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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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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사랑한 자리마다 폐허

‘충복’에서 ‘변절자’로 변하는, 토사구팽의 부메랑… 11월 미국 시민은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을까
등록 2020-07-04 05:10 수정 2020-07-04 05:58
6월2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노동자정책자문위원회 회의에서 위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중 최대 치적으로 경제 성과를 내세우지만 11월 대선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로이터 연합뉴스

6월2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노동자정책자문위원회 회의에서 위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중 최대 치적으로 경제 성과를 내세우지만 11월 대선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로이터 연합뉴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황지우 시인은 ‘뼈아픈 후회’라는 시에서 한탄했다. 절절히 사무친 이 구절이야말로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묘사가 아닐까 싶다. 트럼프가 ‘시’나 ‘후회’ 같은 정서적 공감과 자기성찰 능력이 있는 인물인지는 논외로 치자. 누가 더 많이 ‘부서진 채’ 헤어졌는지 따져볼 일도 아니다. 트럼프 자신이 손익계산에 동물적 감각을 가진 부동산 재벌 출신이고, 지금 그의 최대 관심사는 온갖 정치적 추문과 사법적 의혹을 덮어줄 대통령 재선일 테니 말이다.

트럼프 재선 가능성 ‘10%’

11월 미국 대선이 트럼프에게 악몽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지지율도 하향세지만, 재선 가능성이 밑바닥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의 6월 마지막 주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39%에 그쳤다. 대선 후보자 선호도 조사에서도 트럼프(44%)는 경쟁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민주당)에게 10%포인트나 뒤졌다.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가 매일 업데이트하는 ‘2020 미국 대선 예측’ 모델의 추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선거 구호)를 외치는 트럼프에게 더 끔찍하다. 7월1일 기준, 트럼프가 대선 선거인단 538명의 과반(270명)을 확보해 재선할 가능성은 겨우 10%로 나타났다. 반면 바이든의 승리 가능성은 89%나 됐다. 두 후보자의 당선 가능성은 3월15일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역전된 이후 계속 벌어지고 있다. 대선을 불과 4개월 남짓 앞둔 시점에서 트럼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바이러스, 인종주의, 옛 측근들의 반격이다.

올해 초부터 세계를 강타하는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미국은 단연 ‘아메리카 퍼스트’다. 인류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지낸 지 꼭 6개월이 지난 7월1일, 세계 누적확진 1083만 명, 사망 51만9400명 중 미국이 확진 278만 명, 사망 13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코로나19에 걸렸거나 숨진 세계인구 4명 중 1명이 미국인이다.

미국의 코로나19 참사는 트럼프 책임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자외선 노출” “살균제 인체 주입” 같은 무지하고 위험천만한 언행은 제쳐두고라도, 트럼프는 바이러스 확산 차단 효과가 검증된 마스크 착용에도 처음부터 부정적 태도로 일관했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거듭된 권고도 무시했다. 그러던 그가 7월1일 미국 방송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돌연 “마스크 착용에 대찬성”이라고 말을 바꿨다. 대통령이 앞장서 마스크를 외면한다는 비난 여론이 그치지 않는 것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이 마스크를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나는 대통령이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미리) 검사를 받고 마스크를 쓴다”고 해명했다. 그는 여전히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나라에는 사람들이 꽤 거리를 유지하는 곳이 많다”고 강변했다.

BLM에 ‘노골적 인종주의’로 화답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편견과 인종차별도 새삼 도마 위에 올랐다. 5월26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에게 비참하게 살해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플로이드는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길바닥에서 백인 경찰관의 무릎에 8분46초 동안이나 목을 짓눌렸다. 47살의 덩치 큰 남성이 “엄마… 숨을…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수차례 호소하다가 끝내 숨졌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Black Lives Matter)는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삽시간에 미국 전역과 세계 각지로 퍼졌다.

트럼프의 대응은 낯설지 않았다. 그는 시위대 전체를 싸잡아 “폭도와 약탈자, 무정부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약탈이 시작될 때 총격도 시작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며 연방군을 동원한 무력 진압 가능성도 내비쳤다. 시민사회와 민주당의 거센 비난뿐 아니라, 집권 공화당에서조차 “도움이 안 된다” “매우 유감스럽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6월24일 공화당의 존 슌 상원 원내대표는 “백악관의 메시지에 관한 한 확실히 전략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이번 대선(의 대결 구도)은 ‘트럼프 대 트럼프’”라고 꼬집었다. 트럼프 자신이 최대의 적이란 얘기다.

