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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시위 르포] 인종차별, 바이러스보다 위험한

LA 교민이 참석해본 항의 시위… 하루 1100명 코로나19 확진받았지만
‘인종차별이 바이러스보다 위험하기에’

제1317호
등록 : 2020-06-12 13:55 수정 : 2020-06-1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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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5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도심에서 열린 인종주의 반대 시위에 한국 이민자 인권단체 ‘민족학교’ 회원들이 풍물을 앞세워 참여했다. 황상호 제공

5월30일 토요일 오후 미국 서부 대도시 로스앤젤레스(LA)에 ‘통행금지’가 발령됐다. 1970년대 흑백텔레비전 시절 장발 단속 때나 쓰던 단어가 2020년 미국 엔터테인먼트산업의 수도에 소환됐다. 하루 전, 수천 명의 시위대가 주요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차를 불태웠다. 좀도둑은 가게 유리문을 박살 내고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 이튿날도 양상은 비슷했다. 밤늦도록 방송사 헬리콥터는 약탈 현장을 이(e)스포츠처럼 생중계했다.

1992년 로드니 킹과 같은 점, 다른 점

닷새 전인 5월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 데릭 쇼빈의 무릎에 눌려 질식사했다. WWE 프로레슬링에서나 쓸 법한 과격한 행위였다. 그 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5월29일부터 매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내가 참여한 것은 6월1일부터다. 미국 인권은 다름 아닌 흑인 노예제 해방을 비롯한 흑인의 핏값으로 세워진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나는 무임승차자 중 한 명이다. 오후 5시 통행금지가 떨어졌지만 수만 명이 모였다.

현장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6시30분쯤 할리우드에 도착했을 때, 소총을 비스듬히 안은 경찰이 막 열을 맞춰 시위대를 차도 밖으로 밀어내는 참이었다. 긴장감이 딴딴하게 고조됐다. 경찰은 외떨어진 시위자를 골라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감옥으로 보내겠다고 고함쳤다. 일부 시위자를 향해서는 연막탄을 쐈다.

경찰이 시위대를 토끼몰이하는 동안 골목 상점은 좀도둑의 먹잇감이 됐다. 서너 명이 가게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멀리서 무리지어 다니던 또래 10여 명이 하이에나처럼 돌진해 가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야구방망이를 들고 다니는 녀석도 있었다. 한 무리는 전동 드릴과 둔기로 현금인출기를 끙끙거리며 뜯었다. 해는 저물어 하늘은 살굿빛으로 물들었다. 인도에는 백인 노숙인이 거적때기를 덮고 왼팔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고 있었다.

시위 초반 아시아계 커뮤니티는 적지 않게 긴장했다. 1992년 4월29일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서 발생했던 소요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다. 플로이드를 숨지게 한 경찰팀에 토우 타오라는 아시아계 몽족 경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양상이 다르다. 당시 사건은 흑인 로드니 킹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를 집단 구타한 경찰들이 무죄로 풀려나는 등 흑인 차별에 억눌렸던 분노가 있는데다 15살 흑인 소녀를 총격해 숨지게 한 한인 소매점주 사건이 겹치면서, 한인타운이 집중포화를 맞았다. 이번 분노는 정확히 야만적인 경찰력 남용을 향했다. 또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라틴계 사람들이 함께 거리로 나왔다. 장소도 과거에는 흑인 거주지인 사우스 LA와 한인타운 일대에서 발생했다면 이번에는 시청과 법원이 모인 다운타운과 힙스터 명소 할리우드 일대다.

폭력적 시위 양상, 여론 따라 평화 분위기로 전환

여론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약탈에 대한 비난은 흑인 노예제에서 비롯한 사회구조적인 빈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그럼에도 범죄는 안 된다는 목소리였다.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애틀랜타 흑인 여성 시장 키샤 보텀스와 래퍼 킬러 마이크는 “약탈은 마틴 루서 킹의 유산이 아니다”라며 울먹이듯 화내듯 호소했다. 그사이 주방위군이 장갑차량 험비를 끌고 다니며 LA 주요 은행 건물과 지하철, 시위 지역에 배치됐다.

