 달려서 카스까지 직행할 날이 올 것이다. 그 기차 안에서 만일 다시 한 번 우연히 그 남자를 만난다면 묻고 싶다. “그때 그 돈가방은 아직도 잘 있나요?”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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