2018년 4월 갓 임명된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오른쪽)이 백악관에서 각료회의를 주재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응시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18년 4월 갓 임명된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오른쪽)이 백악관에서 각료회의를 주재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응시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 스캔들’ 비망록은 나올까

트럼프는 플로이드가 숨지고 한 달이 지난 6월28일에도 트위터에 노골적인 백인우월주의 영상을 올렸다가 논란이 커지자 삭제했다. 플로리다주 빌리지스에서 은퇴 세대 백인들이 시위 행진을 하면서 “화이트 파워”(백인 권력)라는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었다. 트럼프는 이 영상에 “빌리지스의 위대한 시민들에게 감사하다. 급진좌파 민주당은 몰락할 것이다. 또 보자”라는 댓글을 달았다.

트럼프는 2015년 대선에 뛰어들기 직전까지 10년 넘게 방송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의 진행자였다. 당시 그는 “당신은 해고야!”(You’re fired!)라는 말을 대유행시키며 전매특허로 삼았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자신이 기용한 최고위급 관리들을 걸핏하면 해고했다. 모욕적인 ‘트위터’ 메시지 통보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잘린’ 관리들이 2020년 대선을 앞두고 거대한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6월24일 <블룸버그뉴스>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행보가 전직 보좌관들과 각료들이라는 이례적이고 강력한 적수에 맞닥뜨리고 있다”며 “그의 배반자들은 그 규모와 높은 직위, 비판의 격렬함에서 트럼프에게 더욱 충격적이다”라고 짚었다.

특히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2018년 4월~2019년 9월)이 최근 펴낸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에서 폭로한 내용은 격렬한 진위 공방에 휩싸이며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볼턴의 주장대로라면, 트럼프는 국내외 정책과 의사 결정에서 최고지도자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무능과 무책임으로 일관했다. 지난해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트럼프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자신의 재선을 도와달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트럼프를 바이올린 연주처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그(트럼프 대통령)는 거짓말쟁이”라거나 “북-미 외교의 성공 확률이 제로(0)”라는 식의 뒷말을 했다, 같은 주장이 담겼다.

볼턴의 전임자였던 허버트 맥매스터 전 보좌관도 9월에 회고록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는 러시아에 대한 백악관의 모호한 태도를 놓고 트럼프와 충돌한 뒤 경질됐다.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해 트럼프의 당선을 도왔다는 미 정보 당국의 평가에 동의한 것도 전격 해고의 구실이 됐다. 민주당이 트럼프 탄핵을 추진한 핵심 이유였던 ‘러시아 스캔들’의 비망록이 나올지 관심이 쏠린다.

트럼프의 조카딸 메리가 트럼프 일가의 유산 상속 다툼을 둘러싼 흑역사를 쓴 회고록도 고약한 시한폭탄이다. 트럼프는 ‘비밀 유지 계약’을 구실로 소송까지 경고하며 법원에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7월1일 뉴욕 연방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일단 고비는 넘겼으나 불씨는 뜨겁게 살아 있다. 출판사는 “(이 책이) 트럼프와 그를 만들어낸 해로운 가족에 대한 권위 있는 폭로성 묘사”라고 광고했다.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 존 켈리 전 백악관전 비서실장,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 제프 세션스 전 법무장관, 데이비드 셜킨 전 보훈장관, 앤서니 스캐러무치 백악관 공보국장, 클리프 심스 백악관 공보관 등 백악관 핵심부에 몸을 담갔던 최고위급 관리들도 줄줄이 트럼프 비판 대열에 가세하고 있다.

“이기고 싶지만 책임은 감당하지 않는다”

트럼프로선 고립이 깊어질수록 재선이 절박할 수밖에 없다. 그의 재선 욕망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도 나온다. 최근 미국 인터넷 매체 <데일리 비스트>는 “트럼프가 재선을 바라는 진짜 이유는 단임 대통령에 머무는 패배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비꼬았다. “트럼프는 정책적 성과를 내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 그의 삶은 끊임없는 ‘기이한 쇼’이며, 그는 이기고 싶어하지만 대통령직에 따르는 어떠한 책임도 감당하길 원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단임 대통령’에 대한 트럼프의 수치심 맞은편에는 미국 시민의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다. 6월30일 퓨리서치센터가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요즘의 미국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17%만이 “미국이 자랑스럽다”고 답했다. “분노스럽다”는 응답이 71%로 가장 많았고, “두렵다”(66%)가 뒤를 이었다. ‘요즘 나라가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선 무려 87%가 “불만스럽다”고 털어놨다. 트럼프에 대한 평가에서도 “끔찍하다”(42%)거나 “형편없다”(11%)는 부정적 여론이 우세했다.

7월4일은 미국 독립기념일이다. “모든 사람의 평등과 생명·자유·행복 추구권”을 천명한 독립선언은 올해 들어 유난히 불평등과 반생명과 분열로 얼룩졌다. 미국 시민들이 지금의 깊은 상처와 훼손된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을까. 11월 대선이 그 시금석이 될 것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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