6월3일 오후 3시 LA 시청 앞 시위에 나는 다시 참석했다. 몇 블록 떨어진 법원까지 인종 구분 없이 수만 명이 모였다. 어림잡아 서울시청 앞 광장을 꽉 채울 만한 수였다. 청년들은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 “정의 없이 평화도 없다”(No Justice, No Peace)를 외쳤다. 누군가는 흰 국화꽃을 흔들었다. 시위대는 “총 쏘지 말라”(Don’t Shoot)며 두 손을 높이 들었다. 플로이드가 목 졸렸던 8분46초 동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묵념했다.

시위는 며칠 만에 평화 분위기로 바뀌었다. 약탈과 폭력 시위에 대한 여론이 따가운데다 LA 시장이 흑인 차별에 반대한다며 공식 발표하는 등 시위대를 달랜 결과다. 어떤 이는 자전거를 끌고 나와 생수와 과자, 손수 만든 땅콩크림 샌드위치를 나눠줬다. 마스크와 장갑을 제공하는 시위자와 분사형 손소독제를 들고 다니며 참가자 손에 뿌려주는 여성도 있었다. 해가 지자 시위대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클럽에 있는 것처럼 춤을 췄다. 한국 촛불시위에는 중장년층이 많이 모였지만 미국 시위대는 주로 청년층이다.

한인 풍물패와 태극기도 함께 행진

그날도 로스앤젤레스카운티에서는 1100명 넘게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시위대도 그 위험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경험도 있다. 1918년 9월28일 필라델피아에서는 스페인 독감 발병에도 주민 20만 명이 1차 세계대전 승전을 축하하는 행진을 했다가 한 달 뒤 1만 명이 독감으로 사망했다. 그럼에도 2020년 미국 청년들은 인종차별이 바이러스보다 더 질기고 위험하다고 판단 한다.

시위는 특정 지도부 없이 개별 단체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일정을 올리면 모이는 식으로 이뤄진다. 6월5일 다운타운에서는 아시아계 이민자가 제법 모였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였던 고 윤한봉 선생이 미국으로 망명해 세운 이민자 인권단체 ‘민족학교’도 아줌마 풍물패를 앞세워 참석했다. 20~30대로 보이는 한인 청년 30여 명도 눈에 띄었다. ‘한인도 흑인 차별에 반대한다’는 손팻말과 대형 태극기가 등장했다. 한인 청년들은 아줌마 풍물패를 향해 “언니 멋있어요”라며 기운을 북돋웠다. 고층 빌딩 주민이 베란다로 나와 색소폰을 불거나 냄비를 두드리며 응원했다. 도로에 멈춘 차는 경적을 울리며 호응했다.

6월 7일 오후 4시 할리우드에는 이제까지 가장 큰 규모인 경찰 추산 2만 명이 집결했다. 구체적인 시위대 숫자를 경찰과 언론이 거론한 것은 처음이었다. 흑인 인권단체 ‘BLM-LA’(Black Lives Matter-L.A.) 등이 시위를 조직하고 지역 래퍼들이 합류했다. 중년층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한 흑인 아버지는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딸과 시위에 참가해 “지금 역사가 바뀌는 모습이야 꼭 기억해야 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도 10일 이 운동을 지지한다는 여론이 청년층을 따라 중장년, 노년층에서 상당히 오르고 있다는 통계 자료를 보도했다.

흥미로운 것은 지역 언론의 엄호사격이다. 미국 신문 시장도 쇠퇴해 사실상 <LA타임스>만이 이 지역에서 버티고 있다. <LA타임스>는 ‘경찰도 범죄자 단속 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논쟁적 주장에 대해 “경찰은 총기 사용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며 경찰 과잉 진압에 분명한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패트릭 순시옹 엘에이타임스 회장은 6일 “인종차별과 편견에 대한 백신은 없다. 인종차별에 맞서야 한다. (우리는) 방관자가 될 수 없다”며 독자 편지를 썼다.

그사이 플로이드 살해 경관 데릭 쇼빈은 기존 3급 살인과 2급 과실치사 혐의에다 최대 40년형이 부과되는 2급 살인 혐의가 기소 내용에 추가됐다. 민주당 대선 후보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여론조사에서 두 자릿수 격차로 앞섰다. 하지만 트럼프는 살아 있는 권력이다. 그는 혼란을 틈타 기업에 유리한 환경법 완화 정책을 통과시켰다. 머지않아 트럼프 친필 서명이 담긴 2차 경기부양금이 미 전역에 풀릴 것이다. 트럼프는 의제 전환의 달인이다. 선거는 5개월 남았다.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으며 현재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황상호 미국 로스앤젤레스 민족학교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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